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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송광사를 떠난다. 떠나기 위한 의식은 '송광사 경내 순례'로 시작되었다. 그 동안 생활하면서 절의 요모조모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 많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지라 궁금증을 다 풀 수가 없었다. 순례가 시작되면서 묵언의 청규도 잠정적으로 해제되었으니 많은 것을 알게 될 것 같아 기대가 컸다.

송광사 경내를 오고갈 때 자주 떠오른 분이 있었다. 그 글의 문체 때문에 그리고 규범적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여 불우하게 살다가 간 소품(小品) 문인 이옥(李鈺, 1760-1812). 그는 소설 문체를 썼다고 삼가현(지금의 합천)에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송광사에 들러 하룻밤을 자고 갔다.

물고기 같이 눈을 가진 자, 발처럼 눈썹을 드리운 자, 봉새처럼 둘러보는 자, 눈을 감고 자고 있는 자....눈이 같으면 코가 다르고, 코가 같으면 입이 다르고, 입이 같으면 얼굴빛이 다르며, 얼굴이 모두 같으면 키와 체구가 다르고, 키와 체구가 같으면 자세가 다르다. 혹은 서고 혹은 앉고, 혹은 숙이고 혹은 옆의 것에 붙고, 혹은 왼쪽을 돌아보고 혹은 오른쪽을 돌아보고, 혹은 남과 이야기하고, 혹은 글을 보고 혹은 글을 쓰고, 혹은 귀를 기울이고, 혹은 칼을 지고, 혹은 어깨를 기대고, 혹은 머리를 떨구어 근심하는 듯 하고, 혹은 생각하는 듯하고, 혹은 기쁜 듯 코를 쳐들고 있다. 혹은 선비 같고, 혹은 관리 같고, 혹은 아녀자 같고, 혹은 무사 같고, 혹은 병자 같고, 혹은 어린애 같고, 혹은 늙은이 같다. 천 명이 모인 모임이요, 일만 명이 모인 시장 같다.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태학사)

이것은 이옥이 송광사 대웅전 동쪽에 있었다는 나한전을 묘사한 <남정(南程)>이란 산문의 한 구절이다. 이옥은 송광사의 여러 전각 중 이 나한전을 가장 인상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는 계곡 건너에 있는 '종이 만드는 곳'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곳에는 일꾼들이 종이를 만들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풀질을 하기 위해 몽둥이를 휘젓고 다 만들어진 종이를 말리기 위해 새끼줄을 거미줄처럼 치고 있었다.

이옥은 송광사의 역사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한 사실도 그냥 '이 절은 큰 스님이 장엄하게 입적한 곳이다'라고 간단하게 지적했을 따름이다. 대신 송광사에서 '시장'과 '공장'을 보았다.

세속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찰에서 가장 세속적인 것을 발견하다니. 시장과 공장, 그리고 거기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한적한 절간에서 품위있게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과 둘이 아니라는 것, 만일 그들이 둘이라면 스님들보다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거나 노동하는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고 싶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이옥이 500여 나한들을 보고 감탄했던 나한전은 지금 자취가 없고 종이 만들던 공장도 흔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하루 밤 묵은 곳이 내가 자는 이 어름이겠지 생각하며, 신산한 삶을 살다 간 문인의 일생을 그려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뒷날 어느 문인이 또 이곳에 잠시 들렀다가 내가 쓴 이 글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찰순례는 지눌이 꽂은 지팡이가 자라서 되었다는 고향수(枯香樹)에서 시작되었다. 고향수는 보조국사 지눌이 향나무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자란 것이라 했다. 지눌은 '너와 내가 생사를 같이 하리라. 내가 떠날 때 너도 또한 떠날 것이다. 어느 봄날 너에게 푸른 잎이 돋아나면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라는 시를 지었는데 과연 그 지팡이에서 이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뒤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나무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친 울타리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돋군 게 화근이었다. 나무를 되살리는 방법은 나무를 보호하던 울타리를 없애는 것이었다.

지도법사는 절의 역사와 불교 가르침을 적절하게 연결시켜 설명하여 수련생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었다. 무엇보다 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이 분위기를 달라지게 했다. 그런데 말을 하면 안되었기에 말을 하지 못했는데,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말하는 것이 어색했다. 말을 하려다가도 머뭇거리게 되고 한마디 말을 하고 난 뒤에도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는 후회가 생겼다.

그러나 곧 말을 하게 된 것을 환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말을 다시 하기 시작하니 남보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남보다 더 많은 말을 하여 으스대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길어진 자기의 말에 문제가 생기거나 남에 의한 반론이 제기되면 자기 말을 변명하기 위해 더 길게 말을 하였다. 반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의 말을 그냥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듣기만 하는 자신을 떠올려 자기가 열등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같았다.

