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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쓰는 용어 중에 '아젠다(Agenda)'라는 단어가 있다. 본래의 의미는 회의 등에서 거론되는 의제나 안건을 나타내지만 언론에서 쓰일 때는 현재 여론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중요관심사'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 단어다.

언론은 원래 국민들의 뜻을 반영해 기사를 내보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국민들의 의사와 관련없이 어떤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아젠다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5공과 조선일보가 주도했던 '평화의 댐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정부는 북한에서 댐을 터뜨리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발표했고, 중앙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기사를 써내 이를 막을 '평화의 댐'을 위한 코흘리개의 돈까지 모금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용히 민주화 세력을 연행해갔던 것이다.

'서울 물바다'의 사실 유무를 떠나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가 충족되자 댐 건설을 그만두어 버린 사실은 '평화의 댐'이 여론 전환용으로 쓰였음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언론 보도와 여론의 장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던 시대에 일어난 보기드문 희극이다.

멀리 올라갈 것도 없이 얼마 전까지 선거철이면 터지곤 했던 '북풍'과 그 때마다 되풀이되던 중앙 언론의 호들갑을 생각해보면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올해가 다사다난한 해였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월드컵부터 경의선 착공, 개구리소년 시신 발견, 대통령 아들 구속, 반미 시위,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뉴스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뉴스들을 주도했던 것은 몇 년까지 무소불위의 여론 형성력을 자랑하던 거대 언론사들이 아니었다. 이는 각 언론사와 포털사이트에서 발표한 올해의 10대 뉴스를 보면 금방 드러난다.

일단 모든 언론사와 여론조사 결과는 △월드컵 4강과 붉은 열풍 △노무현 대통령 당선 △ 미군 장갑차 사건과 반미시위 △사상 최악의 재해를 불러온 태풍 루사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구속이 올해의 10대 뉴스라는 데 동의했다.

▲ 서울시청 광장에 모여 응원전을 펼치던 시민들이 경기가 끝나고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조선일보>는 여기에 서해교전, 병풍사건, 총리 인준안 부결, 가계부채 급증, 탈북자들의 러시를 추가했고(12월 25일), <문화일보>는 개구리소년의 시신발견, 경의선 공사 착공, 총리 임명동의안 잇단 부결, 은행 주5일 근무제 도입, 칸과 베니스에서 한국 영화의 수상(12월 26)을 올해의 뉴스로 꼽았다.

<중앙일보>는 현대 4천억 북한제공 의혹, 서해교전, 북한 핵감시장치 제거, 총리 인준안 부결, 검찰서 피의자 구타사망을(12월 24일), <한겨레신문>은 북 핵 봉인 제거, 서해교전, 민주노동당의 약진, 경의선 공사 착공, 주 5일 근무의 확산(12월 27일)을 각각 10대 뉴스로 꼽았다.

그리고 네이버의 조사에서 네티즌들은 개구리소년 유골 발견, 동계올림픽 판정시비, 북한의 부산 아시안게임 참가와 북한 응원단의 인기, 서해교전 사태, 국제사회 테러 공포 확산을 뉴스 목록에 추가했고 엠파스의 조사에서는 개구리소년의 시신 발견, 동계올림픽 판정시비, 이주일씨 별세, 북한과의 서해교전, 노사모와 노풍을 10대 뉴스로 선정했다.

언론사의 성격별로 뉴스 선정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10대 뉴스를 살펴볼 때 2002년에 언론 권력이 더 이상 예전처럼 마음대로 아젠다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 '당선자 확실' 보도 이후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민주당사에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권양숙씨.
ⓒ 마이너
먼저 '밤의 대통령'이 소유한 신문이자 '대통령을 만드는 신문'이었던 <조선일보>는 15대 대선에 이어 이번에도 '대통령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조선일보는 대선 기간 내내 예전처럼 선거를 보-혁 구도로 몰고가려는 의도를 드러내며, 다른 한편으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사상적 검증을 시도했지만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고 선거판은 그 의도대로 짜여지지 않았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북-핵 사건이 터지자 조중동은 '북풍'을 이용해 남북한 대립 상황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국민들은 대립보다는 평화를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정몽준 후보의 폭탄선언 이후 조선일보는 편향적인 사설을 게재하고 당일날 아침 신문을 전국적으로 살포했지만 그 역시 대선 판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 대신 대선에 큰 영향을 끼치고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킨 일등공신이 조선일보가 그토록 비난해왔던 노사모였다는 사실은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얼마나 쇠퇴했는가를 드러내는 단적인 사실이다.

▲ 14일 시청 앞 광장에서 집회를 가진 추모행렬이 광화문 사거리를 가득 메운 채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미군 장갑차 사건에 따른 반미시위를 생각이 짧은 행동으로 매도하며 반미 열풍을 잠재우려고 했던 조선, 중앙, 동아일보의 노력도 그다지 신통한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들 신문은 시민들의 감정은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점잖은 충고를 던졌지만 그 충고에 귀를 기울인 이들은 많지 않았다. 급기야 보다못한 한나라당의 서창원 대표가 '반미를 선동하는 세력'이 있다고 발표했지만 네티즌들의 평화적인 촛불시위를 매도하려는 그 발언에 동조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는 1991년 '분신정국' 당시 박홍 신부의 발언과 김지하 시인의 기고문으로 학생 운동을 잠재웠던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역시 예전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반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면에는 거대 언론사가 대신에 끝까지 비폭력을 고수한 수많은 네티즌들과 인터넷 대안 언론의 노력이 있었다. 이는 아젠다가 언론권력에서 나오던 지난날과 달리 이제는 기존 언론을 거스르면서도 성립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인터넷의 승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간첩 마타하리를 언급하며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인기를 끌었던 북한 응원단을 매도하려고 했던 조선일보의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고, 태극기를 팽개쳤다며 오노와 김동성을 같은 급으로 묘사했던 조선일보의 만평은 네티즌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예전에 언론 권력이 여론을 자유롭게 '제조'할 수 있었던 것은 언로가 소수에게 독점되어 있었고 국민들이 걸러지지 않은 뉴스를 전달받을 방법도,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개진할 공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보화가 진전되며 대안 언론이 생겨나고 언론의 역할 없이도 국민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되면서 '아젠다'를 만들어내고, 그럼으로써 여론을 창출하던 언론 권력은 그 힘을 잃었다. 그 결과가 '올해의 10대 뉴스'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2003년에는? 언론 권력이라는 말이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지금 2003년에 대안언론과 네티즌들은 또 어떤 아젠다를 만들어내며 우리 사회를 선도해 나갈지, 기대되어 마지않는 부분이다.

덧붙이는 글 | 돌아간 시간을 되짚어보는 것만큼이나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지요.

2003년에 네티즌들의 힘을 모아야할 사안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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