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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관(鎭江關)에 있는 고대 치앙족이 만든 석탑인 띠아오러우( 樓). 띠아오러우는 관상과 방어를 겸한 망루로, 치앙족은 마을 어귀에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십이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석조물을 만들었다.
전장관(鎭江關)에 있는 고대 치앙족이 만든 석탑인 띠아오러우( 樓). 띠아오러우는 관상과 방어를 겸한 망루로, 치앙족은 마을 어귀에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십이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석조물을 만들었다. ⓒ 모종혁
문명의 이기주의에 때묻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가다보니 버스는 어느덧 마오시엔에 도착했다. 마오시엔은 중국에서도 호전적인 소수민족으로 유명한 치앙(羌)족이 몰려 사는 현단위 소재지이다.

한족과는 달리 동그란 얼굴형에 얇은 눈매를 지닌 치앙족은 쓰촨성 아빠(阿土+貝) 치앙·티베트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20만명이 넘는 인구가 흩어져 살고 있다. 예로부터 티베트족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치앙족은 티베트어계의 언어(羌語)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문자를 창달하지 못했다.

문자 없는 민족이 독자적인 자기문화를 유지하기 힘들 듯 치앙족 또한 생활문화는 한족에 동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라마불교를 믿는 신앙심과 호승심(好勝心)을 기르는 갖가지 민속활동을 통해 나름대로의 문화전통을 보존하려 애쓰고 있다.

해발 1200m 고지대에 위치한 마오시엔의 회색빛 도시풍경은 왠지 을씨년스러웠다. 독특한 생김새의 사람들 이외에 눈에 띄는 티베트어 간판이 치앙족 도시에 닿았음을 알려줄 뿐, 다른 한족 산골도시보다 더 가난한 모습은 치앙족의 용맹스러웠던 역사를 기억하는 필자에게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그 옛날 남북조시기 용맹했던 다섯 소수민족 중 하나로,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던 치앙족이 왜 이리 초라해졌을까. 마오시엔을 떠나면서 잠시 상념에 잠긴 필자의 눈앞에 칼로 내리깎은 듯한 계곡이 펼쳐졌다.

비포장도로 위에서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와 계곡, 그 사이를 흐르는 강물. 고통스러운 버스 여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지금은 청뚜에서 지우자이꺼우까지의 도로가 모두 포장되어 있다).

4~5km를 걸어서 학교 가는 어린이들

마오시엔(茂縣)의 한 치앙족 농가에 설치된 위성 TV안테나. 중국 오지의 산골마을에도 문명의 이기는 어김없이 침투해 있다.
마오시엔(茂縣)의 한 치앙족 농가에 설치된 위성 TV안테나. 중국 오지의 산골마을에도 문명의 이기는 어김없이 침투해 있다. ⓒ 모종혁
그렇지 않아도 딱딱한 나무의자에 반나절을 앉았던 터라 피로가 몰려왔는데, 길마저 좋지 않아 몸은 더욱 고달펐다. 끊임없이 몸을 뒤척이는 필자와 달리 주변 승객들은 습관이 된 듯 곤하게 잠을 자거나 주위 사람과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버스 창 밖으로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운 자태와 계곡 중턱에 듬성듬성 자리잡은 치앙족의 특이한 산채가 필자의 눈을 위로해주었기 망정이지,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몇몇 정거장에 가끔씩 내려 주변 풍경도 둘러보고 볼 일도 보았건만, 몸을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버스의 좁은 좌석공간은 정말이지 원망스럽기만 했다.

헌데 이런 필자의 행복에 겨운 불평을 탓하는 듯, 도로변에는 수업을 마친 산골 아이들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학교로 보이는 건물에서 4~5㎞쯤 떨어진 거리까지 걸어가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저렇게 힘들게 통학하면서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난 이게 뭔가…' 심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배움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중국의 밝은 미래를 본 것은 나만의 단견일까?

마오시엔(茂縣)을 지난 버스는 점점 가파른 산지로 올라갔다. 전장관(鎭江關)에 이르자, 한 700m 정도 높다란 산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저 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고물버스는 거북걸음을 하면서도 반시간만에 간신히 올라섰다.

