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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야삼촌> 표지
ⓒ 다리미디어
"삼촌이 별안간 손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빈 하늘이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보는 듯 눈꼬리가 흔들린다. 무엇을 보고 있을까. 치매가 온 뒤 자주 가서 머무는 곳, 거기서 만나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미 자기 인생을 돌아볼 능력조차 잃은 사람에게도 과거는 자락자락 찾아와 그에게 환영처럼 되비춰주는 것일까. 거기에 어린 내가 있었던 것일까. 누님이 던지고 간 아이, 울며 엄마를 찾던 아이, 그 아이를 달래고 어루어야 할 열다섯 살 소년의 의무감..."

문단에서 누구에게나 누님, 혹은 통뼈(?)로 통하는 작가가 윤정모다. 짤닥막한 키에 부리부리한 눈매는 마치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조선의 토종 호랑이 같다. 여성작가인 윤정모에게 이 같은 강렬한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작가의 마당발 같은 맹렬한 활동 때문이다.

윤정모는 소위 행동하는(?) 작가이다. 민가협, 유가협, 정대협 등등 웬만한 인권단체나 여성단체부터 학생운동, 노동현장에 이르기까지 윤정모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윤정모에게 있어서 허울 좋은 말이나 논리정연한 글은 차라리 사치에 가깝다. 그만큼 윤정모는 현장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작가라는 것이다.

그런 윤정모가 한때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 이유는 꼭 한 가지, 딸의 공부를 위해서. 그렇게 강하게만 느껴지던 윤정모 역시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어머니일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던 어머니 윤정모. 그리고 아내라는 이름 앞에 던져진 뼈아픈 시련. 비바람에 시달린 뒤에 더욱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고 했는가.

그랬다. 지난 해 여자로서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비극적 개인사를 차분하게 고백함으로써 세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작가 윤정모, 그 윤정모가 <슬픈 아일랜드> 이후 3년만에 쓴 신작 장편소설 <꾸야삼촌> (다리미디어, 8000원)을 펴냈다.

<꾸야삼촌>은 한국전쟁에서 IMF까지의 격동기를 살아낸 모녀의 이야기와 더불어 전쟁으로 일그러진 삶 속에서도 끝내 순박한 사랑을 간직해 낸 한 남자를 통해 간절한 생명력의 의미를 부각시킨 장편소설이다.

<꾸야삼촌>은 모두 15부로 구성되어 있다. 불청객, 전쟁과 아이, 외삼촌들, 나를 미행해 온 전쟁, 소년의 전쟁, 나우리, 기회를 잡는 방식, 아버지와 아들, 찬우 동우, 그늘도 깊어라, 형벌도 삶의 대가, 흐르고 멈추는 물결, 찬우의 선언, 몰락의 절차, 사랑 찾아가시나요, 등이 그것들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 중에 피난간 외가에서 주인공을 업어 키웠던 꾸야 삼촌, 그 꾸야삼촌이 어느날 불청객이 되어 불쑥 주인공의 집에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꾸야삼촌은 예전의 정이 철철 넘쳐 흐르던 그 꾸야삼촌이 아니다. 꾸야삼촌은 이제 60대의 치매 노인이 되어 주인공의 집에 잠시 맡겨진 것이다. 그것도 주인공이 파탄 직전에 있는 상태에서.

주인공 '나'의 남편은 현재 사업 부도로 교도소에 들어가 있고, 연이어 대학에 떨어진 4수생 아들이 있는 주인공 '나'에게 있어서는 꾸야삼촌을 받아들일 만한 조금의 틈도 없다. 주인공 '나'는 처음에는 치매에 걸린 꾸야삼촌의 출현에 분통을 터뜨린다.

그러나 주인공 '나'는 끝내 꾸야삼촌을 내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꾸야삼촌은 어린 시절 한국전쟁을 피해 외가로 내려온 주인공 '나'를 따스하게 보살펴 주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 사람은 내 삶의 한 부분을 이어준 사람이다. 혼자서는 자랄 수 없는 어린 나무에 물과 사랑의 퇴비를 준 사람이다. 따라서 이 사람은 나에게 불청객이 될 수 없다. 어느 순간 어떤 식으로 찾아오든 나로부터 거부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세월이 변화시킬 수 없는 관계, 그래, 내 부모와 같은 사람이다."

▲ 작가 윤정모
ⓒ 윤사모
소설은 꾸야삼촌의 치매 속으로 사라진 기억 속으로 되돌아간다.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에 다섯 살이었던 주인공 '나'는 피난 도중 군대에 차출당한 아버지를 뒤로 한 채 어머니와 함께 경주 인근의 나우리 외가로 내려간다.

하지만 어머니조차 '나'를 외가에 달랑 남겨 놓은 채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만다. 주인공 '나'는 외가에서 외할머니와 보야, 꾸야 두 삼촌에게 맡겨진다. 그 중 꾸야삼촌은 엄마를 찾아 울기만 하는 어린 '나'를 정성으로 돌보아준다.

하지만 외가도 마냥 안전할 수는 없었다. 동사지기가 아침 식전에 피난을 떠날 것을 알리던 날, 꾸야삼촌마저 국군 수색대에 의해 길 안내원으로 차출을 당하고 만다. 결국 주인공 '나'는 외할머니와 보야삼촌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꾸야삼촌은 군대를 제대한 뒤 돌아오는 열차에서 만난 미모의 아가씨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새아버지의 소개로 약품 배달을 하면서 평탄한 가정을 꾸리는 듯하지만 결혼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결국 처녀 시절 방직공장을 다녔던 꾸야삼촌의 아내가 공장에 나가며 생계를 꾸린다.

