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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과 더 멘(The Men) '거짓말이야'
신중현과 더 멘(The Men) '거짓말이야' ⓒ 배성록
엄밀히 말하면 이 음반은 ‘재발매’ 음반이 아니다. 즉, 이 CD와 같은 트랙 리스트로 된 음반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노릇인가. 수록된 세 곡은 더 멘(The Men) 시절에 녹음한 것들로, 매니아들 사이에 ‘그런 연주가 있다’는 소문만 무성하고 구할 길은 마땅찮던 곡들이다.

가령 두 번째 곡 <거짓말이야>는 무려 23분 길이의 ‘대곡’으로, 녹음 당시에는 윤용균의 음반 LP의 한 면 전체를 차지했던 트랙이다. <안개 속의 여인>도 마찬가지로 지연의 음반 뒷면에 실린 긴긴 대곡이다. 이처럼 구하려고 무진 애를 써도 구할 길이 없던 세 희귀곡이 이번 기회에 한 음반에 담긴 것이다. 마음 깊이 감사할 일이 아닌가.

이 세 곡이 특별히 매니아들의 짝사랑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 곡들이 그야말로 전성기 신중현식 싸이키델릭의 진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본래 신중현과 더 멘은 음반 앞뒤면을 분리해서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앞면은 가수 중심의 대중적인 노래들로, 반대로 뒷면은 밴드의 긴 연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구성은 더 멘이 반주를 맡은 음반들 뿐만 아니라, 신중현의 작업들 가운데서 의외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더 멘의 작품은 아니지만 ‘김추자’의 데뷔 음반도 앞면과 뒷면이 확연히 다른데, 거칠게 말하자면 앞면의 음악들은 판을 판매하는 역할을, 뒷면은 음악적 욕구를 분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보면 좋겠다. (아마 이 정도 길이의 곡들이라면 당시의 공연장에서도 연주할 기회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분량과 작업 방식에 제한이 없는 곡들이니만큼 밴드로서 온갖 시도를 펼쳐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얘기는 사족일 것이다.

<아름다운 강산>은 무려 10분 여의 롱 테이크 버전이다. 처연한 관악 연주가 전주부를 만들어내고 보컬 파트가 등장하지만, 실제 곡의 중추를 이루는 것은 밴드의 연주이다. 사운드는 옛 녹음임에도 꽤 입체적이다. 녹음시 트랙을 많이 사용하지 못했을텐데도, 쟁글대는 기타음과 하이햇 심벌, 베이스 음 등이 뭉치지 않고 여러 층을 이룬다. 원본 LP와 비교할 때, 단순한 인코딩만이 아닌 원작자의 세심한 보정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보컬이 퇴장하는 6분 여부터는 오르간과 오보에, 퍼즈 기타가 전면에 나서 자웅을 겨룬다.‘생전 처음 들어보는 스타일의 싸이키델릭 록’이라 해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음반의 압권은 당연히 23분짜리 대곡 <거짓말이야>이다. 이 곡 역시 시작은 미약하나 끝으로 갈수록 ‘창궐’하는 곡으로, 전면에 나설 주인공은 23분 동안 수시로 교체된다. 2분대 후반부터는 격한 템포와 둔중한 기타가 떠받치는 가운데 김기표의 ‘정신 산란한’ 올갠 솔로가, 이어 뱀 나올 듯한 오보에 연주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가 하면, 신중현의 기타 또한 페달을 밟으며 분주히 움직인다.

베이스와 드럼의 전개 역시 주목할 만한데, 베이스는 곡이 진행될수록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드럼 역시 템포와 연주 방식을 계속 조절해 나간다. 당시 록 음악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이 곡 내에서 다 시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이 러닝 타임 동안의 잼을 하려면 각성을 돕는 보조도구가 필요했을 것인데, 이 곡은 이처럼 약물로 인한 싸이키델릭한 고양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선연하게 드러내는 기록이기도 하다.

마지막 곡은 <안개 속의 여인>이다. 역시 11분 30초의 대곡으로, 지연의 음반 B면에 수록되었던 싸이키 음악이다. 초반부는 시종 기타의 주도 하에 전개되는데, 온갖 구질구질한 사운드는 다 들려준 <거짓말이야>와 달리 클린 톤이 주를 이룬다. 물론 이는 끝까지 안 들었을 때나 하는 얘기고, 5분 30여초까지 비교적 단순한 전개를 보이던 곡은 이후 짤막한 보컬이 등장하며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이어 출몰하는 예의 올갠 솔로가 뒤로 갈수록 구질구질해지며 불안감을 극도로 고조시키는가 하면, 그에 더해 깔끔하던 기타 사운드는 어느새 오버 드라이브가 걸려 오르간과 함께 ‘발광’하기 시작한다. 정신적 불편함, 혹은 정서적 고양이 극에 달할 즈음에서야 서서히 페이드 아웃. 이 생지옥에서 간신히 막 탈출해 놓고도 다시 1번 트랙부터 들으려고 하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엽전들’의 초석이 된 ‘더 멘’은 신중현의 오랜 음악사에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평가된다. 아마 신중현 개인의 음악사뿐만 아니라, 한국 록 음악 전체로 따져 보아도 손에 꼽을 탁월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른 증거도 필요 없이, 이 음반의 단 세 트랙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원 테이크로 23분짜리 대곡을 소화해내는 연주력, 고양되는 감각을 조금씩 층층이 쌓아 나가는 노련함, 어떤 서구 밴드들에게서도 보지 못한 형태의 음악성. 신중현과 더 멘의 이 기록은 ‘한국 록의 잊혀진 역사’에 대한 귀중한 사료이자,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싸이키델릭 록 음악의 진수이다.

다시 한번, 이 세 곡만을 특별히 모아 발매해 주신 신중현 새임께 이 지면을 빌어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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