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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리엔덩>을 침몰시킨 VCD 해적판

1998년 6월초, 상하이(上海)미술영화제작소의 관계자들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면서 한 애니메이션 영화 내부 시사회를 참관하고 있었다. 2년여의 제작기간과 1300만 위안(우리돈 20억원)을 투자한 야심작 <바오리엔덩>(寶蓮燈)이 드디어 영화계 인사와 언론인들 앞에 선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오리엔덩> 제작과정과 시사회는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상하이미술영화제작소는 <바오리엔덩>의 작화에 참여한 인원들을 야간에는 작업장에 절대 남겨두지 않고 2,3중의 신분검사를 통해서 출퇴근시켰다. 일부 완성된 스틸 필름의 경우 간혹 언론상에서의 발표회를 위해서 복사하여 내보냈을 뿐 외부로의 유출을 철저히 통제했다.

애니메이션이 모두 완성되고 후반부 작업에 이르러서는 제작 참여인원의 감시가 극에 달해서, 더빙에 참여한 몇몇 성우가 그만두기까지 했다. 영화인들에게 처음 선을 보인 내부 시사회에서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시사회장 안팎을 삼엄히 경비했을 뿐만 아니라, 참석인원의 몸과 가방을 일일이 검색하여 적지 않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한 애니메이션 영화 시사회장에서 왜 이런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을까? 심한 몸수색과 감시에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 같았다. "불법 복제판 제작자가 소형 촬영기로 작품을 도둑 촬영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니 이해해 달라." 이런 군사작전 끝에 2주후 <바오리엔덩>은 상하이 전역의 영화관에서 정식 상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거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영상소프트 판매점에서는 이미 10여종의 VCD 해적판이 나돌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하청을 받아 실력을 키워온 작화기술과 중국 고대전설에 기초를 둔 스토리, 중화문화권 최고의 인기 여가수 Coco Lee의 주제가가 돋보인 '바오리엔덩'의 흥행은 참패로 결말이 났다. 1960년대 수묵화 기법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선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던 상하이미술영화제작소의 야심에 찬 도전은 VCD 해적판으로 인해 처절히 꺾인 것이었다.

등록된 기업까지 가짜상품 만들어

<바오리엔덩>은 불법 복제품으로 인해 중국 문화산업이 어떠한 타격을 입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가짜상품으로 입는 산업상의 피해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다. 하지만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가짜산업의 규모가 중국산업 기반을 위협할 정도로 커졌다는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작년 미국 포천지(http://www.fortune.com)는 "중국에는 모조품 전문가만 수백만명에 달하고, 중소기업은 물론 일부 국영기업도 가짜 만들기에 가세하고 있다"라고 보도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오랫동안 중국에서의 영업을 맡았던 윌리엄 돕슨 P&G사 부사장은 "정식 등록한 기업까지 가짜 상품을 만드는 문제는 과거 인도와 우크라이나에서 경험한 적이 있지만 규모는 중국의 1/10에 미치지 못했다"고 자조하면서 "가짜 상품의 횡행이 중국 비즈니스에 있어서 최대 공적"임을 지적했다.

중국정부 관계자가 추산한 외국브랜드 가짜상품 규모는 2000년말 현재 약 160억 달러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인 외국 기업들은 추산되지 않는 통계까지 포함하면 정부측 주장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크다고 주장한다.

지적 재산권 분야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카세트테이프 CD, VCD, DVD 등 음악과 영상 제품, 프로그램 게임 등의 소프트웨어 제품, 잡지 만화 단행본 등 서적류는 복제가 손쉽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부의 통계에 의하면 2000년 중국의 영상물 및 음반관련 경영업체는 모두 14만5617개에 달한다. 이들 출판·발행업체의 총 생산액은 12억 위안에 달했으며 총 시장규모는 38억 위안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음반시장에서 히트에 성공한 음반의 20배가 넘는 불법 복제판이 난무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중국의 문화시장 규모는 통계보다 10배 이상 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를 보여주듯 중국 음악소프트시장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지속적인 감소세로 이어졌다.

1992년 21.6억 위안이었던 음반 판매량이 1999년에 와서는 64% 감소한 7.7억 위안에 그쳐서 전년에 비해 50% 하락하였다. 불법 복제판의 시장 점유율이 70%에 이른다는 중국 내 언론의 보도가 허언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하얼빈시를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과 충칭, 쓰촨(四川), 윈난(雲南) 등지의 서남지역은 해적판 점유율이 90%에 이른다.

