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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씨.
만원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박사님처럼 '프리랜서'로 뛰고 있는 '독립기자' 정지환입니다. 직접 찾아 뵙지 못하고 이렇게 지면으로 인사를 드리게 된 것을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를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2년 전 제가 월간 <말>지에서 근무할 때, 군납비리 취재 관계로 박사님의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용산의 옛 국제빌딩 지하 커피숍에서 당신은 군납비리에 대한 의견과 더불어 국방개혁에 대한 의지까지 열정적으로 토로하셨지요.

사실 국방 관련 기사를 쓰면서 박사님에게 도움을 받았던 기자는 저 혼자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석에서 기자들이 당신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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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뿐입니까. 월간 <말>지 1998년 2월호에 기고하신 'IMF 시대, 한국군의 과제-15조 국방비, 30%의 거품을 걷어라'라는 글 때문에 박사님은 군 관계자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 동안 국민에게 '금단의 구역'으로 인식됐던 국방 분야에 대해 전문성을 가지고 비판의 화살을 거침없이 날렸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저로서는 최근 박사님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활약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우선 박사님은 지난 8월 5일 안양시청 공무원 특강에서 대통령과 전 국방장관 등을 일언지하에 '빨갱이'로 매도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적절한 발언'을 비판적으로 보도한 <경기일보> <현대일보> 등 경기지역 일간지들을 "안보파괴세력"으로, 당신의 특강에 비판적 의견을 개진한 안양지역 공무원들을 "호남 출신일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2)이어 박사님은 8월 16일에는 <동아일보>와 <문화일보>에 '대국민 경계령! 좌익세력 최후의 발악이 시작됩니다'라는 제목의 의견광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광고 문구 중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는 대목이 국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원 박사님.
박사님이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발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주장은 일반 상식을 갖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안양지역 공무원직장협의회가 "대통령이 빨갱이면 그를 선출한 국민들도 빨갱이란 말이냐"며 항의성명을 발표했고, 박사님을 강사로 초청한 안양시는 깊은 유감을 표명하는 한편 "추후 강사 초빙에 신중을 기하겠다"면서 재발 방지를 약속했습니다. 광고를 실었던 <동아일보>도 곧바로 '광고도 검증한 뒤 실었어야'라는 제목의 독자의견을 게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결국 다수의 사람들에게 박사님의 행위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은 모양입니다. 박사님의 활약(1)에 대한 저의 의견은 뒤에서 자세히 설명 드리기로 하고, 우선 당신의 활약(2)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광주사태는 좌익과 북한이 군중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라고요? 사실 그런 주장은 그리 새삼스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1980년 5월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던 김대중 기자(현 편집인) 등 한국의 대다수 언론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광주의 인상을 그렇게 그려서 국민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신군부의 정치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김대중 기자의 '참회'(변명으로 일관하고 있긴 하지만)를 통해서도 이미 세상에 밝혀진 바 있습니다.(사실 대한민국에 단 한 줌의 이성과 상식이 있다면, 이 기사 하나만으로도 김대중 기자는 영원히 언론계에서 축출되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김대중 기자가 계엄군이 던져준 보도자료를 가지고 광주를 '무정부 상태'로, 광주시민을 '난동자'로 매도하는 기사를 <조선일보>에 내보냈던 1980년 5월 25일 AFP는 '광주의 진실'을 다음과 같이 전세계에 타전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은 라오스나 캄보디아를 능가한다."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과 '라오스나 캄보디아를 능가'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모습은 곧 '킬링필드'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실제로 계엄군과 함께 광주시 외곽에 머물고 있던 김대중씨 등 대다수 한국 기자들과 달리 직접 광주 시내 현장에 들어가서 끝까지 머물렀던 사람들은 외신 기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가 TV 화면을 통해 9·11테러와 팔레스타인 학살의 현장을 생생히 지켜보았듯이, 1980년 5월 지구촌 사람들은 그들이 전송한 보도를 통해 '광주학살'의 목격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박사님의 "광주 폭동" 주장은 전 세계인이 생생하게 목격한 진실에 대한 일대 도전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60억 지구촌 '목격자'가 모두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당신의 백 마디 말은 어떤 공감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원 박사님.
이번에는 박사님의 활약(1)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통령을 빨갱이로 매도한 발언에 지역 일간지와 공무원들이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자, 박사님은 8월 10일 '안양시청 강연에 발끈하는 이상한 지방 일간지들이 수상하다'는 제목의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당신은 또 한번 문제의 발언을 하셨습니다. "강연을 험하게 몰아치는 무명의 언론들을 우리는 의심해야"라거나 "악의적으로 보도한 지방 일간지들"이라는 일부 대목에서 지방지를 무시하는 듯한 당신의 '차별주의적 우월의식'이 여실히 읽혀지긴 하지만 여기선 논외로 하겠습니다.

