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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진입로
무위사 진입로 ⓒ 이종원
이번 휴가는 조용히 사색하는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구상했다. 아내에게도 그런 내 취지를 설명했더니 선뜻 홀로 여행하는 것을 허락한다. "감사, 감사. 오늘 설거지 내가 해줄게."

그러나 다음날 무엇이 불안한지 6살난 딸 정수를 데려가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인질(?)이 된 정수와의 4박5일간의 꿈같은 대화와 답사 그리고 소중한 체험들. 나와 정수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을 감히 확신한다.

사실 정수와 함께 여행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마지막 날 집에 간다고 했더니
"아빠 하루만 더 있으면 안될까?"라고 말했을까.

고답스런 답사만을 고집하지 않고 해수욕장, 갯벌체험, 공룡발자국 탐사, 생태박물관 견학 등 아이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프로그램을 일정에 넣었다. 나는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수첩에 부지런히 옮겨 적고, 글을 모르는 정수는 본 것을 스케치북에 그렸다. 서울 도착할 때 정수가 차에서 의기양양하게 들고 나온 것은 바로 정수가 그린 스케치북이다. 유물만큼 소중한 자산이 아닐까? 방법은 달라도 부녀는 똑같이 느낌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꾸준히 질문하고 답변하는 자상한 아빠의 역할도 해보았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 땅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여정을 통해 아름다운 산하, 바다 그리고 유물들을 통해 선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았으며, 그것을 바라본 관조자의 입장에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이 땅을 지탱하고 있는 남도의 풋풋한 인심들, 질퍽한 남해의 절해고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풍성한 마음 씀씀이에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모놀과 정수' 와 '나의문화유산답사' 회원들의 과분한 환대까지 겯들여 하루하루가 즐거운 여정이 되었다. 그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를 드리고, '인터넷도 이렇게 아름다운 만남의 장이 될 수 있구나..'라는 흐뭇한 생각을 가슴속에 간직한다.

무리한 일정이지만 서울서 가장 가기 힘든 곳이 남해 바다다. 직장인으로서 어렵게 시간을 쪼갠 여정이었기에 다양한 이 땅의 모습을 체험하고자 일정을 무리하게 짰다. 점심은 거의 굶거나 차에서 해결하고 긴 이동은 밤을 주로 이용했다. 하루 밤 신세지는 놈이 맨날 10시가 넘어서 문을 두드렸으니 이 자리를 통해 사죄드린다.

결국은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해 거제도에서는 일정을 포기하고 지심도 배에 올라타 쉬어가는 일정을 잡았고, 마지막 해인사에서는 체력의 한계를 느껴 그늘 밑에서 실컷 잠을 자야만 했었다. 힘든 만큼 보람도 느꼈고, 다닌 만큼 감동도 느낀 여정이었다.

여행 일정

-1일차(서울- 무위사-강진차밭-월남사지-도갑사- 우향리 공룡화석-땅끝-푸른모텔)
-2일차(땅끝전망대-갈두항-조개잡이 관광체험장-미황사-김남주 시인생가-강진 청자 도요지-푸조나무-마량 까막섬-고흥 외나로도-순천)
-3일차(여수 향일암-진남관-흥국사-고성 상족암-공룡해수욕장-옥천사-배둔)
-4일차(당항포-장승포항-지심도-거제대학-창원)
-5일차(주남저수지-함안 무기연당-창령 관룡사-용선대-술정리탑-하병수가옥-가야고분군-합천 해인사-저녁예불-서울)

주행거리 - 1999㎞ / 가져간 참고도서 - 11권 / 찍은 사진 - 280컷

출발

7시 30분 곤히 자고 있는 정수를 차에 태우고 비를 맞으며 집을 벗어났다. 이제 4박5일간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는데도 1시간이 더 걸렸다. 서해고속도로에 접어서야 휴가에 나서는 기분이 든다. 보령쯤 지나서야 정수가 일어난다.

"아빠. 우리 어디가?"
"어디 가기는? 멋진 곳에 가지."

