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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전경
ⓒ 독도수호대
2002 독도탐방. 독도경비대 위문과 독도탐방을 목적으로 하는 이번 독도탐방에 40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2박3일 일정으로 울릉도, 독도에 다녀왔다. 참으로 위험했던 독도서도 입도.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는 오늘, 그 3일간의 기록을 여기 적는다.

쉽지 않았을 사무국의 준비과정. 입도 30일 전에 제출해야 하는 입도신청서에 통보된 명단이 그대로 입도까지 가면 다행이련만, 희망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명단이 수시로 변동되어 그때마다 담당부서에 재통보해야 하는 절차의 난감함이 사무국이 져야 될 몫이었다. 나는 혼자였지만, 그들은 40명을 떠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독도로 향한 걸음은 시작되었다. 6월 28일 저녁 11시. 묵호항으로 가는 버스가 서울시청을 출발했다. 포항출항 예정이었던 것이 선박의 수리 관계로 묵호항에서 출항하게 된 것이다. 버스 안에는 사진촬영장비를 한아름 준비한 한국비경촬영단 소속 참가자들도 보인다. 그리고 특별한 대원 한 분. 고 김제의 열사의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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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교통사고로 우리의 곁을 떠난 김제의, 이미향 두 독도수호열사. 독도수호대 사이버국장을 지낸 김제의 열사는 그 뜻에 따라 독도 동도 정상부에 '유해'를 뿌렸기 때문에 이번에 어머님께서 아드님을 보고자 함께 한 길이었다. 또 한 분. 해병으로, 여군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셨던 문인순 할머님. 그는 해병 여군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였다는 산 증인이다. 이렇게 특별한 대원을 태운 버스는 어둠이 짙게 깔린 묵호에 다다랐다.

▲ 서도 답사도
아래왼쪽이 무너진 길이다.
ⓒ 김윤배
사진촬영단이 추암일출을 촬영하러 간 시간, 여관에 모인 몇몇이 사무국장의 눈길을 피해 맥주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독도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아침녘. 바다날씨가 잔잔하다. 오전 10시. 독도탐방대원을 실은 한겨레호가 울릉도를 향하여 힘차게 움직인다. 얼마를 잤을까? 오후 1시에 가까울 무렵, 한겨레호가 울릉도 도동항 선착장에 들어서고 있다. 각종 푯말을 들고 관광객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제는 눈에 익은 도동항의 모습이다.

한때는 3만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살았다는 울릉도. 지금은 1만명도 채 되지 않는다. 어업환경의 악화와 육지간 교통편, 각종 문화혜택의 낙후. 독도의 어머니섬인 울릉도의 현재는 결코 독도수호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독도를 현실적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울릉도 주민이며, 더 더욱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울릉도 주민임을 감안할 때, 독도의 든든한 후원자인 울릉도의 현 상황은 참으로 곤혹스럽다.

숙소에 짐을 풀고 첫 일정으로 독도박물관을 향했다.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망언하는 일본관리가 이곳을 찾아온다면, 나갈 때는 아마도 독도는 역사적으로 분명한 한국영토입니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명약관화한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는 국내 유일의 영토박물관. 내려오는 길 행여 육안으로 독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지만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보였다는 말에 발길을 돌렸다.

한켠에서는 사무국장님과 한송본 소장님이 독도의용수비대 추모공원조성을 위해 사전조사중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사람들. 그 업적에 비해 극단을 걷는 초라한 노년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박물관을 잃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또렷이 기억해야 한다.

▲ 서도 답사도 두번째
물골까지 예정되었지만, 중간에서 되돌아와 했다.
ⓒ 김윤배
저녁시간. 내수전에 위치한 마음 넉넉한 사장님이 계시는 물레방아에서 여럿이 모였다. 며칠 전에 국방부장관 표창을 받으셨다는 독도유일주민(?) 김성도 선장님도 계신다. 지난 1997년 독도 어민숙소 공사 때 배를 정박시키는 선가장을 훼손시키는 바람에 1997년 가을부터 현재까지 독도에 거주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울릉군 및 독도관련단체들의 꾸준한 문제제기로 선가장 복원예산이 편성되고, 올해 완공이 되면 올 가을부터 다시 독도에 거주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30일. 독도입도예정일이다. 새벽 5시부터 서두른다. 김제의 열사 어머님께서 바삐 움직이신다. 진행팀이 술을 준비하지 못했다기에 술을 준비하신다. 죽은 아들에게 줄 술을 준비하는 어머님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제의가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면 너는 남들처럼 돈도 벌어오지 못하느냐고 구박만 했는데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고기라도 먹여 보낼 건데…. " 어젯밤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히셨던 어머님. 비록 제의가 어머님 곁을 떠났지만, 그 빈자리를 우리 회원들이 부족하게나마 채워줄 것입니다.