1970년, 모르핀 중독자였던 새아버지는 보건 당국의 조사를 피하기 위해 모르핀을 다량으로 복용하다가 어이없이 사망한다. 어머니는 가산을 정리하여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외숙모 또한 실직 상태로 무위도식하는 꾸야삼촌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결국 꾸야삼촌은 주인공 '나'의 사촌 동생인 찬우와 동우를 데리고 어머니에게 의탁하게 되고, 두 사촌동생과 무능력한 삼촌까지 떠안게 된 주인공 '나'는 번역일을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간다.

그러던 중 동우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이를 계기로 외숙모가 다시 집으로 들어와 꾸야삼촌네는 따로 나가 살게 된다. 하지만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외숙모는 동우의 교통사고 배상금을 챙겨 다시 집을 나가 버린다. 외숙모의 가출 이후 꾸야삼촌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대구로 내려간다. 한편 결혼한 주인공 '나'는 출판사를 창업한 남편을 도와 번역일을 계속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주인공 '나'를 찾아 꾸야삼촌이 지명수배자 신분으로 서울에 올라온다. 꾸야삼촌은 교통사고를 낸 무면허 트럭 운전사의 불쌍한 처지를 딱하게 여긴 나머지 사건을 미온적으로 처리하다가 그만 지명수배자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 꾸야삼촌은 주인공 '나'의 집에서 숨어살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고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 와중에 남편의 출판사는 3개월 영업정지를 받는다. 꾸야삼촌과 남편, 두 명의 남자에 질린 주인공 '나'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꾸야삼촌은 수의를 장만할 돈을 내놓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남대문시장에서 포장마차를 벌인다.

꾸야삼촌은 자식들을 위해 죽기살기로 일한다. 그리고 찬우는 아버지의 고생에 보답이라도 하듯 명문 대학에 합격을 한다. 한편 주인공 '나'의 남편은 지인의 도움으로 국가원수를 찬양하는 책을 출판하라는 뜻밖의 제의를 받게 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 마침내 주인공 '나'는 상류사회에 진입한다.

▲ <꾸야삼촌>을 펴낸 작가 윤정모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 이종찬
출판사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꾸야삼촌은 포장마차를 버리고 출판사의 관리팀장을 맡는다. 꾸야삼촌은 새로운 일에 차츰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나 출판사를 먹여살리는 책이 신군부를 미화하는 내용의 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꾸야삼촌은 출판사를 그만두고 찬우가 다니는 대학의 수위로 취직을 한다. 한편 찬우는 운동권에 깊숙이 빠져든다.

상류사회에 진입한 주인공 '나'는 점점 '부'의 달콤함에 빠져든다. 운동권의 핵심 인물로 성장한 찬우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민중을 들먹이며 맹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마침내 후배들을 강도로 들여보낸다. 그러나 찬우는 현장에서 경찰에 검거되고, 3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러한 찬우의 행동에 분노한 '나'는 혈연을 끊기로 작정한다.

출판에서 성공한 남편은 위성방송 쪽으로 사업 방향을 돌리고, '나'는 남편을 이어 출판사 사장을 맡는다. 그러나 수년간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위성방송 사업은 풀리지 않고, 출판사마저 위기에 몰린다. 마침내 남편은 부도를 내고 교도소에 들어가고 살던 집마저 경매로 넘어간다.

사업 실패로 오갈 데 없는 '나'는 어머니가 마련해 놓은 서민 아파트로 들어간다. 그리고 며칠 후, 장례식을 치를 여유조차 없는 가운데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돈이 없어 장례식 절차가 아득하기만 할 때 꾸야삼촌은 그 동안 마련해둔 하얀 고급 모시 수의를 내놓는다. 그리고 생활인이 된 찬우 또한 과거의 빚을 갚는 거라며 천만원을 내놓는다.

그렇다. 이 소설은 치매에 걸려 과거의 기억조차 온전치 않은 꾸야삼촌과 같이 살게 된 며칠 사이, 주인공 '나'가 그 동안 지우고 싶었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면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되찾는 소설이다.

삶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의 가늠자는 무엇인가? 삶에 있어서 성공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삶은 혼자가 아니라 모두 다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꼼꼼하게 재점검하고 있다.

"그래, 이 땅에서 살아오면서 당신이 한 일은 그늘을 지우고 또 닦는 것이었지. 닦아낸 자리마다 웃음을 심었지. 아니, 아니야 사랑을 심었어. 당신의 허리에서 불거져나온 아이들도 다 사랑으로 자랐지. 그 아이들도 또 그렇게 새끼들을 엮어냈고 모두가 튼튼한 자리에 앉았지. 그러자 당신은 서둘러 떠나고 싶었던 거야. 이제 당신이 할 일은 숙모 만나는 것, 그렇죠? 그래요, 당신은 당신이 말한 그 업을 모두 닦았어. 제대로 다 닦아낸 거지. 그러니 이제 갈 수 있어. 훨훨 떠날 수 있어."

덧붙이는 글 | 작가 윤정모는 1946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펴낸 뒤, 1981년 여성중앙 중편 공모에 '바람벽의 딸들'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창작집으로는 <밤길> <님> <빛> <딴 나라 여인>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는 <그리고 함성이 들렸다> <고삐> <들> <나비의 꿈> <슬픈 아일랜드> 등이 있다. 
1988년 신동엽창작기금, 1993년 단재문학상, 1996년 서라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꾸야 삼촌

윤정모 지음, 다리미디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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