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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서현의 우리도시기행/효형출판/1999
서현/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서현의 우리도시기행/효형출판/1999 ⓒ yes24
"전국적 규모의 폭력집단이 창궐하고 있다. 이 집단은 기존의 조직폭력배와 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우두머리가 없다. 조직책도 영업부장도 없다. 조직원 모두가 행동대원인 게릴라 집단이다. 기존의 조직폭력배가 서울 강남의 룸살롱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데 비해 이들은 주로 강남의 보도(步道)를 배경으로 활동한다. 최근에는 전국으로 활동무대를 넓혔다. 이들은 생선회칼이 아닌 자동차를 휘두른다. 이 집단의 이름은 '보도주차파(步道駐車派)'라고나 할까." (본문에서)

정말 우리나라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나라일까? 어릴 적부터 우리나라는 금수강산 푸르른 살기 좋은 나라라고 배워왔는데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지? 이 책의 지은이 서현은 이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처음부터 부인하고 있다. 지은이가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여러 도시를 돌아보고 쓴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위와 같은 말은 일종의 신비주의를 부추기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다.

그래, 한번 나가보자. 저 멀리 설악산이나 오대산으로 갈 필요까지는 없다. 일단 우리가 생활하는 주변 거리가 먼저일 테니 말이다. 집밖으로 나서자마자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가 앞을 막아선다. 어디 그 뿐이랴. 도로를 점령한 것도 모자라 '개구리 주차'랍시고 인도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자동차의 시대요, 자동차 공화국이다. 그래 좋다. 이왕 나온 것 더 걷자. 두 다리 튼튼한 사람들만 바깥 나들이 다니라고 지하도에 육교가 천지다. 여기서도 어디까지나 차의 이동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듯한 강박관념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도로만 보지 말고 도로 반대쪽, 이를테면 건물들이 죽 늘어선 곳도 한번 보자. 찾고자 하는 가게를 찾으려면 곰곰이 살펴봐야만 하는 상가들. 간판이 한 건물에도 예닐곱개가 기본이니 상점 찾는 일이 쉬울 까닭이 없다. 게다가 그 화려하고 큼지막한 간판도 모자라 인도에까지 진출한 광고 패널들이 앞을 막아선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우리 생활 주변의 이런 모습들만 대충 살펴보아도 '사람'답게 살기 좋은 곳은 아닌 것만 같다.

멀리 가 보아도 별반 다를 바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권력과 금력에 휘둘린 나머지 '뚜버기' 시민은 온데간데 없어진 나라 제1의 길 세종로, 그늘진 시대의 부끄러움과 함께 하는 청계천, 대학의 젊음과 지성은 사라지고 국적 불명의 땅이 되어 버린 대학로, 나라 잃은 상처의 흔적 이태원길….

지은이는 이런 서울 지역뿐만 아니라 서러운 역사와 함께 하는 도시 군산이나 '남의 항구'였던 부산 광복동 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각지에 흩어져 있는 거리의 어두운 모습을 건축가의 눈으로 속속들이 조망하고 있다.

'APO AP 96205'

지은이는 이 거리에서 안타까워하고 있고 분노하고 있다. '불도저 시장'이 재임하던 1966년, 세종문화회관 앞과 한국은행 본점 앞 등에 생긴 지하보도 등 사람을 밀어내고 차가 점령해버린 '세계적인 도시' 서울, 한 건물에 족히 예닐곱개의 간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상가 건물의 천박함, 아픈 현실을 감추기라도 하듯 시멘트로 덮어버려 생명을 끊어버린 청계천, 우편물에 'APO AP 96205'라고 써야만 배달이 된다는 용산 미군기지, 만들 때 잘 만들지 '사족'을 달기 위해 애쓰다 헬기마저 떨어뜨린 올림픽대교…. 상식이 통하지 않던 시대에 만들어진 양식 없는 건물과 거리에 대해 지은이는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이 아직도 도시를 더럽히거든 그 이름에 침을 뱉어라"

그러나 우리 거리에 대해 희망을 버리고 싶진 않다. 지은이 말대로 턱시도와 산소통, 징, 김밥, 족보가 모두 통(通)하는 거리 종로에서 발견되는 서울의, 한국의 거리는 역동성을 갖는다. 작은 변화에 다름 아닐 지 모르지만 안국동 참여연대 앞 육교도 올해 들어 사라지고 누구든지 파란불만 들어오면 건널 수 있는 횡단보고가 그어졌고, 장애자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보도의 턱을 낮추어야 한다는 공감도 서서히 높아져 가고 있다.

아직은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다. 하지만 서현과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는 건축가들이 있고, 이런 인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져 가는 날, 우리도 언젠가 '걷고 싶은 거리'를 가질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특히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청계천 복구. 어쩌면 이 작지만 큰 인식의 변화가 우리의 거리를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복구가 완전히 끝나는 날이 아무리 먼 훗날의 이야기라 할 지라도 희망을 버리고 싶진 않다. 이제는 '이 거리를 더럽히는 건축물들이 있거든 그 앞에 침을 뱉으련다.'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서현의 우리도시기행

서현 지음, 효형출판(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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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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