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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아버지 이홍규씨가 10월 31일 오후 6시 30분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7세.

이홍규씨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노골화되던 1930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조선총독부 검찰 서기 겸 통역생, 일제 통치에 대한 부역행위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 미군정청에 의한 전격적 검사 임명, 서울지검 검사 신분으로 한국전쟁 직전 좌익혐의로 구속되었으나 장면의 도움으로 석방, 그후 자유당 정권하의 검찰 내 반이승만·친장면 인사로서 비밀리에 장면 지원, 장면이 정권을 장악하자 행정부 진출….

한편 10월 31일 밤 김대중 대통령은 빈소로 전화를 걸어 이회창 후보에게 조의를 표했다. 사실 가톨릭 신자인 김 대통령과 이홍규씨는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1, 2공화국에서 총리를 지낸 장면이 두 사람의 가톨릭 입교 당시 대부(代父)이자 정치적 후원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홍규씨의 아들 중 한 명이 당선이 가장 유력시되는 대선 후보 중의 한 주인공이 되어 있다.

그의 97년에 이르는 삶의 내력에 한국현대사의 빛과 그림자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셈이다. 지금부터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50년 이홍규 좌익혐의 구속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4회에 걸쳐 소개하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 필자주


'반공검사' 오제도와 이홍규씨

▲ '반공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씨(왼쪽)와 이홍규씨
두 사람에겐 악연(惡緣)이 있다.

오제도씨는 누구인가?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잊혀진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과거 해방정국 당시에는 삼척동자도 인정하는 '반공검사'로 명성을 떨쳤던 사람이다. 좌익 성향이 강한 마을에선 그의 이름만 대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쳤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을 가지고 있는, 한마디로 대한민국 검찰사상 '공안검사의 원조'로 통하는 인물이다.

이홍규씨는 누구인가? 물론 그는 현재 대선정국에서 가장 당선이 유력시되는 정치인 중의 한 명인 이회창 후보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최근 일제시대 당시의 친일부역 행위를 둘러싼 논란으로 곤욕을 치른 바 있는 그는 1950년 당시엔 서울지검 검사로 재직중 동료 검사인 오제도에게 '좌익혐의'로 구속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두 사람의 악연은 현대사의 뒷마당에 그냥 묻힐 뻔했다.

실제로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후보를 전방위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자민련이 발간한 <자민련보>에도 이 문제만은 빠져 있었다. 당시 자민련은 '이회창을 검증한다'는 기획기사를 통해 아들의 병역면제, 부모·본관 변경, 수임료 탈세, 재산비리, 경선자금, 형의 이중국적, 부친의 친일행적 등 일곱 가지 의혹을 제기했는데, '부친의 좌익혐의 구속사건'만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가 자신의 모든 것을 역사와 대중 앞에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는 대선 후보로 5년만에 다시 확정되면서 이 문제는 두꺼운 역사의 지표를 뚫고 지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가의 뒷골목에서 떠돌던 소문, 언론의 추적과 확인, 관련자의 간헐적인 증언과 해명을 통해서 조금씩 아귀를 맞춰 가는, 고난도의 '숨은 그림 찾기'와도 같은 작업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오제도, 이홍규씨 두 사람은 모든 것을 털어놓을 듯 하면서도 결정적 대목에만 이르면 무언가 말못할 사연이 있는지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끝끝내 입을 다물었다.

