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송판의 한 대로변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마오니우( 牛·yak) 사진촬영을 하는 장사치.
송판의 한 대로변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마오니우( 牛·yak) 사진촬영을 하는 장사치. ⓒ 모종혁
잠시 가졌던 촨주스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과 두 티베트인 할머니와의 해프닝을 마음속에서 지우고 촨주스와 작별을 고했다. 지우자이꺼우로 가는 버스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계를 보니 아직 30분의 여유가 있어, 주변에서 간단히 점심요기를 할 곳을 찾았다. 마침 정거장 옆으로 회족(回族)이 운영하는 칭전(淸眞·이슬람교)식당이 눈이 띄어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에게 가장 빨리 나올 수 있는 음식을 물어보니, 란저우라미엔(蘭州拉麵)을 추천했다.

잠시동안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회족인들이 이 티베트인 거주지역에 온 사연이 궁금해 주인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송판에 원래 회족사람들이 살았나요?"
"아니죠. 이 지역에 거주하는 회족인들은 대부분 간쑤(甘肅)성에서 넘어왔답니다."

친절히 알려주는 식당 주인은 먹고 살 곳을 찾아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다고 대답했다. 주인장과 이런저런 나누는 가운데 손으로 직접 쳐서 만든 면발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갖은 재료가 들어간 라미엔이 나왔다. 금새라도 올 것 같은 차편 생각에 한편으로 음식을 급히 먹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면 주인장께서도 간쑤에서 오셨나요?"
"그렇죠. 90년대 초반 고향인 허쭈오(合作)를 떠나 여기로 왔지요"라며 물고 있던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 식당주인. 그는 송판뿐만 아니라 지우자이꺼우 일대에도 회족인들이 적지 않다고 전해줬다.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 주인의 물음에 시안(西安)에서 왔다고 말하고 한국인이라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중국 표준어가 부정확한 쓰촨 사람들이나 티베트인과 오랫동안 함께 살아서인지 주인도 필자의 서툰 중국어에 그리 괘념치 않는 눈치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식사를 다 마친 뒤 여행 잘 하라는 주인의 따뜻한 배웅을 뒤로했다.

무분별한 개발보다 보존이 우선

송판의 한 약재점에서 티베트인 주인과 함께 한 필자의 어머니.
송판의 한 약재점에서 티베트인 주인과 함께 한 필자의 어머니. ⓒ 모종혁
오후 1시 20분이 가까웠을 때 송판을 출발한 버스가 촨주스 정거장에 들어왔다. 배낭을 짊어지고 버스에 올라탄 필자는 먼저 앉을 자리부터 찾았다. 촨주스에서 지우자이꺼우까지는 4시간이 넘게 걸릴 터이므로 서서 갈 것이 걱정됐다. 다행히도 뒷자리에 빈 좌석이 보여 바람처럼 달려가 앉았다. 다가와 어디까지 가는지 묻는 버스 차장에게 지우자이꺼우까지 간다고 전해주니, 10위안을 내라고 했다. 돈을 전해주며 몇 시간후면 도착할 수 있나 물어보니, 차장은 지나가는 말투로 4시간이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늦어도 저녁 6시까지는 지우자이꺼우에 도착할 수 있겠구나.' 마음속으로 대략 도착할 시간과 도착 후 일정을 머리 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이런 필자를 일깨우듯 차창 밖으로 키 작은 풀들이 펼쳐진 드넓은 송판평야가 시야에 들어왔다.

최근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비경인 지우자이꺼우·황롱 일대를 구경하려는 관광객이 늘어나자, 쓰촨성 인민정부는 기존 난핑(南坪)비행장 외에 새 공항을 신축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대상지로 떠오른 것이 바로 송판평야로, 교통이 편리하고 넓은 평지를 갖추고 있는 점이 매력포인트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평야는 공항의 입지조건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허나 비행장이 티베트인 거주지역인 송판 한복판에 세워졌을 때 나타날 사회적 부작용과 자연훼손이 걱정됐다. 인간의 편안함을 위해 문명 이기를 무분별하게 오지에까지 세우는 것보다는, 신이 선물한 절경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는 노력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환경보존보다 돈벌이를 위한 개발을 우선시하는 중국 지방정부의 계획이 실로 우려스러웠다.

