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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미군이 한국의 여자와 강요된 성관계를 맺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곧 만행의 조작, 폭로이며 한미 유대를 이간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또 일부 가난한 사람들의 참상을 소설의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계급의식을 조장했다고 한다면 바로 그런 사고와 판단이야말로 또 하나의 잠재적인 계급의식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군에서 제대한 주인공이 실직 상태에 허덕이는 대목이 있다 해서 군 복무를 모독한 것으로 보거나 6.25를 돌연한 충돌이라고 썼다고 해서 남침을 은폐하여 반공의식을 해이시켰다는 따위의 견해는 실로 상식을 일탈한 억설이 아닐 수 없다."(한승헌/변호사, 전 감사원장)

그러니까 그 희한한 사건(?)이 터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40여년 전의 일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필화 사건이 터진 그 해. 그랬다. 당시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친미 이데올로기란 회오리 바람이 한반도 전역을 달구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한 <분지>가 본인도 모르게 북한의 잡지에 게재되고 만 것이었다. 미끼를 던져 주어도 아예 미끼 통째로 던져 주고 말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반공법 4조(고무, 동조, 찬양)의 구성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헌법 제19조(예술의 자유 보장)와 국제 인권 선언 제27조에도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소련에서도 `에렌부르쿠'의 해방 문학이 용허되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이만한 문학이 탄압을 받는다면 세계적으로 자유 국가의 체면을 해칠 염려가 있으며 이 작품이 반공법에 저촉된다면 작가들의 창작 활동이 위축되어 안이한 도색문학에 흐를 우려가 있다. 법적으로 무죄다."(이항년/법학자, 변호사)

이러한 수많은 변호사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작가 남정현 선생은 우리 나라 최초로 일어난 필화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구속되었다. 죄명은 말그대로 반공법 위반이었다. 이 사건은 결국 1967년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고 끝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작가 남정현 선생은 1974년 4월에 다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구속 되었다가 긴급조치 해제로 다시 석방되었다. 참으로 작가로서는 파란만장한 삶이 아니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 최초의 필화 사건이 터진 그 해(1965년)는 한반도 전역에 살얼음이 얼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 살얼음 판을 조심 또 조심하며 걸었다. 그런데 그만 남정현 선생이 그 살얼음판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랬다. 그 해는 한일협정 반대 투쟁, 월남 파병, 반정부 쿠데타 음모, 박정희의 방미, 조기 방학, 위수령 발동, 공화당 내 항명 파동 등으로 쿠데타 정권의 운명이 걸린 한 해였다.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는 부당한 세력들은 으레 자신들의 지배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현실을 교묘하게 위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흉계가 드러나지 않게끔 쉼없이 진실을 날조하고 은폐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 은폐된 진실을 찾아내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감행되는 현실과의 치열한 싸움이다."(남정현)

그랬다. 그 새빨간(?), 북조선을 이롭게 할 목적(?)의 그 작품 <분지>는 1987년 10월이 되어서야 겨우 세상에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다.
 
"<분지>는 분명히 그의 문학에 '민족'이라는 값진 관형사를 달게 한 이정표가 되었다. <분지>는 우리가 진작부터 마땅히 극복해야 할, 그러면서 극복할 의지 없이 마냥 안주해 왔던 외세의존적 현실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김병걸)

<분지>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한반도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속국이 되어버린 똥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는 오로지 제 자신의 배만 불리기 위해 간사함과 아첨 등이 넘쳐나는 오물 묻은 땅이며, 힘의 논리대로 한반도를 사이 좋게 나눠 가진 미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더러운 땅으로 그려내고 있다.

40여년 전,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38년 전인 6월 28일에는 흑백 사진 속의 일이 실제로 있었다. 이제부터는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쉬이 잊어버리지 말자. 다시는 이렇게 불행한 사건이 터지지 않게.

덧붙이는 글 | 남정현 선생은 193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서산 농림고교를 졸업한 뒤에 <자유문학>에 '경고구역''굴뚝 밑의 유산'등을 추천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주요 저서로는 <분지> <허허선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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