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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전교조와 함께 지난 89년 발생한 '부산 동의대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것을 두고 이 사건의 당사자의 한 축인 경찰을 비롯해 보수언론들이 연일 이같은 결정에 대해 맹공을 퍼붓고 있다.

어떤 신문은 '실정법 위반이 민주화인가?' '불을 지른 게 민주화운동이면 불타 죽은 경찰은 매국노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 어떤 신문은 연일 사회면을 도배질하다시피 하고 있고 또 다른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이제라도 보상위원회는 잘못된 결정을 자진 철회, 재론하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사건 발생 당시와 오늘 시점의 상황을 두루 살펴야 한다. 범법자가 민주화유공자가 될 수 없다면 이는 일제하 강도, 살인범 등의 죄목으로 형을 산 독립운동가들이 정부포상을 받을 수 없다는 식의 얘기도 성립된다.

<오마이뉴스>는 부산 동의대사건 당시 피해자와 그 유족, 변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새로 제기된 '의혹'들을 밝혀 이 사건을 원점에서 다시 재조사할 것을 요구한다. 그 길만이 죄값을 치른 학생들, 사건 당시 현장에서 희생된 경찰관 모두의 명예를 살리는 길이라고 본다. 아울러 이같은 의견에 대해 반론이 있을 경우 가감없이 게재할 것임을 밝혀둔다.<편집자 주>


▲사고 직후 동의대생들이 도서관 건물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는 모습.
"불이 어떻게 났는지 아직까지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죽은 7명의 경찰을 위해서라도 화재원인은 밝혀져야 한다. 이번 '민주화운동' 인정을 계기로 진상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89년 동의대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5.3동지회' 이준경 회장의 말이다. 그는 "최근 민주화운동 인정과 관련한 보도를 하면서도 '신나를 뿌렸다'고 오보를 일삼는 언론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질로 잡고 있던 전경의 옷을 벗겨 신나를 뿌리고 인질경찰을 분신시켰다."(<조선일보> 1989년 5월 4일자). "학생들이 신나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온몸에 2~3도의 화상을 입어 달아날 곳이 없어 창틀에 매달린 경찰 두 명을 학생들이 손등을 밟아 추락했다."(같은 날짜 <대구매일신문>). "카페트가 타면서 발산하는 유독가스로 숨이 막힌 조 순경 등은 다시 문을 열고 나오려 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아 창유리를 깨고 20여 미터 아래 매트리스를 향해 뛰어 내렸다."(같은 날짜 <한국일보>).

<조선일보> 보도는 오보였다. 사고 하루 전날 인질로 잡혀 있었던 전경 5명은 모두 도서관 옥상에서 무사히 풀려났다. '전경의 옷을 벗겨 신나를 뿌리고 인질경찰을 분신시켰다'는 보도는 한마디로 말해 '사실과 전혀 무관한, 터무니없는 보도'였다.

<대구매일신문> 보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법정에서도 밝혀졌지만, 학생들은 모두 옥상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사건 현장인 7층에는 한 명도 없었다. '학생들이 창틀에 매달린 경찰의 손등을 밟았다'는 내용은 오보다.

<한국일보>의 보도는 사실이었나? 정답은 '아니다'. 화재 현장에는 카페트가 없었다. 경찰이 떨어질 당시 매트리스도 한 장 깔려 있지 않았다.

▲ '민주화운동'으로 인정을 받은 뒤 29일 오후 부산인권센터 사무실에 모여 '5.3동지회' 회원들이 진상규명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이처럼 당시 상당수 언론들은 동의대생들을 '살인마' 깡패집단' '폭력배'로 몰았다. 올해로 사건 13년째를 맞아 진상규명 목소리가 높다. 동의대 후배들은 해마다 '5.3 정신 계승 마라톤 대회'를 열고 있을 뿐, 이렇다 할만한 진상규명 노력이 없다. 최근 국무총리실 산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되면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대규모 학생들이 구속되고 제적까지 당했다. 당시 학생 변호는 변호인단이 꾸려져 활동했다. 대표적으로 문재인 변호사가 맡았으며, 공동변호인단에는 민주당 대선 후보인 노무현 변호사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사건에 대해 대표적으로 문 변호사를 만나 진상규명 필요성 등에 대해 입장을 들어 보았다.