햇살도 비치기 힘든 원시림을 지나다

송판평야에서 지우자이꺼우로 가는 도로 변의 한 티베트인 촌락.
송판평야에서 지우자이꺼우로 가는 도로 변의 한 티베트인 촌락. ⓒ 모종혁
방금까지도 햇살이 내리쬐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만년설이 뒤덮인 고산에만 살짝 햇볕이 보일 뿐 고산의 변화무쌍한 기후변화가 감탄스러웠다. '비가 와서는 안 되는데…' 걱정하는 필자를 위로하듯 버스는 힘차게 평야를 내달렸다. 두 시간 가까이 달렸을까, 어느덧 평야는 온데간데없고 산마루에 도달한 듯 했다. 해발 3400∼3500m 족히 될 경사가 평탄한 평야의 끝에 닿은 버스는 뒤이어 아랫길로 내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무라곤 볼 수 없는 고산평야지대였건만, 돌연 비탈길 주변으로 원시림이 에워쌌다.

제대로 포장이 안 된 도로로 인해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창 밖을 가로막는 아름드리 나무숲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연륜이 몇 백년은 족히 된 듯해 보이는 갖가지 형태의 나무들, 푸르르 날개 짓을 하면 천공으로 날아오르는 이름 모를 새들, 도로포장을 위해 곳곳에서 손놀림이 바쁜 민공들…. 모든 것이 평야지대와는 딴판이었다.

구름에 모습을 숨긴 햇살도 이처럼 우거진 원시림을 뚫고 위용을 자랑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무숲은 끝도 없었다. 한 반시간동안 원시림군을 달린 버스는 그제야 시야가 트였다.

간간이 눈에 띄는 산간마을 집 굴뚝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 약간 쌀쌀함을 느끼는 필자를 위로해 주었다.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들과 길게 이어진 개천, 작은 보리·밀 경작지들이 지우자이꺼우가 얼마 멀지 않음을 알려주는 듯 정겨웠다. 그렇게 달리길 4시간여, 산골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등장했다. 울긋불긋 갖가지 모습을 띤 호텔들이었다. 이미 완공되거나 한창 터를 다지거나 마무리공사가 한창인 호텔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때마침 터지는 차장의 외침.

"지우자이꺼우에 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실 분 준비하세요!"

시간은 어느덧 저녁이 다 된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국 서부대개발의 중심지역 대쓰촨권

1999년 6월 17일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열린 '서북5개성 국유기업 개혁과 발전 좌담회'에서 중국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은 회의와 별도로 이례적인 발언을 하여 주목을 끌었다. 장 주석은 "새로운 천년이 도래하고 한 세기가 바뀌는 중대한 시점에서 명확한 새 목표를 중국공산당과 전국 인민들에게 내보여야 한다"면서 "낙후된 중·서부지역 개발을 위해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지역개발을 위한 만발의 준비에 총력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보통 베이징에서 열리던 관례를 깨고 서북부지역의 중심도시 시안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장 주석은 내륙지역 개발의 필요성을 강력히 거론하는 한편, 이것이 앞으로 중국 공산당과 정부가 우선순위에 두고 추진해야 할 최대 현안임을 천명하여 주목을 끌었다. 장 주석의 발언이 있은 지 6개월 뒤인 2000년 1월 16일, 중국정부는 국무원령 3호로 '중앙과 각 부서의 서부대개발에 관한 중요결정'을 반포했다.

