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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바람은 아주 세다. 누가 나에게 베이징을 연상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만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바람’을 들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베이징의 바람은 세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이 ‘바람’이 더 기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얼마전 베이징 일대에 대설이 내린후부터 이 바람의 강도도 더 세졌다.

‘바람’과 달리 ‘눈’은 베이징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연상어는 아니다. 내리는 양도 적고 횟수도 많지 않아서, 베이징에는 ‘눈’에 관한 무슨 낭만적인 얘기나 영화, 추억담들이 그다지 많이 회자되고 있지는 않다. 대신 ‘바람’에 관한 이야기들은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얼마전 베이징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대설이 내렸다. 11월말쯤인가 첫눈이 내린후, 베이징에는 두 번째로 내린 눈이었는데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도 내렸었다. 베이징에서 그렇게 많은 눈구경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어찌된 일인지 겨울 초입부터 베이징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좋은 징조인 듯 싶다. 아니, 제발 좋은 징조였으면 좋겠다.

눈 내리던 늦은 아침날

베이징에 대설이 내린 아침. 나는 그것도 모르고 커튼을 꼭꼭 닫은채 늦은 아침까지 망연자실하게 벽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간밤에 있었던 불쾌한 일과 또 그 며칠전 있었던 우울한 일들로 인해 일어나서 커튼을 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을 듣고서야 마지못해 일어나게 되었다.

전화를 끊고, 그제서야 커튼을 열어젖히니 세상이 온통 하얗다. 그리고 하얀 분가루같은 눈들이 ‘펑펑’ 내리고 있는 것이다. 눈을 보니 그전까지 머리속을 뒤덮고 있던 온갖 우울한 상념들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사실, 베이징에 첫눈이 온 이후 나는 내내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 백두산을 마지막으로 여행을 가본 기억이 없고, 또 연말이면 무슨 손님처럼 찾아오는 괜한 우울증과 무기력, 암담함등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차라 무언가 ‘마약’과 같은 강한 자극이 필요할때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12월 초순에 시간이 비어서 그때를 이용해 나는 멋진 기분전환 여행을 가리라고 맘을 먹었었다.

그러나 끝내 ‘운’이 따라주질 않은것인지, 여행을 가기로 계획한 며칠전 나는 적지않은 현금과 내것도 아닌 귀중한 디지털카메라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들을 잃어버린날 밤, 나는 모처럼 낯선 사람들과 뒤섞여 기분좋은 저녁을 보내고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그만 가방을 택시안에 두고 내린 것이다.

그리고 불과 이틀인가 3일뒤, 나는 또 택시로 인한 운 나쁜 일을 겪어야 했다. 그때는 이미 잃어버린 현금의 타격으로 여행이고 뭐고 다 포기한 상태였다. 그날도 누군가를 만나서 늦은 귀가를 하던중, 택시기사에게 그 분실물 사건에 대한 신세한탄을 잔뜩 늘어놓은 참이었다. 내 얘기를 들은 그 기사는 “살다보면 더 큰 일들도 당한다. 다 잊어버려라...”등등의 말을 하면서 제법 사람좋게 위로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리기전 혹시 다음에 장거리로 이용할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다며 그 기사의 연락처를 받아적고 택시비를 지불했다.

거스름돈을 확인할 생각도 안하고 대충 주머니속에 구겨넣은채 ‘다정한’ 인사를 끝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집에와서 옷을 벗던중 무심결에 주머니속에 있는 잔돈을 세어보니 받아야 할 거스름돈보다 아주 한참은 모자라는 것이다. 잔돈을 싼 돈의 형태도 고의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교묘하게 말아져 있다. 그제서야 방금전 잔돈을 건네받을 때 손으로 전해지는 감촉이 조금 ‘가볍다’고 느꼈던 것과 등을 돌린채 잔돈을 챙기던 기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록 사기당한 택시비는 얼마전 분실한 현금과 디지털 카메라,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던 귀중한 사진들에 비하면 뭐 대단할 것도 없는 액수이긴 하지만, 나는 그 모자라는 거스름돈보다는 사람에게 ‘사기’ 당한게 더 분하고 억울해서 냉장고에 남아있던 캔맥주 한 개를 벌컥벌컥 들이 마시고야 말았다. 받아놓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서 아는 중국어 욕이란 욕은 다 퍼부어볼까도 싶었지만, 무슨 소용이랴 싶어 이것이 제발 올 연말에 겪는 마지막 ‘재수없음’ 이기만을 바랬다.

그렇게 겪은 일들 때문에 아직도 마음속의 응어리들이 풀어지지 않은 그날 늦은 아침. 갑자기 눈앞으로 쏟아지는 그 많은 눈들을 보니, 모든 우울했던 일들이 ‘눈녹듯’ 잊혀지지는 않아도 순화작용은 된다. 그리고 내친김에 다 잊기로 다짐한다. 나를 ‘사기’친 그 택시기사의 말마따나 “살다보면 더 큰일도 당하는데 뭐...잊어버리자...”며 열어놓은 창문으로 심호흡인지 한숨인지를 한번 크게 내뱉고 오랜만에 베이징에 내리는 대설을 감상했다.