아침 6시. 울릉도를 출발한 제89동해호는 12,3노트의 속력으로 사뭇 높아진 파도를 쏜살같이 가른다. 독도에 닿기 16해리 전. 어슴프레 독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배멀미를 하며 드러누운 대원들이 술렁인다.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댄다.

울릉도를 출발한 지 4시간 남짓. 40명의 대원을 실은 배는 오전 10시 무렵, 독도 동도 접안시설에 육중한 중장비가 기다리고 있는 독도에 도착하였다. 현재 진행중인 공사는 기존의 접안시설 보강공사로, 해양경비정이 접안할 때 접안시설 높이보다 갑판의 높이가 훨씬 높아, 경비대원들과 물품들이 오르내릴 때 위험하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한 공사라고 한다.

▲ 서도에서 본 동도
동도 접안시설 보강공사 중이다.
ⓒ 김윤배
동해호가 접안하자, 독도경비대에게 줄 3박스 분량의 책과 함께 대원들이 동도에 발을 내딛는다. 행사를 주최한 사무국에서는 회원과 함께 경비대에게 줄 책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위문품이 아니었다. 사무국 임의로 위문품 품목을 결정하는 대신, 독도경비대장과 직접 통화를 거쳐 "경비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봤고, 그에 대한 답변이 책이었던 것이다.

어젯밤 숙소에서 김점구 사무국장이 책을 한권 한권 확인하면서, 혹시 몇 부로 되어 있는 책의 경우, 중간에 빠져 있지 않았는가 세심히 검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론 사무국에서 구입하여 준비하기도 했지만, 회원들로부터 전달받는 과정에서 빠질 경우가 있기 때문이리라. 사무국의 세심한 배려. 외지인의 시각으로 울릉도, 독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보다 생존의 터전으로, 혹은 생활의 공간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독도는 우리 곁에 더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동도에 입도한 대원들이 경비대원과 인사를 나눌 무렵, 4명의 대원은 독도 서도 가파른 언덕에 발을 내딛었다. 향후 연구조사를 위한 기초조사의 성격으로 이루어진 서도 입도이다. 어민숙소를 향해 몇십 미터 갔을까? 암벽을 둘러싸고 있는 길이 끊어져 있다. 긴장이 밀려온다. 밧줄을 이용하여 겨우 길을 확보하고 나서야 어민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어민숙소 내에 죽어있는 갈매기
수백의 살아있는 갈매기, 수백의 죽어있는 갈매기. 독도는 생명과 죽음의 섬이었다.
ⓒ 김윤배
1997년 11월 21일 준공. 수용인원 25명. 재산가액 4억8천만원. 철근 콘크리트 슬라브 2층 건물. 10kW 자가발전기 1대. 육중한 어민숙소 대신 우리를 처음 반긴 것은 죽은 갈매기들이다. 1층 입구부터 방마다 죽어 있는 갈매기들. 족히 오십 마리 이상은 될 것 같다. 2층에는 냉장고와 수세식 화장실도 보인다. 방에는 사람이 잔 흔적도 보이며, 한켠에는 일회용 가스가 박스에 가득 담겨진 채 방치되어 있다.

과연 이 건물이 어민을 위한 숙소인지, 아니면 관광객을 위한 숙소인지 혹은 대피용 어민숙소인지, 아니면 거주용 어민숙소인지 의문이 생긴다. 어민에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건물구조. 비좁은 출입구. 어구라도 손질할라치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구조이다.