이 행정령에서 중국정부는 주롱지(朱鎔基) 국무원 총리를 조장으로 하여 전 행정부서의 장관들과 지방인민정부 지도자들이 이 참여하는 개발지도소조의 구성을 명시하면서, 서부지역 개발을 위한 구체적인 마스터플랜까지 제시했다. 행정령의 내용에는 국가 차원에서의 전방위적 개발의지를 대내외에 밝히고, 중장기적인 포석을 위한 개발인력의 배양 및 효율적인 재배치를 명시하였다. 이는 중국정부가 서부지역 개발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뒤 2년여가 지난 지금 내륙직할시 충칭을 비롯한 서부지역의 6개 성(산시, 간쑤, 칭하이, 쓰촨, 구이저우, 윈난)과 4개 소수민족자치구(신장, 티베트, 광시, 닝시아)는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인프라 건설공사로 지역의 변모를 하루가 다르게 일신하고 있다. 이 서부지역 11개 성 중 가장 인구가 많고 인프라시설이 비교적 잘 되어 있으며, 상당 수준의 공업화를 이룬 쓰촨성이 여러 면에서 중요시되고 있고 있다.

쓰촨은 중국 서남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창장(長江) 상류를 끼고 있다. 동쪽으로 충칭시, 서쪽으로 티베트, 남쪽으로 윈난(雲南)성과 꾸이저우(貴州)성, 북쪽으로 칭하이(靑海)성, 간쑤(甘肅)성, 산시성 등 7개 성시와 인접하고 있는 쓰촨은 총면적이 568천㎢로 중국 전체의 5.9%에 달한다. 아열대 계절풍기후대에 속하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서 쓰촨의 연평균 기온은 16~18℃으로 겨울에는 온난하고 여름에는 무더운 기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97년 충칭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어 나가기 이전까지 쓰촨지역의 인구는 1억1천3백만 명으로 중국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사는 성이었다. 비록 올해 와서는 8천만명이 조금 넘는 인구로 전체 순위가 3번째로 내려앉았지만, 성의 행정소재지인 청뚜(成都)에만 1천2백만에 달하는 주민들이 거주할 정도로 내륙최대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쓰촨이다. 직할시 승격이후에도 쓰촨과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충칭을 더한다면 대쓰촨권(大四川圈) 시장은 외국의 내로라 하는 기업이 무시하지 못할 거대시장이기도 하다.

거대한 인구, 비옥한 토지, 풍부한 천연자원 및 창장 상류라는 지리적 이점을 반증하듯, 대쓰촨권은 중국 서남지역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대쓰촨권에는 전통적인 산업인 농업과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한 야금 화학 우주항공 기계 등의 공업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다. 또한 방대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생필품 생산기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고 내륙지역의 각종 물산집산지로써 상업을 비롯한 서비스업도 발달하였다. 다른 서부 성시와 달리 있어 1·2·3차 산업이 비교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쓰촨권 시장이 대규모 인구의 내수를 기반으로 하는 자급자족적 경제구조를 구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구과다로 인하여 99년 현재 충칭과 쓰촨의 1인당 GDP는 각각 587, 527미달러로, 전국평균인 861달러에도 훨씬 못 미치고 있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은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0년대 이후 연평균 약 11% 증가하여, 지난 99년 대쓰촨권의 GDP는 5199억 위안(전국의 6%)로 연해지역인 장쑤(江蘇)성 산동(山東)성 광둥(廣東)성에 이은 전국 4위이다.

대쓰촨권이 오늘날과 같은 경제실력을 쌓은 것은 지난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53년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했던 중국은 소련식 공업화 모델을 채택하여 중공업을 위주로 한 발전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기간동안 소련으로부터 지원 받은 프로젝트는 모두 156개에 달하였는데, 그 가운데 1/3이상을 서부에 배정하는 각 지역마다 고른 발전에 기하였다. 건국이래 순조로운 경제성장을 구가했던 중국에 재앙이나 다름없는 운동이 벌어졌으니, 주역은 공산당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동(毛澤東)이었다. 그는 1958년 5월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절약하자"라는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제시하며, 전 중국인민에게 이른바 '대약진(大躍進)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신의 계시나 다름없었던 마오의 요구는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 잡는다"라는 허황된 구호로 포장되면서 중국의 노동자와 농민들을 밤낮 없이 강철 제련에 몰아넣었다. 60년까지 생업과 관계없는 철강 생산에 모든 정력을 쏟아 부었던 농민들은 때마침 닥친 대한파에 수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어죽는 참상을 겪게 된다.