목포를 지나 강진쪽으로 빠진다. 여러 번 남도에 왔지만 매번 월출산을 지나칠 때는 한밤중이거나 날이 흐려 그 장쾌한 기암능선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꼭 보고 말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는데 운무에 가려진 산은 쉽게 그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무위사 박석길

남도의 첫 일정을 무위사를 잡은 이유는 '無爲'가 주는 내면적 의미에 마음껏 사무쳐 보고 싶기때문이다.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고 인위나 조작을 버려라.' 비틀즈의 'let it be' 마음껏 불러보자.

가장 먼저 탐승객을 맞아 주는 것이 바로 '月出山 無爲寺' 의 현판이 걸린 사천왕문이다. 살포시 보이는 여인내의 곡선미랄까? 아스라이 보이는 극락보전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사천왕문을 넘어서면 바로 박석길이 나오고 자연석을 이어댄 계단이 나온다. 부처님께 향하는 길은 이렇게 욕심을 버리고 자연속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인위적 길의 극치인 수덕사 대웅전 길과의 차이점이 바로 이 자연미 넘치는 박석길이다.

극락보전 (국보 13호)

무위사 극락보전 측면
무위사 극락보전 측면 ⓒ 이종원
살포시 계단을 밟을수록 건물의 자태를 조금씩 보여준다. 오를수록 감동은 커진다. 이런 공간의 미학이 바로 무위사가 아름다운 이유일게다. 전신의 자태를 드러내며 감동은 극치에 다다른다. 월악산을 병풍으로 삼고 양쪽에 산자락이 흘러 내린다. 만약 이곳에 절집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스러우리만큼 절묘한 위치에 무위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막돌로 막아놓은 듯한 석축은 자세히 보면 큰 돌을 밑에 깔고 작은 돌을 위에 얹었다. 그리고 틈새에 작은 돌로 박아 넣었다. 그렇게 자연은 오묘한 조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측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 건물이 수덕사 대웅전과 닮은꼴임을 발견한다.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 극락보전 ⓒ 이종원
기둥과 들보를 훤히 드러내 보인다. 군더더기와 작위적 수법을 없애고 꼭 필요한 부재로 '無爲'를강조한다. 만약 저 깔끔한 벽에 '십우도' 가 그려져 있으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울까?

배홀림기둥을 어루만지고 정면으로 다시 돌아 나온다. 그러고 보니 정면 세칸 중 가운데 칸이 작다. 이것도 파격이다. 마당엔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괘대가 장식 없이 단아함을 보여준다. 단, 화려한 연꽃문양이 장식된 배례석이 마당 가운데 놓여있다. 이 배례석은 백제때 것이라는데. 그럼 절의 역사는 백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아미타 삼존불과 벽화들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 이종원
최완수 선생은 세종때 만든 아마타 삼존불을 무위사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말한다.

능숙한 조각솜씨와 초상에 가까운 사실적인 표현. 이는 세종의 문화절정기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명품이며 국보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가운데 아미타의 얼굴에서 세종의 얼굴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협시보살도 인자한 눈빛으로 중생을 내려다보고 있다. 뒷벽에 있는 아미타 삼존도 역시 두루마리 탱화가 아니라 흙벽에 그린 벽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란다. 부처님이 가장 놓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6인의 나한상이 부처님 위에 놓여있다.

삼존불 벽에는 수월관음도가 하늘을 날고 있으며 늙은 비구가 두 손을 벌리고 있다.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경고문도 무시한 채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누르게 된다.

선각대사 부도비 (보물 507호)

선각대사부도비
선각대사부도비 ⓒ 이종원
거대한 부도비가 절 좌측에 우뚝 솟아있다. 딱딱한 갑옷에 여의주를 문 채 코를 벌름거리며 용맹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진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무찌른 거북선은 이 귀부를 본 딴 것이 아닐까? 천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상처하나 나지 않는 비에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미륵석상

좌우 비례도 맞지 않고 가분수에다 얼굴도 참으로 못생겼다. 어찌 보면 놀부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툭 튀어난 눈구덩이에다 두터운 입술, 육계가 벙거지 모자처럼 보이는 미륵석상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바로 남도 땅의 민초의 얼굴이며, 구슬땀을 흘리는 하층민의 얼굴인 것이다.

그렇다. 부처는 잘 생기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이 땅의 고통을 함께 하는 민중의 얼굴이 아닐까? 그래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지.

