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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는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해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초기 건축물로 뛰어나다’는 소견으로 추천, 1997년 12월 4일 수원 화성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 21차 총회에서 창덕궁과 불국사, 석굴암 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그 많은 성곽들 중 왜 유독 수원 화성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수원시를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이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신도시라는 말들을 곧잘 하곤 한다. 신도시라 함은 누군가의 계획과 추진에 의해 그 동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물론 요즈음에도 인구과밀 등을 해소하기 위해 수도 주변에 신도시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인 조선시대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역사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즉 화성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은 그저 민가 5~6호만이 존재하던 허허 벌판이었을 따름이나 화성이 만들어진 이후부터는 사통팔달의 요충으로 그 위상이 급격히 상승하게 된다.

또한 정조가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읍과 민가 등을 옮기지 않을 수 없어 정조 18년(1794) 2월에 드디어 축조가 시작된 화성은, 화성 축성공사의 전말을 그림과 함께 소상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일종의 공사보고서를 통해 그 위대함이 한층 높아진다.

이 책에는 당시 동원된 인부의 숫자나 동원 일수, 축성에 사용된 벽돌의 개수뿐만 아니라 당시 축성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에게 지급된 임금의 액수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즉 당시에 이미 농번기의 백성들을 고려해 임금을 지불했다는, 이전까지는 생각 치도 못했던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상당 부분 파손된 화성을 복구할 때 이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성은 돌이나 흙으로만 성을 쌓던 당시의 성곽 축성 기술에서 나아가 훨씬 견고한 벽돌이 처음 사용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공심돈이나 포루, 노대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구조물들과 함께 거중기나 녹로, 활차 등의 발명품들이 나오는 계기 역할을 하였다.

이제 놀라움을 잠시 접어 두고 구체적으로 발걸음을 떼어 보자. 수원 화성을 찾아가는 일은 여느 때 보다 쉬워졌다. 서울에서는 전철만 타면 곧장 수원역까지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원 시내에 안내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찾아가는 일이 그다지 힘들지 않다.

물론 수원역에서부터 택시나 버스를 타고 가도 되고, 아예 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해 화성에 갈 수도 있겠지만, 차를 이용해 혼잡한 도심에 들어서는 것보다는 이날 하루만이라도 아침나절 상쾌한 공기를 쐬며 가벼운 마음으로 도보를 이용해 화성까지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 하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서장대(西將臺)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수원역에서부터 거의 직진만을 계속하다 보면 경기도청에 다다르는데, 그 오른편으로 난 오르막길을 계속 걸으면 서장대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서장대에 도착하기 전에 성벽을 만난다면 바로 서장대로 향하지 말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성벽을 한번 유심히 관찰해 보자. 삼년산성 등의 다른 성들과는 달리 돌로 된 하부와는 달리 상부 구조는 벽돌을 이용해 만들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돌을 딴 흔적. 당시에는 돌을 떠내거나 가르기 위해 나무 쐐기를 박았다. 즉 큰 돌에 바짝 마른 밤나무 쐐기를 박은 후 물을 부으면 나무가 물을 머금어 팽창하는 동시에 돌이 쪼개지게 된다. 우리는 바로 그 쐐기를 박았던 흔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 권기봉
게다가 아래 부분은 큰 돌들 사이의 작은 틈새마저도 더 작은 돌을 이용해 메웠을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큰돌 사이도 서로의 굴곡을 짜 맞춘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검은색 벽돌을 이용해 쌓은 여장 부분은 위로 튀어나온 타와 화살 등을 쏘기 위해 움푹 패인 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타에 구멍이 세 개씩 규칙적으로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운데 나 있는 구멍만은 그 모양이 다른 두 개의 구멍들과 다르다. 다음에 성 안으로 들어가 그 구멍을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가운데 구멍은 성벽 가까이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 구멍이 아래쪽을 향해 뚫려 있고 나머지 양쪽의 두 개의 구멍은 원거리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벽에 거의 수직으로 구멍이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초 가졌던 생각과는 달리 세월의 이끼와 함께 아름답기만 한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문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바로 성 안으로 통하는 암문(暗門)이다. 화성에는 총 4개의 암문이 있는데 이 암문은 그 중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암문’이라고 불린다.

