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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명기된 거주이전의 자유가 유린당한 현장

대한민국 헌법 제2장 14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조문이 있다.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하지만 국책사업이라는 명분으로 헌법에 보장된 자유를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10일 KBS 일요스페셜은 실로 눈물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은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과 유치면에 세워지는 탐진댐으로 인해 발생한 수몰 이주민 700세대 2000여 주민들의 눈물나는 이야기였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설날 전날 장흥 탐진강을 찾아 나섰다.

화순을 거쳐 29번 국도를 따라 보성으로 향하다 395번 지방도로를 타고 고개를 넘어 유치면 초입에 이르렀다. 이대흠 시인은 이설도로며 댐건설에서 무지막지하게 토목공사를 해대는 포크레인을 가리켜 짐승에 빌붙어 피를 빨아먹는 진드기로 비유했다. 바로 그 진드기들은 명절을 맞아서인지 일렬로 멈추어 정리되어 있었다.

할큄의 현장

유치면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띄인 것은 이설도로다. 산의 허리를 잘라 노랗게 절개되고 있는 부분은 다름 아닌 이설도로 공사 현장이었던 것이다. 댐건설은 단순한 식수원과 공업용수나 농업용수 그리고 생산성 낮은 전력생산만이 아닌 대규모의 도로건설과 이주마을 조성이라는 엄청난 건설비용을 수반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은 간과된다. 수몰민이 겪어야 하는 아픔은 사회적 비용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환경영향평가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농업생산성이 감소되어도 당연히 생략되어 버린다. 안개일수 증가로 의료비용이 증가되어도 당연히 생략되어진다. 왜냐하면 물 부족이라는 명분 하에 모든 것은 간과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조금 더 진입하자 이설도로 현장사무소가 나오고 산 밑에는 수몰선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생과 사의 경계를 지을 수몰선 표지판, 우리는 어쩌면 개발이라는 논리 앞에 너무나 쉽게 우리의 고향을 내주는지도 모른다.

공수평 마을 느티나무 위의 스피커

도로공사 현장사무소를 지나자 느티나무 한 그루와 도로포장공사에 쓰이는 롤러가 한 대 눈에 들어온다. 느티나무에는 아직도 스피커가 달려 있으나 동네 이장도 떠나고 들어줄 사람도 다 떠나고 빈집과 철거된 집터의 흔적만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을 뿐이다.

마을 앞에 펼쳐진 논에는 포크레인으로 파놓은 웅덩이가 1미터 간격으로 보인다. 바로 농사를 못 짓게 하기 위해 수자원공사에서 파놓은 할큄의 흔적이다. 묘목의 밀식현장도 이곳에서도 빗겨가지 못한다.

좀더 따라 내려가자 유치초등학교가 눈에 들어오고 유치면소재지 송정리가 눈에 들어온다. 면사무소는 어디 이주단지로 제일 먼저 옮겨간 듯하고 철거된 집터와 우체국이며 파출소는 아직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

마른 탐진강

탐진강은 말라 있다. 어떻게 수량이 저렇게 적은 곳에다 댐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탐진댐 건설반대에 앞장섰던 환경단체 사람들에 의하면 탐진댐이 완공되면 유입량 부족으로 녹조현상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말한다. 대나무 숲이 감싼 마을, 마치 섬같은 마을의 사람들도 다 떠났다.

저 멀리 탐진댐 건설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포크레인은 명절을 맞아 잠시 휴식이라도 취하는 듯 일렬횡대로 멈추어 서 있고 탐진댐의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취수탑은 완공된 듯 높이를 뽐내는 사이 지천리 마을도 사라져 버렸다.

계속되는 슬픔의 역사

댐건설현장에서 바라본 유치면 뜰은 말 그대로 황금 들녘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흉칙한 할큄을 당하고 아무런 생명도 잉태할 수 없는 수몰선상 밑으로 가라앉을 운명에 처했지만 수만명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생명을 키웠다.

동학혁명 때 공주 우금치에서 밀려 밀려 이곳까지 왔던 농민군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고, 6.25때는 노령산맥의 끝자락인 이유로 빨치산의 본거지로 낮엔 국군에 밤엔 빨치산에 시달려야 했다.

