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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시대, 목요초대석 등의 방송에 출연하여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한국 최고의 여성 곡예사 김영희(43 동춘서커스단) 씨가 오는 4월 14일 김오철 씨와 화촉을 밝힌다.

공중 큰 그네타기와 의자탑 쌓기, 동물묘기 등, 다양한 재주를 구사하는 김영희(본명 차영희) 곡예사는 인생 그 자체도 '곡예 같은 삶'을 살아왔다. 지난 91년 봄, 공연관계로 지금의 남편 김오철 씨를 만나 보금자리를 꾸몄지만, 순회 공연의 특성상 한가한 날을 기다리다가 11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후에 면사포를 쓰는 처지가 된 것이다.

최근,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아들 상현(11세) 군이 "부모님의 결혼사진이 없다"며 물어와 "서둘러 결혼식을 준비 했다"는 김영희 씨는 지난 3월 16일부터 시작한 논산공연의 흥행실패로 인해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공연이 없을 때를 맞춰 결혼식 일정을 잡았는데, 공연이 조기에 종료되면서 예정된 결혼 일시가 다음 공연과 중복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저의 인생이 늘 그렇습니다. 곡예처럼 아슬아슬 해요,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어렵게 잡은 결혼식을 연기 할 수는 없잖아요"

김영희 곡예사는 가난에 떠밀리다시피해서 서커스에 입문한 전형적인 한국 곡예사 이다. 40여 년 가까운 세월을 서커스에 몸 담아 온 그의 인생역정은 '한국서커스의 과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의 딸이었다. 그러나 6세때, 아버지의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부모님을 따라 부산 구포에 이사를 간 후, 형편이 더 어려워지자 남의 집으로 맡겨지게 된 것이 서커스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 이집 저집을 전전하다 서커스 관련자와 연이 닿아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자신의 고향이던 김해공연장 이었다.

마땅한 대중매체가 없던 시절 서커스가 최고의 볼거리였고 어린 그녀도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단원수가 300여 명이던 전성기 시절의 서커스단에서 그녀는 자신의 표현처럼, '백사장의 모래알 같은 존재로 수년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새로운 결단을 내렸다. 무대 밑 공간에서 남 몰래하는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서커스에 있을 운명이라면, 재주를 빨리 배우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던 것, 그래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 스스로 훈련에 임했다. 자신과의 싸움에 익숙해지던 어느 날 그녀에게 행운이 다가왔다. 곡예사 일가족이 조건이 좋은 다른 곳으로 가서 결원이 생긴 것.

"공연 차질을 우려한 경영진이 고뇌에 찬 시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무엇에 홀린 듯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부장님 제가 하면 안됩니까?" 몰래 연습한 그녀였기에 처음에 의아해했던 담당자가 약식으로 테스트를 한 후에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그 날 이 후, 김영희는 승승장구 했다. 비록 단역이나마 연극"어머니 울지세마요"에서 당시 최고의 배우 "박세환(현 동춘단장)과 무대에 서기도 했고, 외줄타기, 공중큰그네타기, 의자탑쌓기 등의 고난도 곡예를 터득해 오늘 날,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곡예스타가 된 것이다. 현재 한국의 곡예 수준이 평양교예단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그가 타는 '큰 그네'재주 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사실혼 11년만에 올리는 김영희 곡예사의 결혼식은 청춘남녀의 결혼식에서는 느낄 수 없는 구수한 행복의 향기를 풍기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여러분의 지극하신 정성과 사랑으로 성장한 두 사람이 성스러운 촛불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이라도 참석 하셔서 결혼의 첫 걸음을 힘차게 내 디딜수 있도록 축복과 격려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동춘서커스단 김영희(본명 차영희)곡예사 드림-

일시:2002년 4월 14일(음력 3.2)일요일 오후 2시 10분
장소:부평결혼회관 2층 장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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