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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달빛 담요> 삽화
<소피의 달빛 담요> 삽화 ⓒ 파란자전거
여기 자기의 모든 것을 담아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첫 담요를 짜는 할머니 거미가 있다. 소피는 다른 집거미들과는 달리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 거미이다. 그러나 소피가 살게 된 비이크맨 씨의 하숙집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소피의 작품을 알아보기는 커녕 그저 거미를 무서워하고 싫어한다. 소피가 비단 거미줄에 황금빛 햇살을 섞어 짜는 커튼도, 옷도, 슬리퍼도 그 사람들에게는 모두 지저분한 거미줄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 덧 할머니 거미가 되어버린 소피, 가난한 엄마의 뜨개질 바구니 안에 자리를 잡는다. 곧 태어날 아기의 털신과 스웨터를 짜는 젊은 엄마는 소피를 보고도 쫓아내지 않는다. 더 이상 털실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엄마. 다락 속에 있는 낡은 담요를 덮을 아기를 생각하며 소피는 달빛으로 담요를 짜기 시작한다.

늙고 약해 빠진 할머니 거미는 아기가 태어날 시간에 맞추느라 먹지도 자지도 않고 담요만 짠다. 밤의 도깨비불, 옛날에 듣던 자장가, 장난스런 눈송이를 넣어서 담요를 짜고 또 짜는 소피. 가난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결국 소피의 가슴도 넣어서 짠 달빛 담요를 덮게 되고, 이 달빛 담요야말로 소피 생애 최고의 작품이 된다.

어린 아이를 위한 그림책인 이 책에 거미를 그릴 때 화가는 '육아 거미(학명 : 피사우리나 미라 Pisaurina mira)'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육아 거미는 먹이를 잡기 위해서 거미줄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아기 거미를 숨기고 보호하기 위해서만 거미줄을 사용하는 거미라고 한다.

소피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를 싫어하고 징그러워 하는데도 자기의 재능을 나눠주려고 마음을 쓰고 애를 쓴다. 거절과 내침의 경험도 소피의 그 마음을 가져가지 못했다. 그래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 거미가 되어서도 소피는 달빛으로 아기의 담요를 짤 수 있었다.

우리들 나날의 생이 거미줄을 만드는 일은 아닐까.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혹은 내 가족을 숨기고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짠 거미줄이 누군가의 손길에 난폭하게 찢겨나가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해도 또 다시 만들어야 하는 삶의 거미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거미줄에 목숨을 건다면 그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생일까.

그렇다면 내 생애 최고의 거미줄 작품은 누구에게 줄 수 있을까. 소피는 처음부터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머리가 하얗게 될 때쯤이나 제대로 나눌 수 있으려나. 얇은 그림책 속의 할머니 거미는 내게 무거운 물음 하나 던져놓고 자기는 달빛 담요 속으로 영영 몸을 감춰버렸다.

'소피의 명작(Sophie's Masterpiece)'이라는 원제를 '소피의 달빛 담요'로 바꾼 번역자의 글솜씨가 참으로 깔끔하다. 책방에 들렀을 때 선 채로 잠시 들춰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 질 책이다. 아이와 함께라면 더 좋겠다. 아이는 문득 마주친 거미줄을 맑은 눈으로 다시 한 번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

(소피의 달빛 담요 Sophie's Masterpiece, 에일린 스피넬리 글, 제인 다이어 그림, 김흥숙 옮김, 파란자전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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