또 동의대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당시 부산진경찰서 정보과장을 만나 상황을 들어 보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당사자라 판단되었다. 현직 경찰서장으로 있는 점을 감안해 실명과 직책을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 부산진경찰서장(현재 부산의 한 기업체 고문)은 정년퇴직을 했는데, 동의대사건의 진상규명에 대해 물어 보았으나 29일 오후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 없다. 만날 필요도 없다. 대법원 판결까지 나오지 않았나"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부산 동의대 사건이란

* 시대 배경 = 당시 노태우 정권은 '중간평가 국민투표' 요구에 직면해 있었다. 89년 1월 현대중공업 노동자에 대한 식칼 테러 사건이 일어났으며, 3월 13일 여의도 전국농민대회 봉쇄와 서울지하철 파업 현장의 진압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극히 나빴다. 3월 고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으며, 이후 공안합동수사본부가 발족되면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당시 부산 대학가는 학생과 경찰 간의 긴장감이 팽팽했다. 4월 부산교대 이경현 군이 경찰의 방패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졌고, 동아대에서 학원정찰소가 발견되기도 했다. 5.3사건 이후 사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으며, 그 해 6월 "화염병 사용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민주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 사고 직전까지 상황 = 5월 1일 동의대 도서관 앞에서 "4.30 노동자 집회 원천 봉쇄 규탄과 메이데이 기념집회"가 있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학교에서 1km 가량 떨어진 가야1파출소 앞까지 시위를 벌였다.

돌아오는 길에 10여 명의 학생들이 가야3파출소로 달려가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려 했고, 다른 학생들이 그 학생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 때 파출소 소장이 칼빈총을 들고나와 한 발을 쏘았다. 학생들이 놀라 도망가자 파출소장은 달려가면서 10여 발을 쏜 것이다.

5월 2일 오후부터 학생 100여 명은 파출소장의 총기난사에 항의하며 학교앞 삼거리까지 시위를 벌였고, 도서관에서 농성을 벌였다. 당시 교내에 있던 사복경찰 1명과 시위 과정에서 붙잡은 사복경찰 4명을 학생들이 붙잡아 두었고, 경찰은 시위 학생 8명을 연행했다.

경찰과 학생들은 연행 학생과 인질 경찰의 교환 문제를 논의했지만, 별다른 성사를 보이지 못했다. 도서관 4층에서 농성을 하던 학생들은 이날 밤 장소를 7층으로 옮겼다. 5월 2일 밤 10시경 학생들은 책걸상으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만일의 경찰 진입에 대비했다. 총장 등 학교 당국은 3일 새벽 4시30분경 총학생회측과 논의를 벌였으나 결론을 맺지 못했다. 급기야 새벽 5시경 전경들이 진압에 나섰고, 5시20분경 '사람 살려'라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 어떤 피해를 입었나 = 화재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동의대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너무나 컸다. 7명의 경찰이 죽었다. 그 가운데 4명은 추락사였다. 경찰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10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어, 그 중 76명이 구속 기소되었으며, 학생 3명이 사형 구형까지 받았다.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으며 학생 31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81명의 학생들이 제적되었으며, 학교는 한 학기 동안 휴교했다. 제적 학생들은 사면복권되면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업을 마쳤다. 당시 사고로 죽은 경찰은 대전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혹들

* 의혹1 - 화재 원인 = 왜 불이 났는가? 이 물음에 대해 아직까지 명확한 답은 없다. 죽은 경찰관을 위해서도 화재원인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당시 학생들은 몇몇 언론과 공권력으로부터 '불을 낸 사람'으로 지목 받았다.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 학생들은 옥상으로 달아났는데, 한 학생이 전경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다. 당시 경찰,검찰은 "화염병의 불길이 유류에 닿아 불이 난 것"이라고 발표했다. 2심 재판 때 모형실험을 통해서는 '유증기 현상'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유증기 현상'이란 밀폐된 공간에서 불의 열기와 유류의 기포가 융합해 일시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5.3동지회' 회원들은 지금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5.3동지회' 김정호 사무국장은 "전경들의 법정 증언에서도 밝혀졌지만, 7층에 던져진 하나의 화염병은 불길이 거의 사라질 순간에 불이 났다. 유리창이 깨지고 문도 열려 있었기에 밀폐된 공간도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화재원인에 대해 '5.3동지회'는 '제3의 원인'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이준경 회장은 "진압 경찰의 실수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화재일 수 있다. 당시 시경 기동대에서 사용한 진압장비를 자세히 밝히지 않았는데, 최루탄과 사과탄 이외에 폭발성이 있는 진압 품목을 사용해서 재실험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재판과정에서 언급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당시 사건 변호를 맡았던 문재인 변호사는 밝혀지지 않은 화재원인에 명확한 입장을 보였다.

"전경들이 법정 증언에서도 밝혔지만, 바닥에 물과 같은 액체가 있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석유를 바닥에 뿌렸을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화염병은 석유가 있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데서 불이 났고, 거의 사라지는 것을 경찰도 보았다고 했다. 신나와 석유가 들어 있는 화염병을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깨뜨리거나 넘어뜨릴 가능성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책임이 없고,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은 경찰에 그 책임이 있다."

