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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인 김규항은 요즘 한창 새로운 책을 발간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지금은 최근에 발행했던 '서준식 옥중서한집'에 이어, 대선 이후에 서준식 씨의 새로운 글을 책으로 엮어 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출판인 김규항은 요즘 한창 새로운 책을 발간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지금은 최근에 발행했던 '서준식 옥중서한집'에 이어, 대선 이후에 서준식 씨의 새로운 글을 책으로 엮어 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다 ⓒ 황예랑
그는 ‘진보에 외상은 없다. 네 이념대로 찍어라’라고 한마디 툭 던져놓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선이 시작되기 전부터 진보, 민주, 좌파 운운하던 유명 인사들이 다 들고일어나 노무현 지지, 권영길 지지 외치는 판에 유독 김규항씨는 애써 말을 아껴왔다.

2호선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야간비행’이라는 출판사를 차려놓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김규항씨를 찾아가 대뜸 “대선에 관해 무슨 말이든 해야하지 않겠냐”고 따지듯이 묻자 “별 생각이 없는데…”라고 말하면서도 기대했던 입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번 대선에서 누굴 찍을 생각이세요?”
“글쎄요. 아마 권영길을 찍을 것 같습니다.”
“그럼, 권영길 지지 입장이시네요.”
“아니, 권영길 지지는 아닌데. 비판적 지지쯤으로 해두죠.”

오고 가는 말이 몇 차례 빙빙 돈다.
“제도권 진출이 진보정치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도권 진출은 진보진영 전체의 확장으로써의 의미가 있겠죠. 그런 면에서 권영길의 지지율 상승도 의미 있는 것입니다.”

이쯤 되고 나서야 김규항씨가 ‘권영길 비판적 지지’를 선택한 이유가 조금씩 이해가 된다.

“부유세 등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 정책이죠. 사회민주주의란 결국 좌파의 진출을 장기적으로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기득권 세력과 좌파와의 오랜 투쟁의 열매라는 점도 인정해야겠죠.”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그가 자신의 입장을 지칭하는 말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좌파’다. 좌파지식인으로서 오랜 좌파 투쟁의 부산물인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지지, 그것이 김규항씨가 2002년 대선에서 선택한 길이 됐다. 그의 말에서 자신이 선택한 대상을 온전하게 지지할 수 없음으로 인한 고민도 충분히 묻어난다. 그 동안 대선을 앞두고도 그가 굳이 사람들 앞에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고민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김규항씨의 비판은 역시 ‘우파’를 향했을 때, 날카로움이 더해진다. 김규항씨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진보진영을 ‘개혁적 우파’라고 불렀다. 이에 해당하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 개혁국민정당 유시민 기획위원 등의 노무현 지지에 대해서 김규항씨는 보다 분명한 비판 입장을 드러냈다.

“진보진영이 독재와 맞서 싸워야 할 때에는 반독재 연대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폭력적 파시즘은 물러갔고, 사회의 이념은 분화되기 시작했죠. 이제 진보진영이 독재를 반대하기 위해서 하나 될 시대는 지나간 것입니다.”

‘진보에 외상은 없다’라고 했던 김규항씨의 비판도 마찬가지로 ‘개혁적 우파’를 향해 반독재가 아닌 진보 자체를 이야기할 때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념의 분화는 대중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권영길 후보가 가장 큰 수혜자인 셈이지요. 젊은 층은 진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규항씨는 이에 덧붙여 좌파도 이런 변화에 맞춰야 한다며, 단지 선언에 불과한 사회주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나는 사회주의자다’라는 선언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주의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회당의 이념은 사회주의적인 것인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그저 겉으로 내세우는 것만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문제죠.”

그렇다면 김규항씨가 지금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비판적 지지하는 것도 현실에서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사회주의 세력을 기다리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앞으로 사회당에게는 당의 입장과 정체성을 설득력 있게 다듬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제도권 선거에 뛰어들었을 때, 어떤 방법으로 선거 운동을 펼쳐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할 것 같구요.”

민주노동당의 대선 이후를 묻는 말에는 ‘그냥 하던 것처럼, 사회민주주주의 정당으로서의 길을 갈 것이다’라는 짧은 말로 답변한다.

힘있는 사회주의 세력의 등장을 기다리며 2002 대선에서 사회민주주의 비판적 지지를 선택한 좌파 사회주의자. 이번 대선에 임하는 김규항씨의 모습이다.

“대선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념의 지형을 넓혀갈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사회주의를 기다리는 그의 바람은 곧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들의 시작이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학생신문 홈페이지에도 게시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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