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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운 선생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던 그날.
성내운 선생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던 그날. ⓒ 김태문
일제의 식민통지가 극에 달했던 시절에 조용한 농촌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서슬퍼런 군사 독재 시대를 살아오시는 동안,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래서 사람이 모이는 곳에 늘 함께 했던 선생님! 그는 늘 어린이, 약자, 소외된 자, 아파하는 자와 가까이 했습니다.

39세 젊은 나이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 소아 재활원 부속국민학교 초대 교장을 맡아 하시면서 상처받은 아이들의 친구로 다가서기도 했습니다. 이제 40대 중·후반의 나이가 돼버린 재활원 부속국민하교 졸업생들은 지금도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 시절을 무척 그리워한다고 합니다.

"참되게 사는 법과, 저희들이 바로 그 학교의 주인이며 또한 나라의 주인이라는 점과, 그 주인으로서 어떤 의무가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관해 일러주셨던 선생님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심지어는 약하고 어리석은 저희 제자들로부터도 무언가를 배운다고 하시던 그 말씀을 통해 저는 사람이 참으로 무엇을 배우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재활원 제자들이 있어서 선생님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산 정상에서 두 손자, 은우근 교수와 함께
산 정상에서 두 손자, 은우근 교수와 함께 ⓒ 김태문
"신념 속에 살아오신 삶 자체가 교육이셨던 선생님의 생을 통해 저는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아냈습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자기 수양이기에 외로운 자신과의 투쟁이라고 생각하며, 나타나고 보이는 것보다 나타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을 위해서 살아가겠습니다. 저희들은 지켜보시는 선생님의 눈 속에서 끝없는 관심과 그윽한 사랑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있는 한 부족한 저를 다스리며 선생님의 뒤를 따라 열심히 꾸준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저는 저의 삶에서 선생님을 만나 뵐 수 있었고, 또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1986년 11월에 노승란 올림.-


89년 여름 '무명산악회'가 오대산에서 가족 모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함께 참여한 어린애들과 웃고 장난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어린애들을 특히 좋아하셨습니다. 그 맑고 천진난만한 애들의 모습 속에서 선생님의 진가는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애들도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잘 따랐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오대산 외진 계곡의 맑고 푸른 물 속에서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물장구 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무런 억압과 구속 없이 이렇게 물 속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야!"라고 하시던 말씀 속에서 '자연인'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교사들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셨다.
선생님께서는 교사들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셨다. ⓒ 김태문
선생님은 산을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10·26 포교령 위반사건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81년 초겨울부터 산행을 통해 보고싶은 얼굴들을 만나셨습니다. 건강을 생각하면서 산행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 시절 답답한 마음을 산바람을 쐬면서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름을 '무명 산악회'라 부르고 신경림 시인, 박용수 시인, 안종관 희곡작가, 정희성 시인, 현기영 소설가, 김종철 언론인, 김도연 시인, 김학민 출판인, 최민화 등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무명산악회' 산행에 몇 차례 따라갔었습니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자상한 잔소리꾼이셨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셔서 늦게 나오는 분들에게 일일이 전화하시면서 "빨리 나오시오", 길을 걸을때는 "차 조심하시오", 산에 올라가서는 "낭떠러지 조심하시오", 밥을 할 때도 "버너의 불조심하시오." 개울물을 건널 때도 "물 조심하시오". '무명산악회의' 기둥이셨던 선생님은 그래서 별명이 '시골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이셨다고 합니다.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올 성탄절에도 선생님을 만나 뵈러 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날 선생님은 이 땅을 떠나셨거든요.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13년이 지났건만, 변변한 추모사업회 하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부끄럽습니다.

해마다 12월 25일이 오면 선생님을 만나뵈러 간다.
해마다 12월 25일이 오면 선생님을 만나뵈러 간다. ⓒ 김태문
작년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함께 했던 윤한봉 선생께서 대노하시면서 "선생님을 존경하며 기리고자 하는 몇몇 사림이라도 모여 추모사업회를 꾸리자"고 하셨습니다. 자리를 같이 했던 광주대 이종수, 은우근 교수, 연세대 동문들도 모두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내년에도 먹고산다는 핑계, 일 많아서 바쁘다는 핑계로 허둥지둥 살아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약속합니다. 반드시 선생님을 추모하고 숭고한 뜻을 기릴 수 있는 추모사업 모임이라도 꾸리겠습니다. 그 모임이 비록 가난하고 초라하여 보잘 것 없다 하여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다는 이들과 함께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성내운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행복하고 복에 겨운 과분한 시절이었음을 회상합니다. 지금까지 나의 유일한 스승님으로 남아 계시는 선생님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배웠고,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쳤으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도 절실히 느꼈습니다. 매일 매일의 복잡하고 심난한 혼돈의 시절을 살고 있는 지금, 가슴 저리도록 성내운 선생님이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

덧붙이는 글 | 우리 교육계의 영원한 스승, 성내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쓴 글을 마칩니다. 선생님이 꿈꾸고 실천했던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과 참교육이 하루 빨리 실현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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