천여명의 주민이 죽어가야 했고 마을은 불에 타 버렸다. 끝내 마을을 버리고 피난 갔지만 다시 돌아왔고 불에 타버린 집 위에 새로운 집을 지었으나 50년이 지난 세월 뒤에 끝내 이들을 그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끈질긴 삶의 의지 꺾는 댐정책

또 다른 물줄기를 따라 깊은 마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복리이다. 문화재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 발굴은 댐건설에 있어서 가장 늦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목포대학교 박물관팀에서 호남문화재발굴사업이라는 명칭 하에 시행되고 있는 듯하다.

서울에 있는 자식 집으로 설을 쇠러 가신다는 할머니는 여기에서 4월까지 사신단다. 4월까지 문화재 발굴작업이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순 없어도 한 푼이라도 벌어야 병도 안 생기고 슬픔을 잊을 수 있단다. 젊은 사람들은 이미 다 도시로 떠났다고 한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노인들만 을씨년스런 동네를 지키고 있을 뿐이란다.

영월동강댐도 내린천댐도 백지화시켰는데 왜 댐을 건설하지 못하도록 못하셨냐고 물었더니 차마 말을 못하신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고놈의 수자원공사 놈들이 동네 사람들을 꼬셔갔고 투기를 하도록 맹근거셔. 그래서 떠나는 마당에 한푼이라도 더 챙길 욕심으로 투기한 사람 불쌍해서 반대운동도 제대로 못혔어. 노인들은 얼나 안 있어서 죽으면 그만이지만 젊은 사람들이라도 살아야제"하셨다.

그렇다. 댐이 들어설 계획이 세워지면 조용하던 마을이 순식간에 난리가 난다. 영월동강댐에서 우리는 보았고 용담댐에서는 국화를 투기하여 감사원 감사까지 받은 역사가 있다. 지금은 2011년까지 전국 12곳에 댐을 짓겠다는 지역에 또 한 번의 투기열풍이 불고 있다. 미꾸라지 양식장에 비닐하우스에 대추나무 밀식이 그것이다.

텅 빈 유복분교

대나무 숲으로 둘러쌓인 유복분교는 2월로 역사를 마치고 폐교가 된다. 폐교로 이 학교의 슬픈 역사는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학교는 곧바로 철거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폐교의 졸업생들은 폐교에 가서 옛날 학창시절을 돌이킬 수 있는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만 이곳 졸업생들에게는 이것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댐 그것은 일부 지역의 수몰이라는 단순한 물리적인 현상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묻어버리고 그 한을 수많은 수몰민의 가슴에 심는 엄청난 죄악이다. 그래도 건교부 수자원국과 수자원공사는 밀실에서 댐정책만이 가뭄을 해결하고 물부족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로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상처받은 가슴을 달래주는 보림사

이대로 장흥 유치 땅을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탐진강 상류의 보림사로 향했다. 다행히 이곳은 수몰선상 위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선종의 본산으로 인정받는 이 절은 신라시대 원표대덕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삼층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상 등 국보 2점과 동부도, 서부도, 보조선사 창성탑, 보조선사창성탑비 등 보물 4점이 있는 이 절은 슬픈 역사를 넉넉한 품으로 껴안아온 절이리라.

가지산 아래 평평한 뜰에 자리잡은 절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와 목탁소리는 탐진댐의 굉음을 내는 포크레인 소리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스님을 따라가는 강아지의 발걸음에도 넉넉한 여유가 배어나온다.

유치를 떠나오며 본 아주머니의 눈물

보림사 들어가는 입구에 수몰 지역의 무너진 집터를 바라보며 한 아주머니가 수건을 들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수십년 동안 살아왔던 집은 온데간데 없고 평평하게 철거작업이 마무리되고 아무런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저 눈물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의 눈물이다.

건교부는 아직도 28개의 댐을 계획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저런 눈물을 흘리게 해야만 할 것인가? 댐 그것만이 해답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 탐진댐은 전남 장흥에 전남 서남부지역의 물공급을 위해 건설되는 댐으로 올 2월 안으로 지장물 철거공사가 완료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물이 들어올 때까지 이곳에 남아 살겠다는 노인분들이 아직도 헌법 제14조 거주이전의 자유를 울부짖으며 살고 있다. 댐정책 누구를 위한 것인지 댐반대국민행동(http://www.nodam.or.kr), 섬진강적성댐반대홈페이지 어머니의 강, 섬진강은 흐르고싶다(http://antidam.inp.or.kr)에 가시면 자세히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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