따라서 이 기사는 현재까지 표면으로 드러난 사실의 조각을 모아서 이어 붙인 '미완성 작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업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 있는 '디딤돌'이 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역사란 누가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겨질 수는 없는 것이며, 결국 진실은 모두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제도와 이홍규씨의 악연은 참으로 질겼다

취재진이 현재까지 확인한 것으로만 보더라도, 두 사람은 1950년, 1960년, 1990년 세 차례에 걸쳐 '역사의 전쟁'을 치른 바 있다. 그것은 곧 체포와 구속, 고문과 석방, 도전과 응전 등으로 점철된 '혈투의 역사'이자 '사상의 전쟁'이었다. 그 와중에서 두 사람의 운명은 현대사의 격랑을 따라 승자와 패자로서 그 위치를 바꿔가며 엎치락뒤치락 했으며, 이승만과 장면 등 현대정치사의 거물들이 상대방에 대한 후견인이나 압박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서설은 끝났다. 이제부터 '현대사 숨은 그림 찾기' 작업에 들어간다. 우선 1950년 당시에 벌어졌던 '제1차 전쟁'(?)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제1차 전쟁과 관련 가장 먼저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이회창 후보다. 그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자.

거칠게 대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대여섯 명의 젊은 남자들이 명륜동 집으로 들이닥쳤다.
"이홍규씨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검찰청 수사과 직원이라고 밝힌 그들은 아버지를 찾았다. 식구들 모두 영문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마침 아버지께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나다" 하셨다.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사관들은 일제히 아버지께 뛰어가더니 두 손에 수갑을 채웠다.

"여보, 이게 웬일이에요?"
"아버지!"
깜짝 놀란 식구들의 외침을 뒤로 하고 아버지는 그렇게 연행되어 가셨다.


이회창 후보가 15대 대선을 8개월 정도 앞둔 1997년 4월 25일 발간한 회고록 <아름다운 원칙>에 등장하는 한 대목이다. 그것은 이 후보가 직접 '아버지의 좌익혐의 구속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회창 후보는 회고록에서 "아버지가 1950년 3월 26일 서울지검 검사 시절 남로당 당원 혐의자를 풀어준 이유로 자택에서 검찰청 수사과 직원 5∼6명에 의해 연행, 구속됐다"고 밝혔다.

이회창 후보는 이 책에서 아버지가 구속된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는데, (1)아버지가 청주지청 검사 시절 상관의 지시를 어기고 충북지사의 비리를 적발해 구속시킨 덕분에 정계와 법조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고 있었으며, (2)서울지검 검사 시절 평소 아버지를 별러 왔던 사람들이 남로당 당원 혐의자를 풀어주었다는 구실을 붙여 구속시켰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검찰은 터무니없는 사상범 혐의를 붙여 일단 구속한 후 직권남용 등의 죄목으로 기소하였다. 구속된 후 두 달만엔가 아버지는 보석으로 풀려나셨다."

그렇다면 이회창 후보가 이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해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회고록이 발간되던 무렵인 1997년 4월의 정치상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을 압박해 신한국당 대표직을 '쟁취'함으로써 다른 대선주자(언론에선 '9룡'으로 지칭)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상태였다.

그러자 코너에 몰린 9룡 중 한 명인 이한동 고문이 이른바 '새 리더십에 대한 사상검증'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 1997년 4월 29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읽어보자.

"신한국당 이한동 고문이 제기한 '새 리더십에 대한 사상검증' 논의가 당내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당내 경선 게임에 새로운 전단이 열리고 있다. 대선 예비주자에 대한 사상검증이 경선의 중요 변수가 될 것이란 전망은 이 고문 뿐 아니라 다른 주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돼 왔었다. 특정 주자 가계의 사상문제와 관련한 설과 함께 "사상문제가 변수로 등장할 것"이란 예상이 은밀히 나돌았다.

