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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새벽, 문 밖으로 나서니 보리소골 골짜기에 온통 흰 눈이 덮여 있었습니다. 잠시, 서울로 돌아갈 길이 험할까 걱정을 하다가, 어느새 이렇게 낭만을 버리고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린 저 자신에게 깜짝 놀랐습니다.
제 뒤를 따라 나온 늦둥이 진형이 녀석은 눈을 보더니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릅니다.
"아빠, 나 눈사람 만들래."
마침 함께 온 제자 아이들과 녀석은 신이 나서 마당가에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빠, 이거 개미 눈사람이다. 몸이 세 개잖아. 손발도 많고."
눈사람에 싸리나무 가지를 꽂아놓은 진형이 녀석이 쨍한 목소리를 냅니다. 그 목소리가 눈발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아침을 먹고 나자 눈발이 더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눈은 어디서 오는지, 흐린 하늘을 하염없이 내려와 온 골짜기를 덮고, 나뭇가지에도 지붕 위에도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산책 길,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 위로 새 발자국이 몇 점 꽃잎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 배추가 무성하던 밭도 눈에 덮여 마치 흰 벌판 같습니다.
"나 구를래. 굴러 볼 거야."
늦둥이 녀석은 갑자기 눈밭에 드러눕더니 마구 제 몸을 굴려댔습니다. 그런 녀석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습니다.
눈은 오전 내 계속되었고, 우리는 서둘러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은 눈 내리는 골짜기에 두고, 몸만 돌아왔습니다. 출근을 하고, 또 각자의 맡은 일을 위해 한 주를 시작하지만, 늦둥이 마음 속에는 여전히 보리소골 눈밭이 남아 있나봅니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녀석은 계속 물었습니다.
"아빠, 우리 토요일날 보리소골에 또 갈 거지? 눈사람이 그때까지 남아 있으면 좋겠다. 내가 만든 개미 눈사람 말이야."
돌아오는 토요일, 고향집에 가면 아마도 그 눈사람은 녹아버리고 없겠지요. 그러면 우리 늦둥이는 울상을 지으며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빠, 내 개미 눈사람 어디 갔어?"
저는 그때를 위해 이런 대답을 마음 속에 준비해둡니다.
"눈사람은 이제 눈 나라로 갔단다. 봐라, 눈이 하나도 없잖아. 눈사람은 눈이 많은 나라에서만 살 수 있거든. 그래서 눈 나라로 갔다가, 다시 보리소골에 눈이 내리는 날 진형이를 보러 올 거야. '어서 나를 눈사람으로 만들어줘!'하고 웃으며 말이야."
그러면 녀석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럼 난 아주 아주 큰 눈사람을 만들 거다. 개미 눈사람도 만들고, 멍멍이 눈사람도 만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