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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보통, 역사의 흐름 속에 점점이 박혀있는 거대한 영웅들이나 사건의 '점'에 의해 이루어진다. 역사의 흐름 속에 불연속적으로 산재해있는 그런 점들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이음으로써 우리의 의식 속에 '역사'라는 관념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에 의존하는 우리의 '역사 관념'은 앞으로 펼쳐질 역사의 흐름 역시도 그러할 것이라고 단정하게 만든다. 언제가 등장할 불연속적인 '점'들이 앞으로의 역사를 형성해 나갈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는 '빛'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라는 불연속적인 특성과 '파동'이라는 연속적인 특성을 동시에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해내었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는 불연속적인 '점'들의 집합체이기도 하고 동시에 연속적인 '파동'이기도 하다. 그것은 '영웅'이나 '사건'과 같은 '점'들의 모임이기도 하고, 그저 계속 살아갈뿐인 '사람들'의 파동이기도 한 것이다.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은 그런 '파동'으로써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네이팜탄 공격으로 불타는 마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베트콩 소녀. 권위적인 정부와 학교 당국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선 파리 시민들. 베트남으로 출격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 항공모함의 사세보 항 정박을 저지하려는 일본 학생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꿈꾸며 또 다른 '봄'을 기다리던 프라하 시민들. 자신은 '검둥이'가 아니라 한 '인간'일뿐임을 올림픽 메달 수여 단상에서 주먹과 침묵으로 항의하는 흑인 선수들. 자신들을 억압하는 남성적 성(性)구조에 저항하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여성들.

거기에는 영웅도, 거창한 이데올로기도 없었다. 그저 '분노'하고 '이의제기'하며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영웅심리를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어떤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투철하게 무장되어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직접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무언가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부조리에 대해 '이의제기'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인간으로서 갖는 가장 본질적인 무엇이었을 뿐이었다.

베트콩과 총을 맞겨누고 있는 미군 흑인 병사. 그의 전쟁은 여기서 끝인가? 아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의 위에 존재하는 모든 백인들과 또 다른 '일상의 전쟁'을 벌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다른 남성들과 함께 '전쟁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한 여성. 그녀의 투쟁은 여기서 끝인가? 아니다. 그녀는, 그리고 그녀 아닌 또다른 '그녀들은' 같은 투쟁 공동체 내에서조차 남성들로부터 배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투쟁은 누구를 위한 투쟁인가.

이같은 부조리에 대해 그들은 그저 한 '인간'으로써 '이의제기'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사람들'의 파동이 또 다른 형태의 역사를 만들어내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을 통해, 1968년을 기점으로 하는 구좌파와 '신좌파'의 구별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는 1968년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부터 그런 '신좌파'적인 요소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파동의 역사' 앞에서는 '신좌파'라는 범주 또한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인간 존재를 '규정의 틀'에 가두어 버리고 단절시키는 '신좌파'나 '구좌파' 같은 '관념의 범주' 들을 넘어서는, 보다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당시의 사람들을 움직였을 뿐이니까 말이다.

1968년 이후로 3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갔지만, 아직도 부조리는 계속되고 있다. 아니,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그런 부조리들은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그런 부조리들을 치유하기 위한 소위 '좌파적' 움직임들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은, 정작 중요한 것은 '좌파'라는 '관념' 따위가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보다 본질적인 '좌파'라고 이야기한다. 혁명적 영웅, 거대한 이데올로기 등이 아닌 가장 근원적인 인간으로써의 '좌파'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반드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가진 사람만이 '좌파'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좌파'의 관념 범주에 속해있는 사람만이 현실의 부조리들을 발견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어진 현실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려 하고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에 대해 '분노'할 수 있다면. 그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가장 본질적인 '좌파'인 것이다. '좌파'라는 관념의 틀을 뛰어넘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로서의 '좌파'말이다.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수잔 앨리스 왓킨스 외 지음, 안찬수 외 옮김, 삼인(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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