…이 고문은 이회창 대표 체제 출범후 여타 주자들과는 이념적으로 뚜렷이 다른 궤적을 그려왔다. 그는 이미 오래 전 자신이 유일한 보수안정 희구층의 대변자임을 자임, 보수세력과 실향민 세력 등을 토대로 경선에 임하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그런 맥락에서 장성 출신 모임인 '한강회' 행사 참석을 시작으로 보수안정 희구세력과의 접촉을 강화해 왔다. 이런 정지작업을 진행하면서 지난 4월 11일 여의도클럽 토론회에 이어 4월 28일 충북대 강연에서 '사상검증의 필요성'을 거듭 제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한동 고문의 사상검증 공세는 누구를 겨냥했던 것일까. 이와 관련, <조선일보>는 "관측통들은 이한동 고문이 이회창 대표에 대한 '날'을 보다 분명히 세우기 위해 사상문제를 거론하고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당시 이회창 대표측은 발빠르게 아버지의 사상문제에 대해 공식 해명했다. 다시 1997년 4월 29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그동안 정치권 물밑에서는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가 '약점'을 갖고 있다는 얘기들이 나돌았었다. 이 대표 부친인 이홍규옹의 사상문제였다. 지난 1950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이옹의 전력과 관련, '이옹이 남로당과 관련이 있었다' '사상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등 그 배경과 전말을 둘러싼 '루머'들이었다.

이 대표측은 4월 28일 이에 대해 공식 자료를 내고 '이 대표의 부친인 이홍규옹은 6·25 직전 현직검사로 재직시 용공 혐의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됐으나, 반공법이 아닌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으며 2개월 뒤에는 검찰의 공소취소로 석방돼 검사로 복직됐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조선일보>는 같은 기사에서 "이홍규옹이 용공혐의를 뒤집어 쓴 것은 상부의 부당한 지시가 있을 때마다 단호히 뿌리쳐 상부의 미움을 받아왔고 특히 당시 대통령의 친구였던 충북도지사의 독직 사실을 밝혀내 구속시킨 데 대한 보복적 조치였다는 게 추후 밝혀졌다"는 이회창 대표측의 주장을 상세히 전하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1997년 4월에 이회창 후보가 언론에 해명한 내용이 자신의 회고록 <아름다운 원칙>에서 증언한 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과 "검찰의 공소 취소로 석방"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해명이 덧붙여져 있음이 확인된다.

물론 이 후보의 이러한 해명과 증언은 아버지 이홍규씨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씨는 그보다 3년 전인 1994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50년 6·25 직전에 구속됐는데 무슨 사건이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변한 바 있다.

"경찰이 남로당원이라며 구속한 사람을 수사해 봤는데 아니기에 풀어줬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남로당과 내통한다는 구실을 붙여 구속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당한 지시가 있을 때마다 단호히 뿌리쳐 상부의 미움을 받아왔고 일부 동료 검사들의 시새움마저 겹친 것이 구속이유였다고 생각됩니다.

동료검사가 나를 구속했는데 끌려가자마자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하라'며 마구잡이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잠 안 재우기까지 4주 동안 고문을 계속 했습니다만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하자 풀어줘 다시 검사를 하게 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회창 후보가 간접 증언한 것과 달리 이홍규씨가 직접 답변한 증언에서 '구속 이유'가 한 가지 더 추가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부 동료 검사들의 시새움마저 겹친 것"을 구속 이유로 덧붙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자신을 구속시킨 사람이 "동료 검사"라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그는 "동료 검사"의 실명은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취재진은 이홍규-이회창씨 부자가 앞에서 주장한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의 증언을 접하게 됐다. 당시 서울지검 검사로 근무하며 이 사건을 곁에서 지켜본 선우종원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선우씨는 당시 오제도, 정희택씨 등과 함께 '3대 반공검사'로 불렸던 인물이다. 선우중호 전 서울대 총장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선우종원씨는 1998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격랑 80년>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선우종원씨의 회고록과 이회창씨 자서전.
장면 박사가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선우 검사를 뵙고자 한국에 나온 건 물론 공적인 일도 일이지만, 부탁이 있어서죠. 선우 검사도 아다시피 이홍규 검사건 때문이오."

이홍규 검사는 전 국무총리로 15대 대선 후보인 이회창씨의 아버지다. 물론 나는 그 이야기를 조금 알고 있었다. 이 검사는 그 바로 얼마 전 빨갱이 혐의로 오제도 검사에 의해 구속되어 있었다.

