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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겨레 사회부 기자로 활동중인 김훈 기자(가운데)
현재 한겨레 사회부 기자로 활동중인 김훈 기자(가운데)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깊은 산의 위엄을 길은 멀리 피해서 굽이굽이 돌아간다. 산의 가장 여린 곳만 골라서 뻗어 가는 길이 마침내 거친 산맥을 넘어간다." (본문에서)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은 한 사물을 보아도 정작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본다"고. 어쩌면 현직 신문기자이자 작가인 김훈도 이 말이 가리키는 바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지난 2001년 10월 출간한 소설 <칼의 노래>에서 명장 이순신의 칼이 지닌 '단순성'과 숙명을 읊었던 김훈. 이순신 장군의 칼을 떠나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자신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단순성'의 마력에 빠져들게 된다. 아마도 자신의 그 간결성과 단순성이 결국은 이순신을 찾아내게 되었고, 결국 그 상징으로서 장군의 '칼'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문장이 내뿜는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작품이 하나 있는데, 지난 2000년 8월 1일 초판이 발행된 에세이 <자전거 여행>이 그것이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깔끔한' 문장력을 기본으로 삼아 그의 두발 자전거 '풍륜(風輪)'을 타고 돌아본 우리 산하(山河)와 거기서 살아가는 우리네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에세이는, 이강빈과 강운구의 사진이 김훈의 글 사이사이 섞여 있어 현장감을 더해준다. 그저 현장감만 전해주면 다행일 테지만 기회만 된다면 그 글을 읽은 독자도 어서 빨리 떠나고 싶어할 정도의 충동질을 하고 있으니 야속하기만 할 따름이다.

김훈/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2002
김훈/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2002 ⓒ 권기봉
'풍륜'은 따스한 봄볕 아래 정겹기만 한 흙 냄새를 맡으며 여수 돌산도 바닷가를 달려, 그 옛날 과거보러 한양 갔던 대부분의 유림들이 고배 마시고 넘던 문경새재를 힘겹게 넘고, 가을빛 저무는 태백산맥을 그저 두 바퀴에 의지한 채 넘어간다. 물론 풍륜 옆에는 김훈이 있었다. 언론인이라는 직업에서 비롯된 것인지 사물 하나도 본질에 다가가는 관찰력과 세심한 주의력이 그를 언론인의 길로 이끈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주변의 사소한 사물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듯 하다. 글 속에서 유감없이 드러나는 그의 이런 능력은 밭에 앉아 풀 매는 시골 아낙네와 봄서리가 내린 대지, 안면도의 소나무 숲을 대하고 사색하는 데서 충분히 발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황소 한 마리 앞세우고 밭을 일구는 소백산 의풍 마을 농부를 보고 매맞는 소가 불쌍한지 때리는 인간이 가엾은지 번민하는 그를 보면, 자연과 인간의 운명을 대하는 그의 겸손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 책 한 권을 읽는다고 해서 언론인이자 작가인 김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요, 그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매력에 온전히 빠져들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의 에세이를 읽고 있노라면 온갖 '가든'과 '파크', '이동통신용 안테나'에 밀려 점차 사라져 가는 우리네 주변의 정겨운 풍경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에, 그 하나만으로도 값진 독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한때나마 시골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도시인에게는 그 옛날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밑줄친 구절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히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을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오르막으로 오를 때 기어를 낮추면 다리에 걸리는 힘은 잘게 쪼개져서 분산된다. 자전거는 힘을 집중시켜 힘든 고개를 넘어가지 않고, 힘을 쪼개가면서 힘든 고개를 넘어간다. 집중된 힘을 폭발시켜가면서 고개를 넘지 못하고 분산된 힘을 겨우겨우 잇대어가면서 고개를 넘는다. (pp. 17~18, '프롤로그' 中)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p. 19, '프롤로그' 中)

멀리서 보면 새 둥지처럼 작은 절이고, 절 마당에서 보면 우주처럼 큰 절이다. (p. 28, '꽃피는 해안선' 中 여수 돌산도 향일암에 대해)

해가 뜨기 전, 봄날의 새벽에 밭에 나가보면, 땅속에서 언 물기가 반짝이는 서리가 되어 새싹처럼 땅 위로 돋아나 있다. 이것이 봄서리이다. 흙은 초겨울 서리에 굳어지고 봄서리에 풀린다. 봄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나는 물의 싹이다. (p. 31, '흙의 노래를 들어라' 中)

