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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12일 오후 12시경 한 아저씨가 검정 비닐봉투를 들고 급히 달려간다. 뒤에는 할머니가 따라간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할머니는 약국 옆에 자리를 펴기 시작한다. 보자기 속에는 녹두 2봉지, 밤 30여 톨, 검은콩 5kg 정도가 들어 있다.

"할머니, 이거 어디서 샀어요?"
"시장에서 샀지. 여름에는 우리 마을 이장이 농사지어서 그냥 주곤 했는데, 겨울에는 농사를 안 지으니까 도매시장에서 사오지."
"하루 수입이 얼마예요?"
"오천원어치 팔 때도 있고 만원어치 팔 때도 있어."
"그것 가지고 어떻게 살아요?"
"적게 버는 날은 점심 못 먹는 날이지. 차비 1200원 빼고 나면 남는 거 없는 날도 있어."

"장사하시는 거 자식들이 알아요?"
"알아도 말 못하지. 자기들이 못 도와주니까. 자기 가족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나를 어떻게 도와주나."
"할머니, 한 달 생활비가 얼마나 드는데요?"
"자식 교육비만 안 드는 것뿐이지 다른 집이랑 거의 다를 게 없어. 다행히 시골에 빈집이 많아서 집세 걱정은 안해도 돼."

이야기 도중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할머니, 밤 얼마예요?"
"3500원."
"싱싱해요?"
"먹어봐."

계산을 하고 가시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봤다.
"아주머니, 상점에서 사지 않고 왜 여기서 밤을 사세요?"
"할머니들이 가져와서 파는 것이 토종이야. 그래서 믿을 만하지. 그리고 할머니가 불쌍하기도 해서."
"길거리 다니실 때 노점상인 때문에 불편하세요?"
"안 불편해. 불쌍한데 좀 봐주면 안되나."

아주머니를 보내고 계속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노점상단속원에게 가서 물어봤다.
"할머니 불쌍한데 그냥 봐주시면 안 되나요?"
"어쩔 수 없어. 특별히 월드컵 때문에 더 더욱 안 돼."

깨끗한 거리를 위해서, 시민들이 통행하는데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서, 월드컵을 구경하러온 외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노점상단속은 꼭 필요하다고 노점단속원인 유성일(52. 안양) 씨는 말한다.

"기자 양반, 저 아저씨가 뭐라고 하던. 나 길거리에서 장사해도 된데?"
"안 된데요."
"그럼 저기 옷가게 옆자리에서 하게 해달라고 부탁해봐."
"......"
할머니는 기자라는 사람이 노점단속원에게 말을 하면 자기가 장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할머니 제 명함 받으세요."
"이거 저 사람에게 보여주면 장사할 수 있나?"
"아니요."
"그럼 필요없어."

한 20분간 할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 옆에서 군밤과 군고구마를 팔고 계시던 한 아저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기자 양반, 할머니 장사하게 놔 둬. 장사하시는 할머니 붙잡아서 장사 못하게 하지 말고."
"그래도 이렇게 기사를 쓰면 여론이 형성되잖아요."
"여론 필요없어. 월드컵 끝날 때까지는 장사 못 해."
"노점상연합회와 같이 투쟁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안 돼."
"......"

노점상들에게 여론은 의미가 없었다.
"이제 다 귀찮아. 따지기도 싫고 따져도 해결되는 일도 없는데 뭐하러 힘빼나. 그냥 눈치보면 살려네."

낮은 땅에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었을 때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사회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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