여기서부터는 해발 2200m이상 고산지대였다. 한라산보다 더 높은 지대를 올랐건만, 버스는 종착점에 닿은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강을 낀 고산지대의 도로를 달리는 버스 밖으로 눈에 띄는 원시의 티베트인 마을들, 고산지대의 환경 때문에 서식하는 1m미만의 키 작은 나무만이 끝없이 펼쳐졌다.

사위가 점점 어둠으로 깔리면서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이거 오늘 안에 도착하긴 하나' 불안한 필자를 위로하듯 버스는 얼마 가질 않아 한 작은 도시로 들어섰다. 해발 500m인 대도시 청뚜에서 13시간을 달려 2800m의 고산도시 송판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다.

잊혀지는 치앙족의 제산회

2000년 7월 7일 쓰촨 아빠(阿 )치앙·티베트족자치주 마오시엔(茂縣)에는 잔잔한 고산의 공기를 깨고 수많은 인파로 북적댔다. 울긋불긋 형형색색의 전통민속복장을 걸쳐 입은 남녀노소 치앙족들로부터 먼 길을 달려온 쓰촨성 정부관리, 언론매체 보도진까지, 평소 조용했던 산골마을 마오시엔은 여느 때와 달리 분주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길레 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렸을까? 이 날은 다름아닌 제1회 '중국치앙족전산회'(中國古羌轉山會)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전산회는 제산회(祭山會)라고도 불리는데, 해마다 음력 6월6일 열리는 치앙족 최대의 민속행사로 이미 200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한 해 농가의 번성과 오곡작물의 풍요, 지역의 태평함을 기원하는 제산회는 보통 120가정으로 구성되는 치앙족의 마을공동체 자이즈(寨子)에서 산발적으로 치러졌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골과 험난한 협곡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치앙족에게 제산회는 이렇듯 단순한 마을단위의 축제로만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올해는 마오시엔 현정부가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한 달 동안의 준비기간과 각 자이즈에서 뽑은 인원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생존하고 있는 치앙족은 20만명이 조금 넘는다. 이들의 주요 거주지역은 쓰촨성 아빠자치주와 구이저우(貴州)성으로, 아빠자치주에만 13만명이 살고 있다. 지금은 중국 전체 13억 인구 속에서 티끌과 같은 존재로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지만, 그들은 한때 중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용맹스런 부족이었다.

치앙족이 중국역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던 것은 바로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 3세기말 위·촉·오 삼국을 통일했던 진왕조는 왕족간 권력다툼과 지방호족의 등장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자신들에 대한 강압정책과 가난한 한족 유민들의 대규모 유입으로 생존을 위협받은 다섯 소수민족, 선비·흉노·저·갈 그리고 치앙족은 부패한 진에 대항하여 기병했다. 몽골·돌궐어 계통과 티베트어 계통이었던 다섯 소수민족 중 인구가 가장 적었던 치앙족은 쓰촨의 고립된 지리적 조건을 이용, 304년 지금의 청뚜에 대성(大成)을 건국했다.

동진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43년 동안 쓰촨성 일대를 지배했던 대성의 역사는, 치앙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했던 소중한 경험으로 아직도 그들 가슴속에 큰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중국에서는 이 위진남북조시대를 '오호난화'(五胡亂華)라고도 칭하는데, 글자 그대로 다섯 오랑캐 민족이 중국에서 난리를 피웠다는 뜻이다. 여기에 "야만적인 폭군이 속출한 무질서한 난세"라고 평가절하하면서 노골적인 중화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한족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나라 또한 '5호16국시대'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16국이란 역사가 최홍(崔鴻)이 지은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한 것인데, 실제로 건국된 나라는 훨씬 더 많았다) 대성의 멸망 이후 청대 말기까지 화중지방과 연해지방에서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한족의 이주로 인해 산간벽지로 쫓겨난 치앙족은, 오늘날에는 민족정체성을 위협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수천 년간 한족이나 티베인들과 접촉하면서 이름이나 외양, 사고방식 등은 그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졌고, 대다수 젊은이들은 한족의 생활습관과 문화양식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번 제산회 행사를 주관한 마오시엔도 다를 바 없어, 전체 10만인구 중 90%가 치앙족으로 분류되나 순수혈통을 보존하고 있는 이는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민족 존립의 기로에 놓인 치앙족이지만, 그들의 공동체적 의식을 함양하는 행사인 제산회는 지난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를 제외하고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마다 제산회가 다가올 즈음이면 모든 마을에 준비모임이 결성된다. 마을 전체 주민이 참가하는 이 모임에는 모든 집마다 남자 한 명이 나서는데, 만약 집안에 변을 당했거나 임산부가 있을 경우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제산회를 주재하는 무당은 준비모임을 진행하면서 그 해 제산회의 주제와 형식을 정하고, 행사 당일 참여자들이 맡을 역할을 안배한다. 12세 이상으로 제산회에 처음 참가하는 남성은 먼저 향과 칼날, 술, 만두 등의 제물을 들고 나와 신에게 바친다. 음력 6월6일 제산제 당일이 되면, 마을주민 모두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제산회가 열리는 마당에 모여든다. 머리에 원숭이가죽 모자를 쓰고 양피로 만든 북을 든 무당이 장정들과 함께 제산회장으로 입장하면서 행사는 시작된다.