해적판 때문에 절필한 위치우위

심각한 불법 복제판의 유통은 중국 문화예술인의 창작 활동에도 찬물을 끼얹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문장가 위치우위(余秋雨)는 지난 2000년 돌연 절필을 선언했다. 자신이 홍콩 위성방송국 제작진과 함께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경험한 내용을 적은 '새천년 일기'(天禧日記)가 해적판의 집중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일련의 주옥같은 문화·문명 비평서와 산문집을 냈던 위는 늘어나는 명성, 책 판매량과 함께 해적판 도서업자들의 집중적인 협공을 당했었다. 50여만권이 정식적으로 판매된 '고난스러웠던 문화여행'(文化苦旅)의 경우, 무려 800만권 이상의 해적판이 팔려나가 별다른 재미를 못 보았다.

이런 상황에 분개해 있던 위는 신작 <새천년 일기>가 자신이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출판사와 전혀 다른 출판사에서 해적판을 출판함으로써 절망감 속에 절필을 결심한 것이었다. 불법 복제품은 작가의 창작활동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탈세, 누세 등까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심지어 위치우위의 사례처럼 탈세를 위해 합법적인 음반회사가 직접 해적판을 제작 판매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중국에서의 불법 복제품은 대만, 홍콩과는 다른 양상이다. 대만과 홍콩이 조직폭력단체와 결탁되어 철저한 지하화의 양상을 보이는데 비해, 중국은 광범위하고 체계를 갖춘 합법·비합법적인 기업이 주동이 되어 상품을 유통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들은 가짜 박멸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주로 쓰는 방법이 정품의 가격을 가짜 수준으로 낮춰 가짜를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것. 필자가 음악·영상소프트 판매점 '스따이후이인'(時代回響) DVD 타이틀 판매부스에서 직접 확인한 정품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전체 판매공간에서 일부분만을 차지한 정품 부스에서는 120위안인 정가가 단돈 29위안으로 할인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2년 전 50위안을 호가하던 영화 정품 VCD 타이틀도 18위안에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관객의 감소로 위기에 처한 중국 영화관업계 또한 입장료를 단돈 1위안으로 정한 극장이 등장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진은 줄지만 해적판 때문에 매출이 주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낫다는 판단에서다.

근절을 주저하는 중국정부의 속셈

중국의 불법 복제품 문제는 더 이상 감추기 힘들 정도로 극에 달해 있다. 중국정부도 최근 들어 '불법 복제품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해적판 소탕작전에 나섰다. 2000년에는 전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470만 달러 어치의 가짜 문화상품을 압수해서 불태움으로써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정부가 겉으로만 단속활동을 벌이고 눈 가리고 아웅식의 대책으로만 일관하고 있어, 국제영화협회는 중국을 세계에서 해적판 문제가 가장 심각한 국가라고 혹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적판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중국정부의 대외적인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처럼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중국영화 관계자가 중국 문화산업 현황을 조사한 한국정부 인사에게 전해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답변은 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중국정부의 능력은 충분히 해적판을 근절시킬 수 있지만, 인민들에게 싼 가격으로 문화생활을 제공하는 차원에서 눈감아주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힌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 내 불법 복제판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이다.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이제까지 해적판에 대해 큰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는 미국 메이저 영화사의 한 CEO는 중국의 영화·TV산업에 대해 "금광보다 훨씬 값진 아직 미개발된 다이아몬드 광산"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여기에 미국은 중국이 WTO 가입을 기점으로 개방할 문화시장의 진출을 노리고 예비 관객을 배양하려는 장기적인 전략으로 접근하고 있다. 해적판 CD나 VCD, DVD를 통해 미국팝송과 할리우드 영화를 자주 접하게 하고, 나중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을 때 잘 꾸며진 음반을 사게 하고 안락하고 뛰어난 환경의 영화관에서 보게 만들겠다는 의도이다.

상대적으로 자본이 열악하고 기획력이 떨어지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있어서 미국과 같은 장기적인 포석은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불법 복제판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 내에서 한리우(韓流) 열풍의 한 주역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 회에서는 중국 내에서의 한리우 현황과 해적판이 끼친 영향, 이에 대한 시사점 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의 하니리포터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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