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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청, 국세청 등 자동 자격부여 혜택을 상실한 해당 공무원들은 규개위 개혁안이 적용된 각 법률안이 통과되자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사진은 서울 종로2가에 위치한 국세청 건물.
특허청, 국세청 등 자동 자격부여 혜택을 상실한 해당 공무원들은 규개위 개혁안이 적용된 각 법률안이 통과되자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사진은 서울 종로2가에 위치한 국세청 건물. ⓒ 장흥배
매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1만명 안팎의 수험생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발표가 있다. 세무사, 변리사, 관세사, 법무사 등 전문자격증 2차 합격자 발표가 그것.

1차 시험 응시자를 기준으로 하면 매년 10만명 이상의 수험생들이 몰려든다. 수험자들 중에는 직장 포기, 학업 중단, 취업시기 경과 등 가히 인생을 걸고 시험에 매달리는 이들도 상당수다.

이들에게 행정규제개혁위원회(위원장 안문석, 이하 규개위)의 99년 전문자격사 제도 개혁안은 뜨거운 관심사였다. 규개위 개혁안대로라면 일정 경력의 공무원에게 자동으로 자격증을 주는 혜택을 폐지하고, 합격자 인원도 대폭 확대함으로써 수십∼수백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하는 일반수험생들이 받게 될 상대적·절대적 이익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2년 현재 공무원의 자격증 자동부여를 폐지하는 개혁안은 물거품이 됐다. 아예 관심 밖이라는 반응부터 분노와 박탈감에 이르기까지, 규개위 개혁안이 입은 상처가 일반수험생을 통해 나타나는 양태는 다양하다.

자유롭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수험자들의 커뮤니티 사이트는 공무원의 특혜에 대한 분노와 박탈감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러나 공부에 몰두하는 현장 수험생들의 분위기는 분노보다는 체념과 조소가 지배적이다.

서울대입구역 근방의 한 고시학원에서 관세사 시험을 준비하는 김현영(28세) 씨는 "불합리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공무원들처럼 조직되지 않은 수험생들이 집단 행동을 할 수도 없고, 특혜를 받는 공무원들은 처음부터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체념의 미덕을 내보였다.

김 씨는 "주변 수험생들도 공무원 '철밥그릇'이야 그렇다치고 우리 '쪽박'이나 깨지 말았으면 하는 식"이라고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쪽박이란 규개위 개혁안에 대한 공무원 사회의 그간 저항에 비춰 그나마 이뤄진 합격자 확대마저 앞으로 무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비유하는 말이다.

헌법불합치 판결 계기로 공무원 특혜 수십년 지속

규개위가 99년 의결한 <전문자격사 관련 규제개혁 방안>은 일정 경력의 공무원에게 자동으로 자격증을 주는 자격사 제도를 2001년부터 1차 시험 면제로 대체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특허청, 국세청 등 자동자격부여 혜택을 상실한 해당 공무원들은 규개위 개혁안이 적용된 각 법률안에 통과되자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01년 9월 신뢰이익 보호 원칙을 들어 개정 법률안에 대해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규개위가 해당부처와 논의를 통해 2001년 1윌 1일 이전에 재직중인 5급 이상의 공무원에 한해 신뢰보호 원칙을 적용했던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재직 중인 6급 이하의 모든 공무원에게 확대 적용하면서 불거졌다.

세무사·변리사·관세사 3개 자격증제도의 개혁안을 담당했던 규개위 이종엽 사무관은 "6급 이하 공무원이 헌법소원을 다시 제기한다면 동일한 결정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면서 "일반수험생의 합격자 증대라는 개혁 목적을 유지하기 위해 재직 중인 모든 공무원에게 개정법률안 이전의 시험면제 혜택을 돌려주는 방안으로 해당 부처와 최종 협의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종엽 사무관은 "이를 정권 말기 공무원 밥그릇 챙겨주기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규개위의 결정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수용하면서도 개혁목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심사숙고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 판결의 취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시민단체들은 헌재의 신뢰이익 보호가 소원을 제기한 5급 이상 공무원에게만 적용된다는 주장이지만 법률전문가들은 시민단체의 주장에 동의하는 측과 재직 중인 6급 이하 공무원에게도 헌재의 판결이 적용될 여지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장유식 상근변호사는 "헌재의 판결 취지로 보아 6급 이하 공무원의 신뢰이익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 "헌재 판결 자체에도 소수파 의견이 있는 것처럼 판결 취지를 둘러싼 논란의 여지가 커 보인다"고 밝혔다.

규개위가 개혁 성과로 강조하는 합격자 수 증대 역시 일반수험생의 실속과는 거리가 있다. 관세사는 2000∼2002년까지 공무원 출신 합격자 수가 연도순으로 각각 349명, 365명, 182명 이상임에 반해 일반응시자 합격자는 75∼95명 수준이다. 올해는 일반합격자의 수가 지난해보다 줄어들었다.

법무사(법무사 제도는 대법원 주관으로 규개위 개혁안 대상 자격증이 아니다)의 경우 2000년에 대법원이 현직 법원 공무원 2700명 이상에게 무더기로 자격증을 발부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변리사 역시 2000년에는 전년보다 합격자가 줄었고, 2001년 200명에서 올해도 200명 이상일 뿐 합격자 확대를 보장하지는 않고 있다.

변리사는 특히 올해 1차시험 평가에서 도입을 약속했던 절대평가 대신 상대평가를 고수해 수험생이 소송을 제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처럼 법무사, 세무사, 관세사, 변리사 등 전문자격증의 노른자로 불리는 시험에서는 2005년까지 매년 합격자수를 20∼30% 확대한다는 규개위안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개혁안에 불안을 느낀 현직 공무원들이 대거 자격증 취득에 나섬으로써 공무원 출신 합격자가 급격히 증가한 경우도 많다.

이런 지적에 대해 이종엽 사무관은 "관세사의 경우 공무원 출신 합격자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규개위의 개혁안에 따라 불안을 느낀 관세청 현직 공무원들이 대거 자격증 신청에 나섰기 때문이고, 법무사는 규개위 개혁안 대상 자격증이 아니다"고 답했다.

특정 분야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인정해 일정 경력의 공무원에게 자격증을 주는 제도는 일본을 비롯해 미국, 독일 등 해외 일부 국가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는 지적이다.

독일에서 7년 동안 법학을 공부했던 박기범(37세) 씨는 "우리나라의 전문자격증에 해당하는 분야에서 독일의 공무원 우대는 세무사, 변리사 등 일부에 한정돼 있고, 인구수 대비 전문자격사의 수도 우리나라의 2∼5배에 달해 자격증 부여 자체가 특혜라는 인식이 약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헌재 판결 이후 2001년 1월1일 직전에 재직중인 모든 해당 공무원의 전문자격증 특혜를 부활시킨 각 법률안은 국회의 해당 상임위를 거쳐 현재 법사위 통과를 앞두고 있다. 공무원의 통상적인 근속연수를 감안하면 전문자격증 시험에 있어 앞으로 20∼30년 동안 해당 부처 공무원의 특혜가 유지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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