해마다 제산회가 다가올 쯤이면 모든 마을에 준비모임이 결성된다. 마을 전체 주민이 참가하는 이 모임에는 매 가호마다 남자 한 명이 나서는데, 만약 집안에 변을 당했거나 임산부가 있을 경우에는 참여를 하지 못한다. 제산회를 주재하는 무당은 준비모임을 진행하면서 그 해 제산회의 주제와 형식을 정하고, 행사 당일 참여자들이 맞을 역할을 안배한다. 만약 12세 이상으로 제산회에 처음 참가하는 남성은 먼저 향과 칼날, 술, 만두 등의 제물을 들고 나와 신에게 바치게 한다. 음력 6월 6일 제산제 당일이 되면, 마을 주민 모두는 새옷으로 모두 갈아입고 제산회가 열리는 당에 모여든다. 아침 머리에 원숭이가죽 모자를 쓰고 양피로 만든 북을 든 무당이 장정들과 함께 제산회장으로 입장하면서 행사는 시작된다.

무당은 먼저 각 가정에서 바친 제물을 제단에 놓으면서 신을 불러들인다. 그 후 천지개벽과 산신을 찬송하는 시가를 읊으면서 신을 맞이한다. 다시 한편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깊이 사죄하는 시가를 부르는 무당은 다른 한편으론 파란 예단으로 양의 온 몸을 만진다. 노래가 끝날 쯤 되어서 무당은 끊인 물은 제물로 준비한 양과 닭의 몸에 3번씩 뿌린다. 이 때 온 마을 주민들은 큰 소리로 "신이여, 우리의 제물을 받아주소서"라고 외치는데, 그와 동시에 마을 장정은 처음 제산회에 참가한 사람이 준비한 칼로 양과 닭을 죽이게 된다. 죽인 양과 닭의 고기는 현장에서 바로 삶아 무당이 직접 매 가정에게 나누어주는데, 이 때 술 한잔을 권하며 함께 가정의 건강과 집안의 행복, 풍요한 수확을 낳길 기원하는 노래를 부른다. 모든 분배가 끝난 뒤, 무당은 향규를 선포하고 온 마을에 평온이 깃들길 축원하면서 정식행사를 마친다.

제산회 행사 가운데에는 갓 성년을 맞은 이들의 성인의식도 함께 벌어진다. 이 날부터 성인으로 인정받은 젊은이들은 이성과의 교제가 허락되는데, 일부는 제산회장에서 눈이 맞기도 한다. 일부는 이런 행운을 위해 신물을 준비했다가 행사 때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전하는 대담성을 보인다. 제산회는 또한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정식행사가 끝난 뒤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 제산회장에 나와 술과 노래를 즐기며 춤을 추게 된다. 일부는 갖가지 전통놀이와 체육활동을 벌이기도 하는데, 모두 공동체적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것이다.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는 이런 풍경은 어둠이 다가올 무렵 제산회장 중앙 쌓아둔 탑을 불사름으로써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타오르는 탑과 함께 그 해 제산회도 막을 내린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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