풀싹들은 헐거워진 봄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흙이 비켜준 자리를 따라서 풀은 올라온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p. 31, '흙의 노래를 들어라' 中)

아마도 이 산은 기어이 올라가야 할 산이 아니라 기대거나 안겨야 할 산인 듯싶다. (p. 41, '지옥 속의 낙원' 中 무등산에 대해)

정자는 현실의 중압이 빠져나간 자유의 공간이다. 정자는 삶과 격절된 자리도 아니고 삶의 한복판도 아니다. 정자는 처자식 출입 금지 구역이지만, 정자에서 놀 때 처자식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서로 말을 알아듣는 남자들끼리 모여서 시를 지으며 좀 노는 곳이다. (p. 43, '지옥 속의 낙원' 中)

대나무로는 무기도 만들고 악기도 만든다. 죽창과 피리가 모두 대나무다. 대나무로는 연장도 만들고 가구도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고 사군자도 친다. 세상을 깨부수고 바꾸려는 사람들은 대나무 숲으로 와서 무기를 구했고, 세상을 버리고 숨으려는 사람들은 대나무 숲으로 돌아와 누웠다. 그래서 대나무 숲은 세상으로 나가는 전진기지이며 세상을 버리고 돌아오는 후방의 쓸쓸한 낙원이다. 대나무 숲은 전투적 이념의 절정이며 은둔의 맨 뒷전인 것이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대나무는 죽순이 나와서 50일 안에 다 자라버린다. 더 이상은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pp. 47~48, '지옥 속의 낙원' 中)

삶은 소설이나 연극과는 많이 다르다.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p. 54, '망월동의 봄' 中)

공깃돌 만한 콩털게와 바늘 끝만한 작은 새우들도 가슴에 갑옷을 입고 있다. 그 애처로운 갑옷은 아무런 적의나 방어 의지도 없이, 다만 본능의 머나먼 흔적처럼 보인다. 그래서 바다의 새들이 부리로 갯벌을 쑤셔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을 때, 그것들의 최후는 죽음이 아니라 보시이다. (p. 62, '만경강에서' 中)

숲은 의사도 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재활병원이고, 사람들은 이 병원의 영원한 환자인 셈이다. (p. 86,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中)

멀고 깊은 숲에 갈 수 없다면, 우리 마을 정발산 숲 속으로 가자. 숲은 마을 숲이 가장 아름답다. 거기서 삶과 인간들을 멀리 밀쳐 내고 키 큰 나무처럼 듬성듬성 우뚝우뚝 서서 숨을 좀 쉬어보자. 정발산에는 키 큰 나무가 많다. (p. 87,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中)

휴일의 서울 북한산이나 관악산은 사람의 산이고 사람의 골짜기다. 봉우리고 능선이고 계곡이고 간에 산 전체가 출근길의 만원 지하철 안과 같다. 평일 아침저녁으로 땅 밑 열차 속에서 비벼지던 몸이 휴일이면 산에서 비벼진다. 휴일의 북한산에서는 사람이 없는 코스를 으뜸으로 치고, 점심 먹을 자리를 찾을 때도 사람 없는 곳을 명당으로 여긴다. 사람들이 다들 저도 사람이면서 한사코 사람 없는 자리를 다투다가, 사람 없다는 코스로 너도나도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니 가엾은 일이다. 이래저래 비벼지게 마련이다. (pp. 87~89,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中)

그(본인 주: 유럽의 등산가 라인홀트 메스너)는 무서워서 울었다. 그의 두려움은 추락이나 실종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외로움이었다. (중략)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p. 90,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中)

퇴계는 도피와 일탈로서의 산행을 나무랐다. 산 속에서 '청학동'을 묻는 자들의 몽환을 퇴계는 꾸짖었다. (중략)
산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 정화된 마음으로 다시 현실을 정화시킬 수 있을 때 산은 아름답다. (중략)
퇴계의 산은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구현되어야 할 조화의 산이다. (p. 91,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中)

시(詩)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p. 105, '찻잔 속의 낙원' 中)

차는 살아있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실존의 국물인 동시에 살 속으로 스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찻잔 속의 자유를 오직 개인의 내면에만 살아 있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요한 스승의 자유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계통을 부여하려는 논리의 허세가 없다. 차는 책과 다르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과장하거나 증폭시키려는 마음의 충동이 없다. 차는 술과도 다르다. 책은 술과 벗을 부르지만 차는 벗을 부르지 않는다.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동다송』). 함께 차를 마셔도 차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pp. 105~106, '찻잔 속의 낙원' 中)

