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청나라 초기 거대한 중국의 기틀을 다진 강희황제가 다시 드라마로 부활한다.

중국 중앙텔레비전은 12월 3일부터 46부작으로 강희제의 역사를 담은 드라마를 내보내고 있다. 저명한 배우 첸다오밍(陳道明)이 주연을 맞은 이 영화는 순치제에서 강희제로 넘어가는 시기를 시작점으로 한다. 만주족 정권인 청나라는 중화민국에서 그다지 부각되지는 않지만 건륭황제를 비롯해 강희제, 옹정제는 현대 중국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폄하되지 못하는 부분을 갖고 있다.

또한 진시황제 못지 않은 순행(巡行)으로 인해 중국 곳곳에 그의 유산이 남아있는 전설같은 경력을 갖고 있다. 그의 시호는 인황제(仁皇帝)고 묘호는 성조(聖祖)다.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다. 순치제의 유명(遺命)으로 8세 때 즉위해, 14세 때 친정을 시작했다.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청나라의 지배는 그의 재위기간에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의 재위 후 평정(平定)을 맡았던 윈난(雲南)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등 삼번왕(三藩王)이 그를 위협하고, 위구르 등의 위협도 많았다. 1673년 평남왕의 철번(撤藩)을 계기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단호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1681년 평정에 성공하였으며, 대만의 정씨도 내분으로 1683년에 멸망함으로써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지배가 완성되었다.

50년간의 면세 총액이 1억 냥을 넘었으며, 1712년에는 인두세를 정액화하고, 조운(漕運)을 정비하며, 황허의 치수에 힘쓰는 등 내정상으로도 안정된 시대를 이루었다.

외정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위하기 위하여 아이훈성(愛琿城)을 구축하고 1689년 유리한 조건으로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다. 1690년에는 외몽골 준가르부(準爾部)의 갈단(爾丹)을 토벌하고, 1691년에는 칼카부를 평정하였으며, 1696년에는 차오모드(昭莫多)에서 갈단군(爾丹軍)을 괴멸시키고, 1697년에 갈단을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외몽골을 판도 안에 집어넣었다.

그 후 갈단을 계승한 체왕아라푸탄(策妄阿拉布坦)이 티베트에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되자 1718년부터 티베트에 원정하여 그 지배권을 빼앗고,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대하였다. 지금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대부분을 강희제가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정벌사업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적지 않은 치적을 남겼다. 중국 최대의 유서(類書)인 <고금도서집성>을 편찬하는 한편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는 데도 열성을 보였다.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겪고, 황태자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1722년 11월14일 병사했다.

강희제는 이런 업적으로 인해 문화계의 가장 중요한 타겟이 됐다. 미국 예일대학 석좌교수이자 저명한 중국관련 집필자인 조너선 스펜스는 그의 마음에 들어가서 중국을 보는 독특한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이미 수차례나 드라마로 방송됐다. 이번 드라마가 더욱 주목받는 것은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의 삶을 다룬 '손중산'(孫中山)이 동시에 방송되기 때문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