그 눈들을 보면서, 나를 자극시킬 것이라 믿었던 마약같은 여행의 꿈은 이미 날아가 버렸지만 대신 즐거웠던 지난 여행들과 그 여행길에서 만났던 진짜로 좋은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회고하기로 한다.

그해 초겨울의 여행

2년전 초겨울. 나는 혼자 무박2일의 여행을 떠났었다. 중국에 온지 서너달이 지나고 기본적인 회화와 대강의 물정들을 깨치게 되면서 슬슬 이 넓은 대륙을 여행하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 첫 여행지로 당시 거주하던 톈진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청더(承德)라는 곳을 지도에서 찍었다.

기차표를 끊고 드디어 첫 여행을 떠나던 날. 기차역 앞에서 나의 중국친구 샤오루가 신신당부하고 일러주는 중국여행지에서 조심해야 할 사항들을 듣는둥 마는둥 하며 들뜬 기분으로 기차에 올랐다.

뭐든지 아무 것도 모르는 ‘초짜’ 일 때가 가장 용감한지라,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나는 나의 3,4개월짜리 중국어를 써먹을 수 있는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내 시야에 들어온 가장 가까운 ‘대상’은 역시 앞좌석에 앉은 사람들이다. 마침 내 옆자리는 사람이 없었고 바로 맞은편에 친구사이로 보이는 남녀학생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기차가 출발한지 30여분이 지나서, 그네들의 동태를 한참 염탐하고 있던중 잠시 둘의 대화가 끊긴 사이 나는 잽싸게 그 사이를 노려 둘에게 말을 걸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첫 중국어는 “너희들 몇 살이니?”였다. 이 뜬금없는 질문이 놀라웠던지 그들 둘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외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들 귀에 그 간단한 말도 어설픈 외국인발음으로 들린게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진전이 있는 낌새가 보이는 지라 나에 대해 대략적인 소개를 하고 내쳐서 그들에 대한 신상정보도 물었다.

그들은 둘다 17살이고 톈진의 모 기술종합고등학교 동기이자 고향친구라고 했다. 주말을 이용해 고향인 청더집에 잠시 가는 길이란다. 게다가 한족이 아니라 둘다 몽고족이라는 소개도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몽고족 학생들과 말을 트는데 성공했고, 우리셋은 그들이 싸온 닭고기를 함께 나눠먹으며 근 6시간이 넘는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그네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외국인과 말을 해본 것은 처음이라며 나보다도 더 신나 하며 이것저것 호기심나는 것들을 줄기차게도 물었다.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리고 순박하기만 했던 그 몽고족 학생들은 외국인이면 무조건 다 영어를 할줄 아는줄 알고 또 다른 나라도 많이 다녀본줄로만 알았는지 나에게 영어를 해봐라, 스위스를 가봤냐 등등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도 마구 해댔던걸로 기억한다.

새벽 무렵, 청더역에 도착한후 우리는 그날 밤 10시에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 함께 톈진으로 내려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들은 이 어설픈 초짜배기 중국내기가 걱정스러웠던지 내 친구 샤오루처럼 또 한참을 ‘주의사항’에 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뒤 무슨일 생기면 자기들 집으로 전화하라며 연락처를 적어준다. 그러고도 두어번 더 뒤를 보며 저녁 10시에 꼭 이 자리에서 기디리라고 당부를 하며 총총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날밤 10시. 하루 청더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는 그들과 약속한 기차역에 조금 일찍 나가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10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며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고 ‘아무일 없었냐’, ‘뭘 봤냐’, ‘재밌었냐’는등 대답할 틈도 안주고 또 마구 속사포같은 질문부터 해댄다. 그들의 이 환대에 나도 얼마간은 감격했던지라, 첫 여행지에서 만난 중국인들치고는 정말 좋은 아이들을 만났다며 속으로 좋아했다.

그들과의 이 인연은 그러고도 한 세 번정도는 더 이어졌다. 톈진에 돌아온후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는 철석같은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일주일 뒤쯤, 그들의 학교에 전화를 걸어 함께 저녁이나 먹자고 했더니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이다. 진짜로 전화를 할줄 몰랐다며, 자기네 학교에 놀러오라고 한다. 순간 나도 호기심이 생겼던지라 ‘그러마’하고 선뜻 응낙을 했다.