숲은 죽음, 단절, 혹은 패배 같은 종말론적 행태를 알지 못한다. 땅에 쓰러진 자가 일어서려면 반드시 쓰러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처럼, 숲은 재난의 자리를 딛고 기어이 일어선다. 숲은 재난의 자리를 삶의 자리로 바꾸고, 오히려 재난 속에서 삶의 방편을 찾는다. (p. 114, '찻잔 속의 낙원' 中)

그(본인 주: 퇴계 이황)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은 인격의 내면성에 바탕을 둔 것이고, 자연은 탐닉이나 열광, 음풍농월의 대상이기보다는 인간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는 인격적 기능으로써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의 편이었다. (p. 140,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中)

담장은 차단이고, 길은 연결이다. 길은 낮은 흙담을 따라 굽이친다. 차단과 연결이 함께 길을 따라 흐른다. 길은 대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의 모퉁이를 돌아서 대문에 당도한다. 인간의 삶은 감추어져야 하고 또 드러나야 한다. (pp. 142~144,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中)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중략) 아마도 역사 속에서, 진흥왕의 무기와 우륵의 악기는 비긴 것 같다. (p. 154, '무기의 땅, 악기의 바다' 中)

깊은 산의 위엄을 길은 멀리 피해서 굽이굽이 돌아간다. 산의 가장 여린 곳만 골라서 뻗어 가는 길이 마침내 거친 산맥을 넘어간다. (pp. 160~161)

숯불에 갈비 구워먹는 '가든'과 낮이고 밤이고 러브하는 '파크'가 온 국토의 산자수명한 명승 처처에 창궐하였다. 요즘에는 산봉우리마다, 툭 터진 들판마다, 마을 어귀마다 이동통신회사의 기지국 안테나들이 들어섰다. 패사디나 우주선 발사기지의 축소 모형처럼 생겼다.
이제 가든과 파크와 기지국은 이 국토의 가장 압도적인 풍경이다. 어느 마을, 어느 골짜기, 어느 국도연변에서나 이 3자는 단연코 우뚝하고 단연코 두드러진다. 먹고, 마시고, 러브하고, 전화통에 대고 수다 떠는 풍경인 것이다. 하기야 전화통이 있어야 불러모아서 먹을 수도 있고, 불러내서 러브도 할 수 있을 테고, 또 러브 전후에는 잘 먹어두는 것이 좋을 테니까 이 3자는 공존공영 관계다. 속세의 길을 저어 가는 자전거는 이 누린내 나는 인간의 풍경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피해갈 뿐이다. (pp. 162~163, '복된 마을의 매맞는 소' 中)

배운 사람들아, 『정감록』을 웃지 마라. 『자본론』이 무너지고 레닌의 목이 잘려서 세기의 땅바닥에 나뒹군다고 해서 평등의 열망이 소멸된 것이 아니고, 정진인(鄭眞人)이 끝끝내 인간의 세상에 강림하지 않는다 해도 생명을 온전히 간직하려는 인간의 열망은 오히려 새롭다. (p. 164, '복된 마을의 매맞는 소' 中)

봄은 이 산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이 산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봄은 늘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다만 지금은 겨울일 뿐이다. (p. 165, '복된 마을의 매맞는 소' 中)

소포리 노래방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들노래를 할 때 방바닥에 모를 꽂는 시늉을 한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삶의 내용과 정서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의 노래를 노래하지 않았다. (p. 200, '원형의 섬' 中)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펜을 쥔 자들의 엄살이거나 자기 기만이기가 십상이다. 그 말은 정치적이다. 칼을 쥔 자들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文)은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으로서의 무(武)를 동경한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정직하다. (p. 210,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中)

이순신의 적은 우선 일본 군대가 아니라 겁에 질려 도망가는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한다. 그는 죽음 앞에서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달아나는 부하들을 붙잡아놓고 그 대안 없음을 가르쳤다. 이 아수라 속에서 살 길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싸우다 죽든지, 달아나다 죽든지, 군율에 죽든지 죽음의 방식만이 선택의 길이다. 명량은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사지(死地)이다. (p. 214,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中)

그(본인 주: 이순신)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근원이었다. (중략) "장수된 자는 작은 공로만 있어도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p. 219,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中)