문은 보통 정면에서 보면 바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암문이란 것은 성벽에 수평하게 설치된 것이 아니라, 성벽 자체에 아예 굴곡을 주어 주위 성벽과는 90도의 각을 이루며 조성되어 있다. 이미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암문은 적들이 알 수 없게 낸 문으로 유사시 전령들이 이용하거나 평시에 성 출입을 위해 굳이 4대문 중 하나로 가야만 하는 불편을 줄이는 편의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암문에 들어서서 안쪽에서 문을 살펴보면 역시 문을 잠그는 데 쓰이는 장군목을 끼우는 홈이 문 양 옆의 성벽에 나 있고, 문 자체도 화공 등의 공격이 있을 시에 이를 견뎌내기 위해 철로 된 옷, 즉 철엽을 두르고 있다. 또한 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알 수 있겠지만, 들어서자마자 통로가 왼쪽으로 90도로 꺾이며 성으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성을 공격하던 적이 만의 하나 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경우 곧장 직진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공격 속도를 늦추고 계단 양쪽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전략적 배려로 볼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드디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계단을 오르면 성벽 옆에 우뚝 서있는 서장대를 볼 수 있게 된다. 서장대는 말 그대로 화성의 서쪽에 있는 장대, 즉 장수가 지휘를 하던 ‘총지휘본부’ 건물로 정조 임금이 쓴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서장대.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서장대로, 왕이나 장수들이 군사들의 훈련을 감독하고 전시에는 지휘를 하던 곳이다. ⓒ 권기봉
장수가 화성을 굽어보며 지휘한다는 기능에 맞게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성곽 반대편에 있는 봉돈은 물론 수원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서장대는 어떤 연유에서인 지 없어졌던 것을 1971년에 들어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12개의 팔면주석 사이로 사방이 트인 1층과는 달리 계단이 연결된 2층은 사람이 그냥 앉아있기에도 불편해 보일 정도로 그 높이는 물론 평면적도 겨우 5평 남짓으로 매우 작다.

화성의 그 어느 부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이미 시야가 확 트인 서장대에서 ‘2층’이 갖는 의미는 별로 없었을 것이란 짐작을 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2층으로 지었을까. 아마도 2층은 실제로 장수가 지휘 등을 위해 이용했다기보다는 수어장대로서 갖는 격식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서장대 석축.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암반 위에 자연스럽게 서장대가 자리잡았다. ⓒ 권기봉
한편 서장대와 성벽 사이에 역시 검은색 벽돌로 지은 대가 하나 서 있다. 서노대(西弩臺)라 불리는 이 구조물은 시야가 좋아 장수가 지휘하는 데 이용되거나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쏘는 쇠뇌가 설치되어 있던 곳이라 한다. 특히 팔각형으로 생긴 상층은 성벽과 같이 여장이 있어 방어력을 높였다. 한편 원래 서장대와 서노대 사이의 오른쪽에는 군무소로 쓰이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서노대로, 이곳에서는 화성 성곽은 물론 수원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 권기봉
이 곳에서 잠시 화성을 한번 죽 둘러보자. 원래 지대가 높은 까닭에 오늘 답사할 대부분의 구조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반나절 정도 걸릴 답사이기에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면 안되겠다. 서장대에서 바로 성 안쪽으로 난 숲으로 들어서지는 말자. 오늘 답사는 어디까지나 화성 성곽을 둘러보는 데 목적을 두었으므로 행궁(行宮)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필요는 없다.

▲끝없는 성벽. 서노대와 서포루가 이처럼 가파른 경사길로 이어지고 있다. 화성은 이처럼 성벽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며 답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 권기봉
서장대에서 동쪽으로 난 가파른 성벽을 따라 발걸음을 떼면 이내 첫 번째 치(雉)를 만나게 되는데, 이 치는 서쪽에 있다 하여 서이치(西二雉)라 한다. 치라는 것은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약간 돌출된 부분인데 성벽에 다다른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는 아주 효과적인 수비를 할 수 있는 구조물로 이미 고구려 초기의 성벽에서도 이런 구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자 다시 걷자. 이번엔 누각이 씌어진 작은 건물을 만나게 된다. 앞서 본 치와는 달리 가장 아랫부분부터 검은 벽돌을 이용해 지은 이 건물은, 화포가 설치되었던 서포루(西砲樓)이다. 특히 포루 벽체의 두께가 거의 66cm에 이르고, 개개의 벽돌에는 가운데 두세 개의 구멍이 있어 거기에 심을 박아 위아래로 단단히 고정시켰다는 실측 기록을 보면 그 치밀함과 견고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게 된다. 전체 3층으로 된 서포루는 대부분의 다른 포루들과 마찬가지로 3면에 걸쳐 화포를 쏠 수 있도록 구멍이 나 있다.

