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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밤 열시가 넘었습니다.
오지 않을 모양이군.
저녁 무렵, 차밭의 풀을 매고 돌아와 술을 한잔했더니 밀려오는 잠을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막 잠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여보세요, 예약했던 사람인데요, 한 시간 뒤에 갈게요."
"일찍도 전화 하셨군요. 차 얻어 타고,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이제 노래방 갈 차롄가."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안 봐도 알지. 너무 오래 놀지 말고 일찍 들어와요. 나도 자야 하니까."

전화를 끊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오기로 한 세 명의 처자들이 오지 않습니다.
얼른 좀 들어올 일이지.
잠을 자는 듯 마는 듯 뒤척이며 또 한 시간이 지나갑니다.
열두 시가 가까워옵니다.

에이, 오거나 말거나 이젠 자야겠다.
막 불을 끄려는데 봉순이네 식구들이 요란하게 짖기 시작합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처자들을 방으로 안내해주고 돌아와 잠을 청합니다.

나갔다 들어와서 그런지 쉬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이 깨버렸나.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는데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 옵니다.
"여보세요. 어, 그래 나야 나. 여기 보길돈데. 아주 끝내줘."
한 잔 한 탓인가, 전화 거는 처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갑니다.

"아주 짱이야 짱, 우리 오늘 돈 한푼도 안 썼어. 아 참, 민박비만 빼고. 그래 그래, 내가 누구니, 밥도 공짜로 먹고, 술도 공짜로 먹고, 거기다 회까지 공짜로 먹었다. 야, 그 감성돔인가 하는 회는 장난이 아니드라. 예술이야 예술, 그래, 그래 하하하."

젠장,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네. 좀 작게 통화하지.
"하하, 놀러온 아저씨들을 만났는데 차로 구경도 시켜주고, 흑돼지구이도 먹여주고, 그래 그래 너무 친절한 거 있지. 노래방비까지 아저씨들이 다 냈어. 낼 아침도 사준다고 연락하래. 끝내주지. 너도 와라. 하하하."

정말 시끄럽군.
더 참지 못하고 문 밖으로 나갑니다.
이봐요, 처자, 잠 좀 잡시다. 다른 방 손님들 깨겠소. 좀 조용히 통화하시오.
"죄송합니다."
전화를 하던 처자가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입니다.

나온 김에 한동안 뜰에서 별을 보고 섰습니다.
잠시 조용하던 전화 목소리가 이내 다시 커지기 시작합니다.
취했으니 스스로도 흥분을 어쩔 수 없겠지요.

"하하하, 그 아저씨들 너무 친절하셨어. 회도 공짜, 밥도 공짜, 술도 공짜, 노래방도 공짜, 오케이, 너무 고마운 아저씨들이야, 하하하."
밤이라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속없는 아저씨들이군. 자기 아내들한테도 그렇게 돈을 쓸까.
그나저나 저 처자들도 공짜 되게 좋아하네. 그게 어디 공짠가.
나는 바깥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전화하는 처자 곁으로 다가가 다시 한번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한 마디 합니다.

이 철없는 처자야, 공짜 너무 좋아하지 말아. 얻어먹었으면 갚기도 해야지. 그래야 그게 빚이 안 되지. 안 그러면 그게 다 빚이에요, 빚.
"나중에 갚으면 되죠."

아니, 그건 그대가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란 말이요.
"왜요?"
그게 다 나중에 그대들 결혼한 뒤에 남편들이 다른 처자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기 때문이지.

별은 총총하고, 정염에 겨운 여름밤이 깊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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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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