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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전화 가입자들은 통화품질이나 요금 등에 불만이 있어도 처음에 가입한 사업자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사업자를 바꿀 경우, 기존의 전화번호가 사라져 명함을 바꿔야 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전화번호를 다시 알려야 하는 등 많은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불편이 불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가입한 사업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은 영원히 불편은 불편대로 감내하며, 좋든 싫든 처음 가입한 사업자에게 매달 정기적으로 요금을 상납(?)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번호 그대로 이동

이러한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 번호이동성이라는 것이 그 해결 방안이다. 번호이동성이란 이동전화 가입자가 현재 가입한 사업자를 타 사업자로 옮기더라도 사용중인 번호의 변경 없이 기존의 번호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SK텔레콤의 011-123-4567의 이동번호를 가진 사람이 한국통신프리텔(016)로 이동전화번호를 바꾸고자할 때, 016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번호를 부여받는 게 아니라 지금 쓰고 있는 011-123-4567이라는 번호를 그대로 쓰는 제도이다. 사업자를 바꿀 생각이 없는 사용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아니지만, 바꾸고 싶어도 번호변경 후 발생할 여러 부담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가입자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제도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00년부터 이용자의 편익증대를 위해 번호이동성 도입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1년 1월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추진계획을 시달한 바 있다. 이 추진계획에 따르면, 2001년중 번호이동성 도입방안을 검토해 추진계획을 수립하기로 돼 있었다.

통신위원회의 이해하기 힘든 결정

그러나 지난 1월 21일 정보통신부 통신위원회는 이동전화 번호이동성 도입시기 및 범위와 관련, 3세대 통신서비스(IMT-2000)를 복수의 사업자가 개시하는 시점부터 3세대 통신서비스에 우선 도입하되 2∼3세대간의 번호이동성은 3세대 서비스가 도입된 후 1년이 지난 후 경쟁상황과 이용자 편익을 고려해 도입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정부의 이번 결정에 대해, 현재 2900만 명에 이르는 2세대통신(지금 사용중인 셀룰러 및 PCS) 사용자들의 편익을 완전 무시한 결정이라는 주장이 일고 있다. 특히, 통신위원회의 회의 개최여부까지 비밀에 부쳐진 경위가 궁금하다.

지난 1월 21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 11층에서는 비밀리에 통신위원회가 열리고 있었고, 같은 시각 13층 기자실에서는 정통부 장관이 실·국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올해 주요 역점 통신정책을 발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이날 회의에 대해 그 결과 외에는 과정이나 문제시 됐던 점 등은 전혀 외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통신위원회의 윤승영 위원장은 이날 회의과정을 묻는 기자의 전화에 "통신위원회 사무국장하고 얘기하라"는 답변만 비서를 통해 전했다. 위원회를 책임지는 위원장이 언급을 회피할 정도로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통신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위원은 "(1월 21일 회의에서는) 3세대통신간의 번호이동성 얘기가 주안건이었다"며 "2세대통신과 관련한 번호이동성은 안건으로 심의조차 되지 않았다"고 밝힌다. 즉, 어떤 토의나 의견도 없이 통신위 관계자가 진행하는 대로 내용만 청취하고 그 중요한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국민 과반수 이상의 번호이동성 찬성을 완전 무시한 처사라는 비난에 대해 위원들은 "통신위원회 관계자들이 진행하는 대로 회의를 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통신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국민의사를 배제한 것에 대해 뭐라 말하기 곤란하다"며 "이는 위원들의 판단사항"이라고 책임에서 벗어나려 한다.

기술적 문제도 해결 가능

정보통신부의 김정열 사무관은 "이번 결정이 번호이동성 도입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인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통부가 언제 실현될지 장담할 수 없는 3세대 통신부터 번호이동성을 도입하기로 한 이유는 지금의 통신시장 3강 체제가 흔들릴 우려가 있다는 것과 혼재된 번호에 의해 번호자원의 관리가 어렵다는 것이다.

SK텔레콤 장윤식 기술협력팀장은 "사실상 어떤 형태로든 이용료를 가입자에게 부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또한 번호이동성에 있어 가장 큰 저해요인은 기술적인 문제가 크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KTI의 이길준 정책협력팀장은 "이용료를 부과하는 유럽은 가입자의 10%가 번호이동성을 이용하고 있고, 이용료가 없는 홍콩의 경우엔 60% 이상 번호이동이 이뤄진다"며 "가입자 유치 차원에서 이용자에게 이용료를 부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연결시간 지연이나 통화품질 저하 등 번호이동성 도입으로 발생할 문제도 해결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정보통신연구원의 김진기 주임연구원은 "연결시간 지연이나 통화품질 저하는 QoR(Query on Release)방식 대신 ACQ(All Call Query)방식으로 접근하면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QoR방식은 A가 번호를 이동한 B(예, SK텔레콤에서 한국통신프리텔로)에게 전화를 할 경우, NPDB(Number Portability Data Base:번호이동성 데이터베이스)를 거치지 않고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011로 B를 찾게 되고 찾아지지 않으면, 다시 NPDB로 돌아와 B의 바뀐 사업자를 알아내 다시 한국통신프리텔로 연결하는 복잡한 방식이다.

SK텔레콤의 주장대로 연결 시간이 길어지고 통화품질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ACQ방식은 A가 전화를 걸자마자 NPDB를 가동해 처음부터 B의 현재 사업자를 찾아내기에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국민 생각하는 정부이고 기업인가

정부, 정보통신정책연구원, 그리고 이동통신사업자와 가입자 모두 기본적으로는 번호이동성 도입을 찬성한다. 단지 기업의 이해관계와 기업의 이해관계를 너무 신경쓰는 정부에 의해 이 문제가 얽히고 설킨 상황이다.

LG텔레콤의 김형곤 부장은 "번호이동성 도입을 위해서는 2세대 통신시장의 SK텔레콤 독점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SK텔레콤 역시 "번호이동성 도입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SK텔레콤에 대한 요금 규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고 기업이고 국민의 편익과는 동떨어진 이유로 번호이동성 도입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업의 성패와 관련된 아주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정부고 기업이고 국민의 편익에 설 때만, 그 존재가치가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경실련 3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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