계속 성벽을 따라 내려가다 이전에 지나쳤던 치와 비슷한 모습의 서일치(西一雉)를 지나면 서북각루(西北角樓)에 이르게 된다. 화성의 서북쪽에 있다 하여 서북각루라 불리는 이 건물은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華西門)을 공격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로, 화서문을 면한 쪽의 성벽은 주위에 수직으로, 반대로 서장대 쪽의 성벽은 유연한 곡선을 띠고 있어 이채롭다. 서북각루는 다른 대부분의 화성 구조물들처럼 실제로 올라가 볼 수 있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화서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서북각루에서 본 화서문. 서북각루에 오르면 화서문이 이렇게 보인다. 한편 화서문 저편으로 서북공심돈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 권기봉
보물 제 403호인 화서문은 오늘 답사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대문으로, 동쪽의 창룡문(蒼龍門)과 비슷하게 생겼다. 홍예문 위에는 1층의 누각이 얹혀져 있는데 석축 좌우에 있는 층계를 올라 담장 사이로 난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예상을 깨고 바닥이 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변과는 달리 중심 부분에만 장마루, 즉 초등학교 때 보던 긴 나무를 짜 맞춘 마루가 있는데, 홍예의 천장 구실을 하는 셈이다.

한편 문루의 바깥쪽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이 있다. 성문을 그냥 두면 적이 공성기를 이용해 성문을 부수고 들어오기가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즉 이 같은 성문 돌파를 방지하고 적이 공격을 하는 데에도 성문까지 직진해 쳐들어 올 수 없도록 성문 바로 앞에 옹성을 쌓고 한쪽으로 트임을 내어 통행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다른 문화재들과는 달리 화성은 대부분의 건물이나 구조물 등에 직접 올라가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데, 이 매력을 십분 이용해 옹성에 한번 올라보자. 느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옹성의 바닥이 성문 쪽으로 경사져 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긴 할 텐데 바로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옹성 밖을 공격하는 데 통로가 좁은 옹성에서 뒷발을 잘 디뎌 좋은 싸우기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함일까 아니면 빗물 등의 배수 등을 용이하게 하는 목적에서 이렇게 만든 것일까, 그저 상상의 나래를 펼 뿐이다. 아니 매사에 사물을 지나치게 분석하려 드는 것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하고 이번엔 고민을 접는다.

화서문 다음에는 이전에 지나친 서북각루와 함께 화서문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공심돈은 화성을 계기로 우리 나라에선 처음으로 만들어진 구조물로, 치나 각루 등과는 달리 사면의 벽면 중 한 면만 성벽과 접합됨으로 인해 마치 성벽에서 툭 불거져 나온 듯이 보인다. 이는 공격이나 수비를 할 때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서북공심돈에서부터는 서장대에서 줄곧 거의 일자로 진행되던 성벽이 거의 90도로 꺾이며 화성의 북문에 해당하는 장안문(長安門) 쪽으로 달리게 된다. 그 중간에 만나게 되는 것이 북쪽에 있는 포루, ‘북포루(北砲樓)’이다.

▲안과 밖의 지붕이 다르다! 북포루로 성벽을 중심으로 안쪽과 바깥쪽의 지붕이 다르게 생겼다. 특히 안 쪽이 맞배지붕을 한 것은 병사들이 급히 이동 중에 병장기가 걸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 권기봉
그런데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금새 눈에 들어온다. 이상하게도 성벽의 바깥쪽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성벽 안쪽의 그것은 단순한 맞배지붕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고민에 잠긴다. 목수 신영훈 씨는 이를 두고 워낙 지붕 높이가 낮기에 유사시에 병장기 등을 들고 성벽을 따라 이동하는 이들에게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맞배지붕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듯하다.

▲방패 혹은 창. 북포루의 측면으로 각각의 칸마다 방패로 이용되는 널빤지로 만든 창을 달았다. 즉 유사시에는 뒤에 몸을 가려 숨을 수 있게 하였고, 총구멍을 내어 방패에 숨은 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 권기봉
장안문은 북포루에서도 저 멀리 보인다. 화서문과는 달리 우진각 지붕을 한 장안문의 옹성은 그 형태도 화서문이나 창룡문과 다르다. 옹성이 성문 앞을 가로막고 한쪽으로 통로를 둔 것에 비해 장안문의 그것은 옹성을 거의 완벽한 반원형으로 둥글게 두르고 그 가운데에 다시 우진각 지붕을 한 문루를 세웠다.