무위사 미륵석상
무위사 미륵석상 ⓒ 이종원
장흥의 어느 논바닥에서 주워왔다고 하니 태생 역시 삶의 현장이었구먼.

오망졸망한 아이들이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나온 도우미의 설명을 듣는다. 선조의 미를 발견하고, 무위사를 보존하고, 이 땅을 지키는 책무를 가진 미래의 희망임을 발견하면서 무위사를 벗어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근무하는 '꿈의 혁명'님과 무위사 찻집에 그윽한 차를 음미해보고 강진다원으로 향한다.

무위사 가는길

서울서 갈려면 서해고속도로를타고 강진쪽 2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성전에서 829번 국도를 탄다. 그곳에서 10분거리. 광주에서 갈려면 영암까지 와서 829번 국도를 탄다. 대중교통은 강진에서 무위사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 6회 있다. 주차비와 입장료는 없다.

강진다원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강진차밭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강진차밭 ⓒ 이종원
무위사에서 조금 벗어나 월남사지로 가는 길에 강진 차밭이 펼쳐진다. 무려 10만평이란다. 보성차밭보다는 깊고 웅장한 맛은 없지만 월출산을 뒷배경을 두고 환상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밤에 오면 달빛이 차잎을 비출텐데. 이글거리는 뙤약볕에서 그걸 상상해본다.

다른 차밭과 다르게 이곳은 차밭 사이사이에 바람개비가 돈다. 서리를 막는 장치라는데. 우리 회사에서 먹는 태평양 녹차가 바로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앞으로 더욱 맛있게 먹어야지. 율포가 만들어낸 보성차 보다는 월출산이 만들어낸 강진차가 더 품위가 있지 않을까? 차밭에서 느끼는 매력이란? 융단처럼 굽이도는 부드러움이야 말로 절집의 처마선이며 어머니 버선의 코다. 난 한국의 미를 차밭에서 발견한다.

월남사 삼층석탑 (보물 298호)

월남사터 3층석탑
월남사터 3층석탑 ⓒ 이종원
강진다원에서 어떤 사람이 '경포대' 어떻게 가냐고 물어본다. 아니 이 남도땅에서 강릉 경포대를 물어보다니. 어이가 없어 쳐다보는데 옆에 동승한 '꿈의 혁명' 님이 "바로 저 앞입니다." 아! 이곳에도 경포대가 있구나. 월출산에서 계곡이 좋은 곳이 도갑사와 이곳 경포대 라고 한다. 월남사지는 바로 경포대 조금 지나 자리 잡고 있다.

혹시 월남사람이 만든 탑은 아닐까? 아니면 월남에서 온 김 상사가 돈 많이 벌어서 만든 탑이 아닐까? 정수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유치함 속에 월남사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억' 하는 단말마가 튀어 나온다. 세상에나 저런 멋진 탑이! 전형적인 백제탑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의 모습이다. 안내판에 고려시대에 만들었지만 백제의 양식을 이어받은 탑이고 전탑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다.

우선 탑의 규모에 놀란다. 높이 7.4 미터로 웅장함이 하늘을 찌른다. 백제탑의 특징인 1층의 몸돌이 유난히 길어 더욱 상승감이 돋보인다. 같은 땅에 신라의 삼층석탑과 이리도 차이가 날까? 지붕돌 아래 3단의 받침돌 중 가운데만 유일하게 각이 져있다. 왜 그랬을까?

월남사터는 월출산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 볼 수 있는 자리다. 월출산 기암괴석이 탑 사이로 보인다. 그런 좋은 위치라면 절 집의 규모는 의외로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절집을 농가에 내주었고 탑과 석비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절집마져 농민에게 내주어 부처님의 보시처럼 느껴져 이 탑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절 앞에 있는 농가의 돌 담장 사이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 피어 있다. 부처님의 은공에 보답하고자.

보물 313호인 진각국사 석비를 찾으러 마을을 헤맸다. 모두들 일터로 나가 있어 물어볼 사람 하나 없다. 흑흑. 다시 과수원 쪽으로 향했만 거기도 찾아낼 도리가 없다. 꿩 한마리가 후두둑 날아간다. 아쉬움을 달래며 꿩이 되어 도갑사로 향한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cafe.daum.net/mono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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