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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혼자 걷는 여행객. ⓒ 김남희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이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 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눈보다 차갑고
눈보다 순결한 마음으로
깊이 깊이 사랑을 새겨두리

정희성 '눈 덮힌 산길에서'



언제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오래된 풍경을 만나기 위해 다시 배낭을 꾸립니다. 가난한 팔레스타인 땅으로 예수가 찾아왔던 날, 새벽 두 시의 서울을 뒤로 하고 진부를 향해 떠났습니다.

새벽녘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무서운 기세로 금세 흐린 하늘을 뒤덮고, 세상을 뒤덮고, 사포처럼 거칠어진 우리들 너덜거리는 속살까지 하얗게 덮어버립니다.

눈발 흩날리는 새벽 고속도로를 달려 월정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 길은 이미 밤사이 내린 눈을 덮고 누워 쌕쌕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숨 같은 탄성을 내지르며 숲길에 들어섭니다.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고 누군가 말했지요. 지금 이 숲은 온통 맑고 서늘한 기운으로 일렁이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눈을 이고 선 전나무들은, 막 사랑을 끝낸 여인처럼 나른한 미소를 흘리며 늘어져 있네요. 어디선가 툭, 툭,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마른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싶습니다.

아직 아무도 오르지 않은 산길.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쳐가며 오르는 동안 이마에는 땀방울이 솟습니다. 월정사 지나 상원사를 거쳐 북대사를 향해 오르는 길에는 마른 바람 소리와 우리들 가쁜 숨소리뿐, 세상은 적요롭기만 합니다.

▲국도 변에서 만난 외딴 집입니다. ⓒ 김남희
어느새 구름을 뚫고 나온 겨울해가 눈부신 빛살을 눈 위로 뿌리고, 그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간 우리는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위로처럼, 축복처럼 눈이 내린 그 날, 짧은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별 말이 없이도 많이 행복했더랬습니다. 이제 시작될 길고도 지루한 겨울을 버티어 낼 힘이라도 얻은 듯, 서로를 돌아보는 눈길에는 여유와 따스함이 가득했지요.


겨울 이른 아침
맑은 공기 속에
싸락눈 쏟아지기 시작하자
동그마한 흙마당에 나보다도 더 작은
하나님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떠
왔다갔다하시네
살구나무들이
뿌리를 가지런히 하는 소리
싸락눈 제일 많이 쌓이는
그 그늘
모퉁이에서 들리네

장석남 '외딴 집'



▲전나무숲을 지나 일주문 들어가는 길에는 부지런한 누군가의 발자국이 상처처럼 남아 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도 잠시 경전을 덮고, 눈구경을 나오셨네요.(사진 오른쪽) ⓒ 김남희
아름다워라 나 문득 눈길 머물러
그것의 고요한 소리 보네
누군가가 슬쩍 밟고 갔을
저 허리 잘록한 소리
한참 살다 떠난 부뚜막 같은
다 저문 저녁 같은

이경림 '사람 지나간 발자국'



























▲월정사 대웅전 앞마당도 흰 눈에 덮혀 있습니다. ⓒ 김남희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양철 물고기가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립니다. ⓒ 김남희
아침부터 골짜기에는 눈발 퍼붓고
이제는 세상과 끊겼다는 절박한 안도감
눈발이 간간이 처마끝 풍경을 때리고
양철 물고기가
눈을 피해
땡그랑, 땡그랑
방안으로 들어온다
깃들일 데라곤 몸뿐이니
추운 소리여
잠시 나한테 머물다 가소

황지우 '겨울 아침' 중에서






▲따스한 한 그릇의 국밥을 위해 겨우내 눈과 바람에 쓸리며 시래기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의 시린 몸을 녹이는 뜨거운 한 그릇의 국밥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산사의 고즈넉함이 지루해 몸을 웅크려 누워 있던 개도 신이 나는지, 눈 덮힌 숲을 바라보며 괜히 컹컹 짖어봅니다. (사진 오른쪽) ⓒ 김남희


▲눈밭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꼭 모아 쥔 동자승이 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 겨울이 모든 이들에게 너무 추운 겨울이 아니기를 빌어봅니다. 상원사 절마당에서 건너다보는 겨울 산줄기들입니다. ⓒ 김남희












▲월정사에서 상원사 가는 길에는 연하장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 김남희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황지우 '겨울산'




▲잎 다 벗은 빈 몸으로 겨울을 나고야 말 나무처럼, 그렇게 다들 봄날을 기다리며 견뎌가는 것이겠지요? ⓒ 김남희
잎진 자리에 나뭇잎 있던 흔적조차 없다
두고 떠나온 자리에 이젠 내 삶의 흔적
흘린 땀방울 하나 자취조차 없다
누구도 서로에게 확실한 내일에 대해
말해줄 수 없는 시대
돌아보면 너무도 많은 이가
벌판이 되어 쓰러져 있는 저녁
얼음을 만진 듯한 냉기만이 얼굴을 쓸고 가는데
우리 생의 푸르던 날은 다시 오는 걸까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긴 겨울
잡목덤불 헤쳐 새 길을 내야 하는 이 늦은 시각에
다시 등을 기대고 바라보는 나무의 빈 가지
그러나 새 순 새 가지는 잎진 자리에서
다시 솟는 것임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그렇게 나무들이 견디며 살아왔듯
그때까지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는

도종환 '빈 가지'




▲생의 절반은 건너왔을 듯한 두 남자가 전나무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차피 혼자서 걸어가야 할 삶의 길에서, 이렇게 마음이 오가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 김남희
요즘 와서는 점점 더 햇빛이 빨라져 조금 살다보면 어느샌가 어둠이 내려,
만나라 친구들이여, 눈 멎은 저녁 모퉁이에서 갑자기 서로 떨리는 손들을 내밀고,
찾아라, 서로 닮은 점들을, 서로 닮은 곳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잘들 있었는가. 그대들은 어느 곳에 상처를 받았는가.
나도 닮은 곳에 얼음을 받지 않았는가. 혹은 내가 팔을 벌렸던가.
만나라 친구들이여, 내 얼은 거리에 등을 붙이고 서서 서로 만나는 그대들을 맞으리니.

황동규 '겨울날 단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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