▲ 당시 학생 변호를 맡았던 문재인 변호사. ⓒ 오마이뉴스 윤성효
"고층 건물의 시위대를 진압할 때는 조가 편성된다. 먼저 문을 여는 조가 있고, 이어 소화기를 휴대한 조가 뒤따르고, 맨 뒤에 수색조가 선다. 4~5층까지는 이 조건이 어느 정도 지켜진 모양이다. 그런데 7층에 도달했을 때는 수색조가 먼저 들어갔고, 소화기를 든 조는 뒤에 도착했지만 소화액을 아래층에서 다 써버리는 바람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화액을 준비한 뒤에 진압해야 하는데, 경찰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학생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화재원인에 대해 당시 부산진경찰서 정보과장 김아무개 씨는 "대법원에서도 밝혀진 일이다. 실험까지 하지 않았나.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이 터지면서 불이 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 의혹2 - 선무방송,안전시설 유무 = '5.3동지회'는 화재원인 뿐만 아니라 '선무방송'을 하지도 않고 진압을 했으며, 안전시설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면서, '의도된 진압'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 동생인 오태봉 씨가 동의대사건으로 구속되자 진상규명을 위해 자료 수집 등에 나섰던 오태열 목사. ⓒ 오마이뉴스 윤성효
'선무방송'이란 시위대의 진압에 앞서 경고방송을 통해 자진 해산을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5.3동지회' 오태봉 씨는 "새벽 5시경에 경찰이 들이닥쳤는데, 통상적으로 학교측에 요청하거나 사전허가를 받았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추락 등에 대비해 매트리스나 그물 등을 설치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부산진경찰서 정보과장이었던 김아무개 씨는 "선무방송은 안할 수도 있다. 시위자들이 피하도록 출구를 열어 주는 쪽으로 진압을 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또 "도서관 정문 반대편의 창문에서 전경들이 추락사했는데, 그 곳은 절벽으로 매트리스를 설치할 공간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전경들이 떨어진 뒤에 매트리스 등을 설치했다. 절벽이라 설치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찰은 시위대의 진압에 있어, 특히 고층 건물의 진압에는 안전수칙을 지켜야 하는데 이를 어겼다. 한 학생은 매트리스를 받아 목숨을 구했는데, 먼저 떨어진 전경들은 매트리스가 없는 데서 떨어졌다. 도서관 정문에 매트리스며 그물을 쌓아 두고 있었는데, 왜 늦게 사용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또 '5.3동지회'는 "사고 하루 전날 인질로 잡혀 있었던 5명의 경찰을 풀어줄 것을 약속했는데도 경찰이 새벽에 무리하게 진압을 시도했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당시 총학생회 회장이었던 이종현 씨는 "경찰서 담당자와 약속하기를 3일 오후 2시까지 인질경찰들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왜 진압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부산진경찰서 정보과장이었던 김아무개 씨는 "시한을 두었지만 3일 2시까지 석방하는 결정을 학생회장이 혼자 할 수 없었고, 내부적으로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못 믿을 상황이라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전경 대원들은 무리한 진압이라며, 경찰서 내에서 집단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시위 현장에 대한 무리한 진압 때문에 동료 대원들이 죽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공동변호인단도 경찰 책임자에 대해 '무모한 작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고소했다. 이 책임은 경찰 내부적으로만 문제가 되었고, 검찰은 변호인단의 고소에 대해 무혐의 처리했다.

* 의혹3 - 최초 현장감식자료, 고문 = 사고 직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자료는 현재 없다. '5.3동지회'에서는 사고 직후인 오전 10시경 치안본부에서 현장 감식을 했다면서, 관련 자료의 공개를 요구했다. '5.3동지회' 이준경 회장은 "당시 재판 과정에서도 요구했지만, 검찰은 공개를 하지 않았다. 첫 현장 감식을 부산시경에서 했는데, 사진도 찍었다. 현장에 있었던 증거물들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화인감정에 참여했던 김정곤 교수(부경대, 정년퇴임)는 치안본부가 현장 감식한 이후였다. 김 교수는 "처음에 화인감정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뒤에 참여를 했다. 학생들을 잡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경찰이 불을 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결론은 유류에 의한 화재라는 사실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 연행 학생들을 고문했다고 밝힌 한 경찰관의 진술서.
사고 이후 연행되었던 학생들이 수사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당시 부산진경찰서 정보과에서 동의대생 오태봉 씨를 담당했던 한 형사의 자술서에서도 밝혀졌다.