"이 검사의 친형 이태규 박사가 마침 미국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하루는 그가 뉴욕까지 나를 찾아와 부탁하는 게 아니겠소. 자기 동생이 빨갱이로 몰려 구속되고, 고문까지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자기 집안은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라 절대로 동생은 빨갱이가 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뭔가 오해가 있을 거란 얘기였소. 내가 오늘 선우 검사를 부른 건 바로 이 때문이오. 만일 그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증서야 한다면 내가 서 주겠소. 그러니 한번 부탁하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내게 말했다. 돌아온 나는 곧 오제도 검사에게 장면 박사의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이후 문제는 아주 잘 풀려 이홍규 검사는 풀려났고, 곧 일선에 복귀했다. 그 일 때문인지 모르나, 총리 비서실장으로 간 나는 장면 총리에게 처음부터 신임을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선우종원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오제도 검사에게 빨갱이 혐의로 구속된 이홍규 검사의 형 이태규씨의 부탁을 받은 장면 당시 유엔 대사가 1950년 5월경 국내로 들어와 나를 불러 석방을 청탁했고, 자신이 오제도 검사에게 그 이야기를 전달한 뒤 문제가 잘 풀려 이홍규 검사가 곧바로 석방됐다"고 밝혔다.

우리는 선우종원씨의 증언에서 드러난 '새로운 사실'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1) 선우종원은 이홍규를 구속한 검사의 실명을 '오제도'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2) 선우종원은 이홍규가 석방된 이유를 이홍규-이회창 부자의 해명과 다소 다르게 증언했다. 이씨 부자는 "좌익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됐다"고 증언했으나, 선우종원은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장면(얼마 후 이승만에 의해 국무총리로 발탁됨)의 청탁에 의해서 석방됐다"고 증언한 것이다.

(3) 선우종원은 이홍규가 좌익이 아닌 새로운 근거를 증언했다. 이홍규 집안이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므로 빨갱이일 리가 없다는 이태규의 주장을 소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홍규-이회창 부자와 선우종원씨의 증언이 엇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부터 양측의 증언을 꼼꼼히 점검해 보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각종 자료를 찾아 양측의 증언을 비교하던 취재진은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지난 1997년 당시 이미 오제도씨가 "이홍규를 구속한 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전면 부인하면서 "이홍규 본인이 자신을 구속한 검사를 잘 알텐데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빨리 이름을 밝혀라"고 촉구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당시 오제도씨의 반격을 받고도 이홍규-이회창 부자측은 이홍규씨를 구속한 "동료 검사"의 이름만은 끝끝내 밝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이 문제가 불거지자 이회창 후보측은 "모략을 당했다. 배후 인물도 알고 있다"고만 주장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바로 그 무렵에는 선우종원씨의 증언도 1998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1990년과 1997년 오제도-이홍규 제1, 2차 '설전' 당시에는 "이홍규 검사를 구속한 검사는 오제도가 아니다"라고 했다가, 1998년 회고록에선 다시 "오제도 검사가 이홍규 검사를 구속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제도씨가 이홍규씨에게 "이름을 밝혀라"라고 자신 있게 촉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홍규씨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회창 후보측이 제기한 "배후 인물"은 또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선우종원씨가 상황에 따라 증언을 바꿔가며 오락가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과연 어떤 말못할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다음 기사에서 '이홍규 검사 좌익혐의 구속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계속 풀어보자.

덧붙이는 글 | * 필자는 한겨레문화센터 기자학교 18기와 19기 담임강사를 맡아 신문제작 실습교육을 한 바 있다. 이 기사는 '현대사 자료를 활용한 기사 쓰기' 교육의 일환으로 19기 수강생 중 한 명인 정은성씨와 공동으로 취재한 것을 필자가 다시 정리한 것이다. 이 기사는 주간 <오마이뉴스> 제22호에 연재했던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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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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