이 문루에는 ‘오성지(五星池)’라고 불리는 구조물이 있다. 오성지는 일종의 물탱크로서 문루에 불이 붙었을 경우 그 불을 끄기 위해 물을 저장해 두는 역할을 하던 것이다. 하지만 화성의 설계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동안 자신이 애초 설계했던 것과 다르게 만들어진 오성지를 애석해하는 글을 남겼다고 전해져 지금의 모습이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란 추측을 가능케 한다.

▲장안문. 장안문은 숭례문이나 흥인문과 같이 도로에 의해 접근이 차단되어 있어, 장안문에 오르기 위해서는 시에서 설치한 철제 육교를 건너야만 한다. 한편 장안문의 옹성 뒤로 적대의 끝 부분이 희미하게 나마 보인다. 마치 장안문이 팔을 벌린 듯한 모습인데 옹성과 함께 좌우에서 적을 협공할 수 있도록 했다. 장안문은 팔달문과 모습이나 구조 등이 매우 비슷하다.
ⓒ 권기봉
한편 장안문의 바로 양옆으로는 적대(敵臺)라는 구조물이 있는데, 이전에 본 치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장안문을 공격하는 적을 정면 방향에서뿐만 아니라 좌우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에서 돌출된 구조물을 만든 것이다. 마치 성벽에서도 제한적이나마 포위공격을 용이하게끔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침 일찍 시작한 답사인데도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인 지 해가 중천에 떴다. 이젠 차분히 답사하는 중간에 치나 포루 등은 생략하면서 조금 서둘러 보자. 장안문에서 성벽을 따라 얼마 가지 않으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광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안양에 있는 만안교와 함께 우리 나라에 있는 홍예다리 가운데 가장 긴 것 중 하나인 화홍문은 화성의 북쪽에서 수문 역할을 하고 있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이 물은 60여 년 전만 해도 맑아 빨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오염된 물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홍예가 일곱 개나 되어 보기엔 그저 아름답기만 한 홍예 아래로 내려가 위를 올려다보면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누혈(漏穴)’이라 불리는 이 구멍들은 홍예 아래로 몰래 스며드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구멍이라고 한다. 특히 홍예 아래의 바깥쪽에는 철책을 끼워 고정시킬 수 있는 홈이 아직도 남아 있다.

▲화홍문. 일곱 개의 홍예 위에 문루가 세워진 화홍문이다.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광교산에서 발원한 물이 홍화문의 일곱 홍예를 지나갈 때 마치 보석과 같이 부서지는 물보라를 바라보는 멋으로, 수원팔경에 속한다. ⓒ 권기봉
화홍문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더라도 이젠 더 아름다운 광경을 만날 테니 아쉬움을 달래자. 화홍문으로 다시 오르지 말고 이곳에서 곧장 돌다리를 건너자. 그러면 용의 머리 모양을 한 석조물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 바로 뒤의 용연에 물이 넘치면 흘러내리는 배수구 역할을 하던 시설이다.

의궤에 의하면 석리두(石螭頭)라 불리는데 이무기 형상을 했다고 해서 ‘이무기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용연 자체로선 그다지 아름다움을 느끼진 못하겠다. 하지만 용연에서 용두암을 타고 앉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停)을 보고 지금까지 본 정자 중 으뜸이라고 꼽는다면 과장일까. 그처럼 용연에서 올려다보는 방화수류정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이젠 그 아름다운 방화수류정을 직접 보러갈 차례이다. 하지만 용두암을 기어오를 수는 없는 법. 길을 찾자.

석리두의 반대 방향으로 용연을 끼고 돌면 좌우의 벽면이 마치 첨성대의 곡선을 연상케 하는 북암문(北暗門)이 저 깊숙한 곳에 보인다. 암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다시 들어왔으면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방화수류정에 오르자. 원래 이름이 동북각루(東北角樓)인 방화수류정은 역시 보기와는 달리 군사시설이긴 하지만, 아무리 총을 쏘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해도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진 않는 듯 하다. 여기서는 오랜 시간을 지체해도 아까움이 없을 듯 하다.