정작 제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입니다. 박사님께선 반박문에서 "국가운명을 좌우하는 대통령의 사상에 대해서는 의심을 해야 한다"면서 그 대표적인 이유로 다음과 같은 베트남 멸망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박사님이 직접 쓰신 것이니 생생히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월맹에 먹혔습니다. 1973년 파리에서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 간에 평화협정이 맺어진 이후 월남은 그야말로 평화무드에 푹 젖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군을 가진 월맹이 세계 4강의 월남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먹혔습니다. 의심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통령 주변, 대통령 출마자, 비서실, 정보부, 군사령부 등에 간첩들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 간첩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총 한번 못 쏘고 망했습니다."

물론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게 먹힌 이유 중에는 박사님이 지적하신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이유만으로 베트남이 망했을까요? 정작 남베트남을 지지하고 지원했던 미국은 박사님과 생각을 달리하고 있더군요. 우선 남베트남이 궤멸하기 직전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이게 어찌된 셈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남베트남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지난주 너무도 급작스러운 사태 발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중략)… 남베트남 국군은 그들의 진지를 지키기 위해서 총을 들기는커녕 완전한 궤멸상태가 되어 세계의 전쟁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게 패주해 버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거의 모든 일이 잘못된 것이다."(<타임> 1975년 4월 14일자)

▲ 피난길에 버려진 베트남 오누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박사님의 지적처럼 "세계 4강의 월남군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월맹에게 하루아침에 먹혔"고, <타임>의 보도처럼 남베트남 병사들은 총을 버리고 도망부터 쳤을까요?

물론 박사님은 모든 것을 남베트남 정부 내에 침투한 간첩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태의 본질은 외면하고 표피적 현상에만 몰두한 시각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남베트남 정치지도자들은 이른바 '간첩'을 색출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 미국의 또다른 시사주간지는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습니다.

"티우 대통령은 자신의 자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남베트남에서 새로운 큰 조치를 취했다. 전국에 걸친 강경한 비상조치를 명하고, 이에 따라 군대와 경찰에게는 공산주의의 사주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가혹하게 까부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데모대나 탈영병에 대해서는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중략)… 공산주의 동정자들이 베트콩기(旗)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전국의 모든 상점과 창고에서 적·청·록(赤·靑·綠) 세 색깔의 천을 모두 압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 1973년 2월 첫주간호)

이러한 강경조치에 따라 정부 관리들에겐 "누구든지 달갑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을 자유 재량으로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남베트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했습니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박사님의 고견(?) 대로 공산주의자나 그 동조자들을 모두 박멸했는데도 남베트남은 도대체 왜 망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남베트남을 이끌던 정치지도자들의 성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성분 때문에 그들은 베트남 국민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했습니다.(지금부터 소개하는 내용은 리영희 교수의 명저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에서 인용한 것이니,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시면 두 책을 구해서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그들은 외세의 식민지 지배 시절 민족을 배반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2년 5월의 어느 날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는 '베트남 사태의 원인·과정·교훈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풀브라이트 상원 외교위원장이 의장을 맡은 이 날 청문회에서 오간 문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의장: 나도 한 가지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 남베트남 정부에 관해서 인데, 키 장군(당시 부통령)이 1954년까지의 베트남인의 대 프랑스 항전 시기에 프랑스 공군의 일원이었나요?
증인: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의장: 그러면 키 장군은 어디서 비행기 타는 기술을 배웠나요?
증인: 확실치는 않지만 프랑스군에서 배웠다고 믿습니다.

의장: 티우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키와 티우 두 사람은 각기 프랑스 공군과 프랑스 육군의 장교가 아니었나요?
증인: 제가 판단하는 한 그렇습니다.

의장: 얼마 전까지의 디엠 대통령은 프랑스의 인도지나 식민정부의 한 성장(省長)이 아니었던가요?
증인: 예,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베트남의 이승만' 고 딘 디엠을 비롯해 티우, 키 등 남베트남을 이끌었던 정치지도자들은 식민지 시절 조국을 배반하고 외세에 부역했던 '검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베트남의 어느 국민이 그들에게 애정과 지지를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써서 천황에게 바치고 관동군 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사냥했던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즉 박정희 전 대통령도 생각났습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 한국 군부 지도부가 친일파와 그 후배들에 의해 완전히 장악됐다는 사실은 박사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실제로 해방 직후 국방부장관 중 광복군 출신은 이범석 단 한 명이었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관동군이나 일본 육사 출신이었지요.