그들 갑옷의 본질은 방어이지만, 미학적 외양은 공격이다. 패션은 수세(守勢)의 본질 위에 공세(攻勢)의 외양을 덧씌우는 과정을 따라서 전개되는데, 이 패션의 수공(守攻) 전환은 갑옷의 머리 부분에서 양식적 완성을 보인다. (p. 220,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中)

사인화한 권력은 조직의 기능과 역할에 따라서 권위를 분배하지 않는다. 권위는 최고 권력자에 대한 접근도에 따라서 분배된다. 이 사인화한 권력이 '헛것'의 지배를 가능케 한다. (p. 223,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中)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p. 228, '길들의 표정' 中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서)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넘는다는 일은 삶의 전환과 확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고갯마루는 그 전환의 통과 의례로서 괴기스런 전설과 민담을 빚어낸다. (p. 241,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 中)

문경새재는 여러 변방 오지에 흩어진 인간의 삶이 당대 현실과 관련을 맺으려 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로서 영남대로의 중허리를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p. 241,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 中)

이 옛길에는 지금 '장원급제의 길' 또는 '금의환향의 길' 같은 이름표가 붙어 있다.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갔던 영남 유림들은 대부분 금의환향하지 못했다. (p. 243,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 中)

문경새재 제3관문(조령관)쯤에 이르면, 산맥은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첩첩이 가로막아 서울도 고향도 보이지 않는다. 이 마루턱쯤에 이르러 향촌으로 돌아가는 그 포의의 처사들은, 세상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그 세상 속으로 기어이 뚫고 들어가려는 나 자신은 또 무엇인가, 이 세상의 구조와 질서는 성인의 가르침과 사소한 관련이라도 있는 것인가를 통렬하게 자문자답해야 한다. (p. 244,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 中)

조선 도로의 역사 속에서, 문경새재는 소통되지 않는 현실과 자아 사이의 상처의 표정으로 산맥 속에 걸려 있다. (p. 246,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 中)

가마를 익히는 불길은 열(熱)이 아니라 흐름이다. (p. 253, '가마 속의 고요한 불' 中)

배낭이 무거워야 살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p. 261, '가을빛 속으로의 출발' 中)

강은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지만, 길은 인간의 것이므로 마을에서 마을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모든 길은 그 위를 가는 자가 주인인 것이어서 이 강가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과 친인척과 이웃은 흔히 상류와 하류 사이의 물가 길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늙은 길은 가(街)가 아니고 로(路)도 아니며 삶의 원리로서의 도(道)이다. (p. 281, '시간과 강물' 中)

마암분교 아이들 머리 뒤통수 가마에서는 햇볕 냄새가 난다. 흙향기도 난다. (중략) 이 아이들은 억지로 키우는 아이들이 아니다. 이 아이들은 저절로 자라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나무와 꽃과 계절과 함께, 저절로 큰다. (pp. 287~288, '꽃피는 아이들' 中)

강물이 하구에 퇴적층을 만들듯이 삶은 느리게 겨우겨우 변해갔다. (p. 305, '한강, 흐르지 않는 세월' 中)

강물에 마음이 홀린 사람이 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유(流)이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연(連)이다. 맹자에 나온다. 끝까지 가버린 사람들의 뒷소식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물을 따라간 사람들의 실종 사건은 영구 미제다.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강은 상류와 하류 양쪽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상류의 끝은 시원(始原)이고, 하류의 끝은 소멸이다. 물은 시원에서 소멸 사이를 잇대어가면서 흐른다. 하류의 소멸이 상류의 시원을 이끌어내서, 신생은 소멸 안에 있다. 그러니 흐르는 강가에서 유와 연은 흐르고 싶은 인간의 자기 분열일 뿐, 강물 속에는 다만 진행중인 흐름이 있을 뿐이다. (pp. 310~311, '강물이 살려낸 밤섬' 中)

잠실 구간에서 한강의 표정은 동물원 우리에 갇힌 맹수가 구경 온 사람들을 구경하는 표정과 닮아 있다. (p. 311, '강물이 살려낸 밤섬' 中)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 1948년 서울 출생인 김훈은 현재 한겨레신문 기자로 있다. 쓴 책으로는 독서 에세이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과 <선택과 옹호>, 여행산문집으로 <문학기행 1 · 2>(공저, 한국문원, 1997), <풍경과 상처>(문학동네, 1994), <자전거 여행>(생각의나무, 2000) 등이 있고, 장편소설에 <빗살무늬토기의 추억>(문학동네, 1995) 등이 있다.

#. 이 글의 제목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는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서 따온 것입니다.


자전거여행 1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문학동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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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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