못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동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면 동북포루와 동암문을 지나 동장대(東將臺)에 도착하게 된다. 야트막한 담장으로 둘러쳐진 동장대에 들어서면 단층의 동장대 건물과 함께 아름다운 무늬의 동장대 뒤쪽의 영롱담을 볼 수 있다. 또한 동장대 층계 중앙부에 너른 사각기둥 형태의 돌이 하나 놓여져 있는데, 말에서 내릴 때 발을 디딜 수 있게 한 노둣돌이다.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불리는 동장대 동남쪽으로는 지금도 국궁을 쏘는 사장이 남아 있어, 수원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동장대에 이어 동북공심돈을 만나게 된다. 동북공심돈은 서북공심돈보다 더욱 곡선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현재는 들어갈 수가 없게 잠겨 있다. 동북공심돈을 지나 계속 걷다 보면 지금까지 계속 따라 걸어왔던 성벽이 끝이 난다. 물론 당시에는 성벽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조심스레 건넌 후 다시 성벽이 있는 언덕으로 오르자. 여기서 바로 동북노대가 보인다. 이전에 서장대에서 보았던 서노대와는 달리 동북노대는 성벽에 연결되어 설치되어 있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동북노대에서 저 멀리 문루가 하나 보이는데, 화성의 동문에 해당하는 창룡문이다. 창룡문은 이미 지나쳐 온 화서문과 그 모양이나 규모가 엇비슷한데, 요즈음 들어 복원한 맛이 물씬 풍긴다. 특히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이곳 창룡문에서 볼 수 있는데, 석벽에 새겨진 창룡문의 축성기가 그것이다.

이미 본 화서문과 비슷하기에 금새 돌아본 창룡문을 뒤로하고 몇 개의 치와 포루를 지나면 이내 서울 남산 정상에서나 보았음직한 봉돈(烽墩)에 도착하게 된다. 봉화를 올리고 받던 기능을 하는 구조물이 봉돈인데 다섯 개의 커다란 연기통을 달았다. 봉돈은 연기를 올리는 수에 따라 의미를 달리하는데, 하나가 오르면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두 개가 오르면 적의 출현을, 세 개는 적이 접근 중이라는 것을, 네 개는 적의 상륙, 마지막으로 불길 다섯 개가 모두 오르면 적과 현재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당시 이곳 화성의 봉돈은 동쪽의 용인 석성산 봉수와 서쪽의 수원 흥천대 바닷가 봉수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화성의 봉돈은 성곽에 바로 연결되어 설치되었기 때문인 지 봉돈 벽에 바깥쪽으로 총구멍을 내어 실제 전투 시에도 화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였고, 봉화꾼들이 대기할 수 있도록 내부에 온돌 시설을 갖추었고 창고도 두었다. 한편 답사를 처음 시작할 때 이미 보았듯이 이곳에서도 화성 반대편으로 행궁과 서장대가 동서 방향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봉돈을 지나면 성벽이 물길에 의해 끊기며 남수구문이 있다. 남수구문은 화홍문의 북수구문과는 달리 홍예도 두 개 더 많은 아홉 개이며, 여담이 반원형이고, 결정적으로 문루가 없다.

일단 물길을 건너면 이젠 분위기가 바뀌어 수원 도심이다. 왁자지껄한 시장을 지나 팔달문에 이르면 자리만 옮겨 놓았지 마치 장안문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물론 팔달문은 숭례문처럼 도로에 의해 홀로 쓸쓸히 떠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보통 성문의 경우, 다른 어떤 문들보다 남문이 크다. 그런데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미 보고 지나온 장안문이 팔달문과 거의 비슷한 규모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안문이 상식과 달리 그리 규모가 큰 것은 임금이 서울에서 이곳 화성으로 올 때 북문인 장안문을 통해 입성하게 되고, 따라서 그 격을 높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곳 팔달문에서 남쪽으로 난 성벽을 타고 가면 서남암문을 지나 화양루(華陽樓)라고도 불리는 서남각루에 이르게 되는데, 서남암문은 이전의 암문들과는 달리 성벽 위쪽에 나보란 듯이 설치되어 있다. 한편 이곳에서 계속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오르면 답사를 시작한 서장대에 닿게 된다.

화성의 성곽 답사는 이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화성답사를 마쳤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행궁과 만석거(萬石渠), 사도세자 장조(莊祖)와 혜경궁 홍씨 헌경황후(獻敬皇后)가 합장되어 있는 융릉(隆陵), 안양 만안교 등을 답사해야 보디 완벽한 답사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되고 여유가 된다면 아예 정조의 화성 행차 루트를 따라 차분히 답사를 하는 것이 좋을 듯 하지만, 여유 없이 하루하루 바쁘기만 한 우리에게는 다소 무리가 될 수도 있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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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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