▲ 지난 어버이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부부가 명륜동 본가를 방문, 노부모 이홍규, 김사순씨 내외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고 있다.
ⓒ 연합뉴스
역사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최근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부친 이홍규 옹의 친일행적과 관련한 의혹이 하나둘 벗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8월 26일 시중에 발매되기 시작한 <역사비평> 가을호에 의하면, 이홍규 옹은 1942년 직후 마루야마 아키오(丸山晃生)로 창씨개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1943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당시 명단을 확인해 본 결과 그것마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황해도에서 조선총독부 검사국 서기 겸 통역생의 신분으로 일제에 부역하던 당시에는 정신대 동원에 앞장섰다는 의혹이 정신대 할머니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부친의 일제 부역 문제를 이회창 씨에게 묻는 것은 너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연좌제' 망령의 부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한민국에 인재가 없기로서니 이렇게 민족적 자존심에 금이 갈 정도로 흠이 있는 사람의 아들을 굳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1963년 1월 20일 파리휴전협상 당시 미국 수석대표로 활약했던 에이브릴 해리만이 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우리가 깊이 경청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베트남에서의 투쟁의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다. 한 쪽은 자기 민족을 억압한 식민지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고 또 한 쪽은 긴 독립·반식민지 투쟁에 몸바쳐 싸운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다. 어느 쪽 지도자들이 베트남인을 더 사랑하는가는 분명한 사실이다. 민중의 사랑을 받는 쪽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만원 박사님.
남베트남 군인들이 싸우기도 전에 총을 버리고 도망간 이유 중 또 하나는 남베트남 정치지도자와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부도덕성과 부정부패였습니다.

사실 남베트남은 미국의 엄청난 물질적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했습니다. 미국이 장개석 국민당 정권에게 12년 동안 지원한 군사·경제원조는 최대 50억 달러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반공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려 1천5백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베트남에 지원된 자금과 물자가 얼마나 대단한 규모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수여하는 '밑 빠진 독' 상이 당시에도 있었다면 제일 먼저 이들에게 돌아가야 했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자금과 물자는 투명하게 쓰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미국의 원조는 극소수의 남베트남 권력층에 부를 집중시켜 부익부 빈익빈 현상만을 가중시켰습니다. 한 줌도 안 되는 부유한 권력층은 사치풍조에 빠졌고, 남베트남 정부군의 장교와 사병들은 군수물자와 무기를 베트콩(남베트남 게릴라 부대)에 팔아 넘겨 이문을 남기는 데 골몰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는 미국이 원조한 무기를 잔뜩 실은 트럭을 베트콩 진영으로 몰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놓였음에도 사회지도층이 솔선해서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사람은 가난한 농부들의 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반면에 정치지도자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자녀들은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안락하게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책임과 의무'는 방기한 채 '부귀와 영화'만 탐하는 정치지도자와 사회지도층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남베트남 민중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어떤 명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세계 4위의 군사대국이었던 남베트남이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02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거리가 멀수록 좋다는 '뒷간'이라도 되는 듯이 취급하는 정치지도자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군사정권의 대통령들은 천문학적 규모의 부정부패를 자신들이 직접 해치웠고, '문민'과 '국민'을 내세운 대통령들마저 아들의 부정부패로 국민의 분노를 샀습니다. 병역 문제는 또 어떻습니까? 실제로 고위관료 자제들의 병역면제 비율은 일반인의 4배나 되고, 족벌언론 사주일가 자제들의 병역면제 비율은 무려 일반인의 10배나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장남 이정연씨.
ⓒ 연합뉴스
그런 점에서 군통수권을 책임지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 중 한 명이 아들의 병역면제 논란으로 의혹을 사고 있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회창 후보의 부인 한인옥씨가 자신의 '귀한 자식'을 위해 모정(母情)을 발휘 했는 지의 진실 여부는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도대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의혹투성이로 걸레가 된 두 아들의 병적기록부를 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합니다.

