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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 다녀오고 또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가서 오지 않는 날들처럼 가서 오지 않는 마음도 있습니다.
애련(哀戀).

녹생리 3병동. 그곳엔 뭉클한 삶의 애환들이 있다.
319방에는 진 아주머니가 혼자 사신다.
어느 날 아주머니께서 서랍 정리를 하시다가 편지 묶음 한 뭉치와 큼직큼직하게 쓰여 있는 서투른 볼펜 글씨의 양면지 한 다발을 내게 보여주셨다.

빛 바랜 낡은 편지 묶음은 숨겨진 지난 세월의 한 덩이 애달픔처럼 내 시선에 들어왔다.
아주머니의 허락을 얻어 편지묶음을 끌러 보았다.
그것은 몇 년 전 아주머니가 신생리 독신사에 계실 때 이웃에 사시던, 지금은 정착지에 나가 있는 어느 아저씨로부터 온 편지들이었다.
편지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모아진 것이었다. 그 아저씨의 간곡한 호소와 기다림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모아져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여생, 뭐 꺼릴 것이 있겠소.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어깨 기대고 삽시다."
"이곳에 올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겠소."
"올 겨울 나고 새 봄에는 여기서 만납시다."

그리고 맨 나중에 온 것으로 보이는 몇 통의 편지가 있었다.
첫 번째 도착한 편지로부터 1, 2년이 지난 후의 것이었다.

"당신과 닮은 여인과 함께 살기로 했소. 당신을 너무 빼어 닮아 당신인 양 느끼며 살아가겠소. 늘 건강하시오. 어려운 일 있으면 주저 말고 연락 주시오."

한 남성의 너무나 아름답고 아픈 기다림의 사연이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주머니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왜 그 아저씨께 가지 않으셨어요?"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주머니는 섬에 오기 전 결혼해서 세 자녀를 두고 있었단다. 소록도에 들어온 후 남편은 세 자녀를 데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했는데, 비록 떨어져 있지만 자식을 놔둔 채 어떻게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식들 이름을 하염없이 부르고 계셨다.
(김영선 '사슴 섬 간호일기 1996' 중에서)

얼굴 가리고 떠돌던 시인 또한 병으로 뭉그러진 얼굴보다 애련에 가슴 미어진 아픔이 더 컸을 테지요.

눈 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기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 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양 걸음걸이 몸맵시하며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입술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보지?....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한하운, '여인' 全文)

문득 소록도와는 무관한 백석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요.

女僧은 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 졌다

平安道의 어늬 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女人의 머리 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여승' 전문)

애련(哀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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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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