양아무개 씨는 자술서에서 '약간의 구타' 사실을 인정하면서 "조사 요령은 미리 경찰(검찰)에서 조사설문서를 작성 배포한데 따라 그 항목대로 조사했다"라고 밝혔다. 양 씨는 경찰직을 그만 둔 뒤 범죄행위로 구속되어 오 씨와 같은 교도소에 있으면서, 진술서를 써 준 것이다.

오태봉 씨의 형인 오태열 목사(사천 중앙교회)는 "당시 진술서는 경찰이 조사를 하면서 고문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갖고 있던 진술서를 내보이기도 했다.

* 민주화운동 인정과 논란 = 국무총리실 산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이하 위원회, 위원장 조준희)는 4월 27일 부산 동의대사건 관련자 46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위원회 산하 분과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한 안건을 위원회에서 논의 끝에 찬성 5명, 반대 3명, 기권 1명으로 통과시켰다.

위원회는 사건 경위에 대해, "노태우 정권의 노동자, 학생시위 강경 진압 등에 항의할 목적으로 가두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시위 학생 중 일부가 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하자 경찰이 총기를 사용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학생을 연행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동의대사건이 일어났던 원인을 경찰이 제공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위원회의 다수 의견은 "사상자가 생기고 방화치사상 등 유죄 판결이 내렸지만, 해당자들이 살인의 고의가 없었고 중대 결과가 발생하리라고 확실하게 예견할 수 있었던 사정도 아니었으며, 통상의 시위방식에 따라 화염병을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소수는 "방화치사상 행위에 대한 확정 판결이 재심절차에 의하여 취소된 바 없고, 적어도 방화치사상 행위에 적극 가담하여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들까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대 입장을 냈다.

▲ 사고 후 대학 내에 전경이 배치되어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
동의대 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조선일보>(4월 30일자 사회면)는 "찜찜한 표차"라는 제목으로, "이번 심의위원회가 철저한 비공개를 통해 이뤄진 점"을 제기하며 경찰과 유가족의 반응을 부각시켜 민주화에 대한 부정적인 논조를 내고 있다.

행정자치부와 경찰청 등의 사이트에도 '법적 정당성 훼손' '경찰의 사기저하' 등을 주장하는 글들이 올라오는가 하면, '정당하고 바람직한 결정'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부산진경찰서 정보과장이었던 김아무개 서장도 29일 오전 이에 대해 물었을 때, "심사위원들이 내용을 어느 정도 알았는지 모르지만, 과연 민주화 운동에 도움이 되었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 경찰 사기가 문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산지역 인권 단체와 '5.3동지회' 관계자들은 "화합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면서, "매년 유가족과 1년에 두 번씩 만나고 있다. 민주화운동 인정 문제는 화합의 차원에서 보아야 하고, 이를 계기로 원인 규명을 위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의 분과위원회에서는 동의대 사건을 인정하는데 만장일치로 통과했다"면서, "당시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있었고 재판도 있었지만 진상규명을 하는 데는 미흡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원인 규명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동의대사건 일지>

* 89년 5월 1일, 도서관 앞 집회. 가야1파출소까지 평화시위. 가야3파출소 항의하자 파출소장이 칼빈총 10여발 발사.
* 89년 5월 2일, 도서관에서 경찰 총기난사에 대해 항의농성. 학생들은 사복경찰 5명을 붙잡고 경찰은 학생 8명을 체포. 도서관 4층에서 7층으로 농성 계속.
* 89년 5월 3일, 새벽 5시 전경들 도서관 진입 후 화재.
* 89년 5월 5일, 휴교령.
* 89년 6월 1일, 검찰 수사결과 발표 후 대량 구속 기소.
* 89년 9월24일, 1심 공판. 기소유예 이외 선고자 31명 항소.
* 90년 2월 2일, 2심 공판 때 화재 원인에 대해 현장축소 모형실험.
* 90년 2월21일, 항소심 선고 공판. 7명 집행유예로 석방.
* 90년 6월26일, 대법원 확정 판결.
* 02년 4월27일, 민주화운동 인정.
'5.3동지회' 이준경 회장은 "당시 재판부도 '학생들은 신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그런데도 지금도 일부 언론은 '신나를 사용해'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살인을 저지른 자들을 민주화운동으로 보상시켜 주냐'고 주장한다. 자꾸만 왜곡된 기억들을 들추는 언론을 위해서도 진상규명을 꼭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5.3동지회'는 앞으로 화재 원인에 대한 진상규명 뿐만 아니라 재심 청구를 계획하고 있다. '5.3동지회'는 13주년이 되는 오는 3일 오후 1시 동의대에서 "5.3항쟁 13주년 기념식"과 함께 민주화운동 인정에 관한 공식 입장을 밝히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준경 회장은 "학생들이 신나를 뿌렸다고 보도한 조선일보에 대해 정정보도 청구와 함께 언론중재위원회에 이를 제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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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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