더욱이 최근에야 밝혀진 허원근씨의 군의문사 사건은 자식을 군대에 보낸 모든 부모들의 가슴을 천근만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작가 조정래씨는 최근 자신이 겪었던 '충격적 체험'을 8월 26일자 <한겨레>에서 다음과 같이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강연이 끝나자 한 학생이 말했다. 만약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대학생들은 군복무 거부운동을 전국적으로 일으키겠다고. 대통령의 아들들이 군대에 안 갔는데 왜 우리가 군대에 가야 하느냐고."

▲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 오마이뉴스 이종호
여기서 '그 사람'이 누군 지는 박사님도 잘 아실 겁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179cm의 키에 45kg의 몸무게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조건으로 병역이 면제된 아들을 둔 대통령이 군징집을 거부하는 대학생들을 감옥에 잡아넣을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아니면 대학생들은 대통령의 문제를 거론하지 말고 그저 다소곳이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사실 저도 이 대목에 이르면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박사님은 1997년 6월호 월간 <말>지에 기고한 '6·25 이래 지금이 가장 위험하다'는 제목의 글에서 "전쟁을 판가름하는 것은 장교들의 질이다. 장교들의 질은 인민군이 압도적으로 우수하다"고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건장한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대통령을 바라보며 사병들마저 자신을 '어둠의 자식'으로 자학하게 된다면 대한민국 군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박사님 말대로 "6·25 이래 가장 위험한 시기"인지도 모릅니다.

만원 박사님.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가장 위험한 시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저는 당신이 1997년 11월호 월간 <말>지에 기고한 '가슴속에 묻어 둔 이야기'에서 고백했던 다음과 같은 사연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그 글에서 당신은 공소시효(?)가 지나긴 했지만 자신이 저질렀던(?) '병역비리'를 솔직하게 자백(?)한 바 있습니다.

"사관학교 신체검사에서 나는 신장미달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불합격 도장을 찍은 하사관과 희망 없는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 어느 한 소령이 나타나 나에게 구두를 신고 신장을 재도록 조치해 줬다. 2차 신체검사에서 나는 심한 독감으로 인한 체중미달로 또다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울먹이는 나에게 낯선 대령이 나타났다. 그는 사무실에서 주전자를 가져와서는 나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네놈은 이 물을 다 마셔야 해.'"

그렇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병역비리'였습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아름다운 병역비리'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민은 당신의 명백한 '병역비리'에 뜨거운 박수를 보낼망정 규탄하거나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이회창씨의 장남 이정연씨가 국민 앞에 서서 솔직하게 모든 것을 고백하는 장면을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전제가 있습니다. 조금의 숨김이나 거짓 없이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치 지만원 박사님처럼 말입니다.

"하늘이 돈짝 만한 산골(강원도 횡성)에서 50줄의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난 나는 기골이 약해 아버지의 등에 업혀 늘 침을 맞으러 다녔다"고 고백한 지만원 박사님.

"학연도 지연도 별반 없는 나는 언제나 외톨이였고, 그래서 내가 걸어온 길은 끝없는 가시밭길이었다"고 토로한 지만원 박사님.

당신 같이 가난하지만 당당하게 세상의 의무를 다하려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래도 희망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된 게 적게 가지고 덜 배운 민초만이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그리하여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갖고 더 배운 사람들이 도리어 작은 의무조차 외면하려는 매국적 풍조에 말입니다.

만원 박사님.
이제 박사님이 이 나라의 안보를 위해 진정 분노하고 비판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정녕 아시겠습니까? 이 아름다운 대한민국이 베트남처럼 자멸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박사님이 진정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녕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온 나라가 자신의 문제로 불신과 증오로 들끓고 있건만 끝까지 침묵하는 이정연씨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박사님께서 충고해 주십시오. 온갖 소송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광야에 우뚝 서서 군부를 향해 개혁을 외쳤던 그 용기와 기개로 말입니다.

만원 박사님.
당신이 용기를 발휘할 때 국민들은 당연히 당신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당신을 또다시 '외톨이'로 만들고, 그 일로 인하여 당신이 또다시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해도 진실의 길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당신을 온몸으로 지켜줄 것입니다.

12년 전 척박한 이 땅에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를 개설하고 우리 사회의 온갖 불합리와 권위주의에 맞서며 '시스템 개혁의 전도사'로 활약했던 40대 시절의 그 초심으로 돌아간 당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8월 26일 정지환 올림.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8월 23일 CBS '변상욱의 시사터치'에 출연해서 방송했던 '정지환의 인물파일'을 편지 형식으로 개작한 것입니다. 방송내용은 CBS 인터넷 홈페이지 AOD에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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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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