‘국빈’ 환영을 받다

그들 몽고족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톈진시의 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에 있었다. 혼자서는 못찾을 거라며 내가 있는 대학정문까지 마중을 나온 그들과 함께 나는 그네들의 학교를 갔다. 갈때까지만 해도 나는 단순히 밥한끼 같이 먹고 그들이 사는 숙소정도만 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학교정문으로 들어섰을 때, 이게 웬인인가.
조그마한 시골학교같은 정문앞에는 웬 학생들이 떼거지로 몰려나와 있다. 나와 그 몽고족 아이들이 정문앞으로 다가가자 모여있던 한무리의 학생들이 ‘환영, 환영, 환영!’을 외치며 일제히 우리앞으로 온다. 학교안 기숙사 창문에도 또 한무리의 학생들이 고개를 내밀고 싱글벙글 구경하고 있다. 그 환영인파는 몽고족 학생들의 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나를 더 당황스럽게 한 것은, 그 환영인파속에서 웬 어른이 걸어나오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며 영어로 “웰컴, 웰컴”하는게 아니겠는가. 기숙사 사감이자 몽고족 여학생의 담임이라는 것이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젊은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자기학교에 온걸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놀다 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내가 그 학교에 온 첫 외국인이라며, 영광이라는 농담같은 말도 덧붙인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앞에서 얼이 빠진 나는 그들이 이끄는 손에 따라 몽고족 여학생의 숙소로 따라 들어갔다. 숙소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나는 또 얼마간의 환영인파와 마주쳐야 했고 여학생 기숙사 안의 어린소녀들은 모두 문을 열어놓은채 신기한 듯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무슨 ‘국빈’같은 환영과 칙사대접을 받은 나는 그 여학생의 숙소에 들어가서도 한참은 너무 황당하고 당황스러워서 입을 열지 못했다. 그후 나는 그들이 대접으로 가져온 자스민차와 일부러 사온 도시락을 억지로(?) 먹어야 했고 숙소안에 같이 사는 7명의 동료여학생들의 온갖 궁금증에 그 짧은 중국어로 답을 하느라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 당시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과도한 환영과 호기심들이 못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밤이 깊어져서도 그들은 나를 놔주지 않았다. 반드시 하룻밤은 자고가야 한다며, 부득부득 가야한다고 거절하는 나에게 다시 담임선생까지 데리고 나타나 설득을 하는 것이다. 급기야 나는 그 담임선생에게, 외국인 기숙사는 규정상 11시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거짓말까지 하여 겨우 ‘가도 좋다’는 그들의 동의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밤길이 위험하다며 그 담임선생님이 특별히 지목한 남학생 셋의 ‘호위’를 받으며, 그제서야 난 그 황당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뒤, 그 몽고족 학생들과 친구들이 ‘답방’ 형식으로 내가 사는 대학의 외국인기숙사에 놀러를 왔다. 물론 내가 겪은 그러한 거창한 환영인파도 없었고, 창문에 매달린 호기심 어린 눈들도 없었다. 그저 나의 기숙사 룸메이트와 더불어 말그대로 밥이나 한끼 먹고 도란도란 얘기나 몇마디 나눈게 고작이다. 이 덤덤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뭐가 그리도 신났던지 좁은 기숙사방안을 요리조리 구경하고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하면서 신기해 한다. 그러다 가야될 것 같은 시간이 되어, 은근히 시간이 늦었다며 가기를 재촉하는데 그네들은 놀랍게도 ‘자고간다’고 하는 것이다.

‘자고가야’한다는 이 청천벽력같은 말에 나와 룸메이트는 기겁을 해서 외국인 기숙사에는 밤 10시이후에는 중국인들이 들어올 수 없다는 규정(이번에는 진짜였다)을 말해주며 제발 고이 돌아가 줄 것을 설득했다. 규정이라는 말앞에서 또한번 설복당한 그들은 얼굴에 못내 서운한 기색을 비치며 마지못해 돌아갈 채비를 한다.

택시에 그들을 태워보내고 나는 마치 어떤 ‘의무’를 다 완수한 사람처럼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 서운한 표정들이 조금은 찜찜하게 남았던 것도 사실이다.

눈, 그리고 행복에 대한 ‘상상’

지금은 그 아이들이 뭘하고 있는지 전혀 알길이 없다. 지금쯤은 아마 학교를 졸업하고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뒤로도 한번인가 더 만나고 전화통화는 몇차례 더 한 기억이 있지만 그들의 그 과도한 호기심에 질렸던 나는 놀러오겠다는 그들의 말을 여러번 돌려서 거절했던 것 같다.

눈내리는 겨울날, 청더의 피서산장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며 내년 겨울방학에 다시 한번 꼭 청더에 놀러오라고 했던 그 몽고족 여학생의 말만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 아침, 베이징에 내리는 눈을 보니 문득 그 아이가 말했던 눈쌓인 피서산장에 다시한번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굳이 눈쌓인 피서산장이 아니더라도 다시 기차를 타고 예전 그 첫 여행같은 설레임과 흥분을 가지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그 아이들 같은 순박하고 때묻지 않은 맘을 가진 중국인들을 그 여행길에서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밤에 나를 ‘사기’친 그 택시기사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가장된 친절로 사기를 치고 있든지, 내가 택시안에 두고 내린 귀중품들을 보고 또 어느 택시기사가 ‘횡재’했다고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르지만 베이징에 대설 내리던 날, 나는 그것들을 다 잊기로 한다.

모든 운 없고, 재수 없었던 일상의 우울들을 털어버리고 그 첫 여행길에서 만난 몽고족 아이들같은 순박한 맘들만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내년에는 제발 모든 운과 행운들이 저 눈가루처럼 내 손안으로 소복히 쌓이는 그러한 행복에 대한 ‘상상’만을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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