김성도 선장님도 지적했지만, 도대체 큰 발전기를 들여다 놓으면 기름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또한 난방구조도 중앙난방구조라고 한다. 크게 손질해야 그나마 쓸 수 있다던 어민숙소. 현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그야말로 행정편의주의의 결정판이다.

어민숙소 뒤로 7,80도는 돼 보임직한 가파른 콘크리이트 계단이 이어진다. 이 계단은 김성도 선장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998개라고 한다. 그야말로 독도 최대의 난공사였으리라. 편부경 대원의 가녀린 외침이 이어진다. "제의야! 미향아!"

계단 사이로 무성하게 자란 풀, 계단 곳곳마다 죽어 있는 어린 갈매기들. 밧줄에 겨우 의지하고 가파른 계단을 한칸 한칸 오른다. 앞서 가는 한송본 소장님은 줄자로 계단의 거리를 잰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잠시 숨을 돌린다. 여기저기 이름모를 야생화들. 그렇게 20여분을 올랐을까? 동도 높이쯤 이르렀을 때 약간은 편평한 길이 서도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한눈에 펼쳐지는 건너편 동도와 그리고 독도를 둘러싼 바다. 참으로 장관이다.

서도 정상부로 이어지는 길. 여기저기 굶어죽었을 갈매기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살아 있는 수백 마리의 갈매기와 죽은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 죽음과 생명의 땅이다.

▲ 울릉도 도동항 공원에서 열린 한국-터키 월드컵 응원전
3-2로 아쉽게 졌지만, 잘 싸웠다. 대~한민국.
ⓒ 김윤배
철수예정시간이 1시간 남은 11시경. 서도 정상부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몰골까지의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이번 서도입도의 중요 이유 중의 하나가 물골 조사와 물골에 고여 있는 식수의 수질검사를 위한 채수였기에 또 한번 가파른 곡예를 시도해야 한다. 물은 생명의 지표이며, 또한 독도가 살아 있으며,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섬임을 의미한다. 이 물을 떠다가 '이래도 독도가 암초냐?'라고 무성의한 정부에게 항의하고 싶었던 한송본 소장님.

정상부에서 물골로 내려가는 계단은 간혹 여기가 계단이었다는 흔적만 띄엄띄엄 남아 있을 뿐, 흙과 나뭇잎들이 무성히 덮여 있어 계단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이름은 모르겠지만 마치 수수대 처럼 생긴, 사람 키만큼이나 자란 식물들이 빽빽이 자리를 차지해 한발 한발 내딛기가 쉽지 않다. 80도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경사. 이러다 굴러떨어지는 건 아닌가? 공포감이 확 밀려온다. 얼마를 내려갔을까?

시간이 아쉽다. 처음 서도 입도라 예상치 못한 환경이 결코 만만치 않다. 결국 물골가는 길을 접고 오던 길을 택해야 했다. 거의 탈진한 상태로 어민숙소로 되돌아왔을 때 바지가 한뼘이나 찢어져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생명과 죽음의 독도 서도를 뒤로 하고 다시 동해호에 올랐다. 2시간 남짓한 독도입도. '나의 눈으로가 아닌 그들의 눈으로 독도를 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밀려온다. 갈매기의 눈으로, 야생화의 눈으로, 독도주민의 눈으로 말이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참으로 놀랄 만한 뉴스가 우리를 기다린다. 서해교전. "아니다. 이건 아니어야 한다"며 고개를 흔들어보지만 현실이 안타깝다. 교전으로 사망한 젊은 청년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 서도 중턱의 비교적 완만한 계단들
ⓒ 김윤배
저녁. 도동항 공터에는 붉은 물결로 넘실된다. 'Be the Reds'. 우리와 터키의 3-4위전이다. 서울시청 앞의 열기에 부족함이 없이 월드컵의 열기는 울릉도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서해교전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분단의 아픔이 언제까지 우리를 짓누를 것인가?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

다음날 오전 울릉도 일주관광. 그리고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방문. 앉은 의자가 회장님의 자리가 아니라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 동지회의 현재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리고 울릉도를 떠나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포항항. 피곤하지만 참 많은 것을 느끼고 왔을 40명의 대원들은 그렇게 2002독도탐방을 마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독도수호대 www.tokd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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