1960년대 들어 급변했던 국제정세는 중국 서부지역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64년 5월 언제라도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핵무기 공격이 있을 것이라 주장했던 마오쩌동은 내륙 후방에 전략적 전선건설을 제창하면 3선(三線) 건설을 추진했다. 즉 중국을 지역에 따라 1, 2, 3선으로 나누고 연해(1선)와 중부(2선)에 있는 모든 군수기업을 서부(3선)지역으로 옮기는 대역사를 벌인 것이다. 또한 당시 당면한 최대과제였던 취약한 교통망의 확충을 위해 군을 대규모로 동원, 철로 건설에 매진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국유기업으로 이름을 떨치는 창홍(長虹)전자나 창안(長安)자동차, 지아링(嘉陵)오토바이 등을 비롯하여, 42개의 연구소와 297개의 군수공장이 모두 이 시기에 창립된 것이다. 청두-충칭-꾸이양(貴陽) 삼각지대를 중심으로 64~80년까지 17년간 계속 되었던 3선 건설은 대쓰촨권 건설에 있어 커다란 전환기를 가져다 준 정책이었다.

어려운 3선 건설작업 끝에 1975년에 공업총생산량 비중은 중국 전체의 25%까지 올라갔던 서부지역은 78년부터 시작된 경제개혁·대외개방에서는 철저히 소외당했다. 연안에 위치한 성시들이 경제특구 혹은 경제개발구를 만들어 외국의 자본을 끌어들인 뒤 눈부신 경제 발전과 대외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서부는 과거에서의 정체만을 거듭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6,70년대 3선 건설시 국방에의 요구에 따라 지어졌던 국영군수기업들의 존재는 서부지역의 발목을 잡았고,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적극적인 대외개방을 꺼리었다. 또한 내륙 깊숙이 위치한 서부지역은 교통이 불편하고 물류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탓에 외국자본을 유치할 만한 투자 메리트가 적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연해와 서부지역간의 경제적 격차는 갈수록 늘어나 90년대 초반에 와서는 그 차이를 메울 수 없을 지경에 다다른다. 이를 보여주듯, 92년 서부지역에 투입된 중앙정부 차원의 투자는 단 16%(서북부 8.1%, 서남부 7.9%)으로 공산 건국이래 가장 낮은 수치였다.

'커부롱후안'(刻不容緩·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이라고 외치며, 서부대개발을 추진하는 중국정부의 정책결정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지금도 서부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잊어버린 시간'으로 불리는 지난 20년의 정체된 발전은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을 타지로 내몰리게 했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부터 가난한 내륙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등진 채 연안도시로 몰려들었던 '민공차오'(民工潮)와 '리우왕'(流亡)이라는 사회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4,5년 이전까지 지역간 커져가는 경제적 격차와 서부의 낙후성으로 인한 해당 주민들의 심리적 박탈감은 이미 중국에게 국가존립의 위기까지 몰고 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한다면 중국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에 지금 중국정부가 추진하는 서부대개발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추진의지가 엿보인다. 허나 중앙정부 주도하에 추진되었던 3선 건설이 선진화된 기술과 수준 높고 의욕에 찬 연구인력 및 노동자를 투입했음에도, 현지의 경제상황을 도외시하여 무리한 투자로 근본적인 한계를 노출시켰던 아픈 과거가 지니고 있다. 따라서 50년을 내다보고 벌이는 인프라 건설 위주의 서부지역 개발이 향후 나타날 무수한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추진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 정리- 모종혁 기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