또 묵언 때문에 서로의 사적인 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지내왔는데, 말을 하게 되니 말을 통해서 말하는 사람이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를 은근하게 드러내 으스대기도 하였다. 가령, 우담바라꽃이 정말 그런 모양으로 피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내가 인도에 가 보니 그렇더라"라든가 "어느 큰 스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라는 식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과시한 이상, 그런 자기의 위상을 훼손하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묵언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맛본 뒤라 그런 분란은 더욱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대웅전 안에서 말이 일으키는 분란을 보며 말로써 생계를 꾸려가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말이 시작되면서 집착과 불평등의 씨가 움튼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었다.

송광사 대웅전에는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인 연등불 석가불 미륵불이 앉아 있고 그 좌우로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이 서 있었다. 그 각각은 불교적 상징들을 보여주고 인상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사자를 타고 경전을 들고 있는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코끼리를 타고 넓은 세상으로 돌아다니는 보현보살은 실천을 상징하며, 머리에 아미타불을 이고 천개의 손과 귀를 가진 관음보살이 자비를 상징함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지옥의 모든 중생들이 극락으로 가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언을 하여 중생 구제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왜 그 이름이 '땅이 감춰준다'는 뜻인 지장(地藏)인가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옛날 남에게 한정없이 베푸는 부잣집의 처녀가 있었다. 처녀는 뭐든 아끼지 않고 남에게 주었다. 어느날 헐벗은 거지들을 거듭 만났다. 처녀는 그들에게 입었던 옷을 계속 벗어주었다. 마침내 속옷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헐벗은 또 다른 거지를 만났다. 처녀는 여자로서의 수치심조차 억누르고 마지막 옷을 벗어주고는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때 땅의 신이 그녀의 중요한 부위를 가려주었다. 그 처녀가 환생했는데, '땅이 감춰준다'는 이름은 이러한 전생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

대웅전 불단의 장식들은 무의미한 것이 없었다. 삼존불을 받쳐주고 있는 연대(蓮臺)는 특히 눈을 끌었다. 과거불과 미래불인 연등불과 미륵불을 받치는 연꽃은 오므라져 위를 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현재불인 석가불 아래의 연꽃은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다. 세상 꽃들은 해가 뜨면 꽃잎을 펴고 드리웠다가 해가 지면 오므려 봉오리를 만든다. 꽃이 스스로 폈다가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웅크리고 오므릴 힘이 없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 아닌가.

연등불에서 석가불로, 다시 미륵불로 나아가는 것은 봉오리였던 연꽃이 폈다가 오므리는 일련의 과정일 따름이었다. 연등불을 이어서 연꽃을 피우고 있는 석가불도 그 꽃을 접고는 연등불이 될 것이다. 석가불의 뒤를 이어 연꽃을 피울 미륵불도 석가불이 밟고 간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석가불 아래의 축 늘어진 연꽃보다는 오므려 위를 향하고 쉬고 있는 연등불과 미륵불 밑의 앙련이 더 찬란하게 보였다.

대웅전 불상 뒤 지하에 새겨진 반야심경 원문을 만져보고난 뒤 일반 관람객에게는 개방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갔다. 조실과 주지스님이 거주하는 집을 지나 대웅전 뒤쪽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행자 스님들이 예불을 하기 위해 대웅전 뒷문으로 들어오기 전 꼭 합장 반배하던 그곳은 국사전이었다. 송광사가 배출한 16조사를 모셨다. 실물 크기에 가깝게 그려진 조사들의 영정은 형언키 어려운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줄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야 했기에 모두 참배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마침내 대웅전보다 국사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집, 그래서 송광사에서 가장 높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예불을 볼 때마다 대웅전 뒤의 축대를 향해 앉았는데 그 축대는 어떤 집을 위한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절에서 대웅전 삼세제불보다 더 높으신 분은 과연 누구실까. 그곳에는 수선사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스님들이 참선 수행을 하는 곳이었다. 삼세제불보다 더 높은 곳에 수행하는 스님들이 앉아 있다는 것. 이런 가람 배치에 송광사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참선의 전통이 우리나라에서만 변질되지 않고 면면히 계승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지눌국사의 부도탑에 올랐다. 부도탑은 아주 작게 조성되어 있었다. 목조삼존불도 그러했지만 모든 것을 작게 검소하게 조성하려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부도탑에서 내려다보니 뭇 산봉우리들이 운무에 싸여 있었다. 연못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연꽃과 같았다.

오락가락하는 가랑비를 맞으며 불일암으로 향했다. 우거진 대나무들이 얼핏 나타난 여름 햇살을 아주 잘게 썰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까 걱정이 되었다. 호젓한 곳에서 한 마디라도 다시 말을 하면 공든 탑이 무너질 것 같았다. 일부러 일행으로부터 멀어졌다. 가파른 경사는 아니었지만 가끔은 쉬어가게 하는 그 길을 불일암에 주석하셨던 스님들도 오르내렸을 것이다.

불일암에 주석한 스님 중 한 분인 법정 스님의 수필에서 이 길이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그 구절을 떠올려보았지만, 스님을 뵙기 위해 이길을 올랐을 여성들의 모습만 환기되었다. 과연 불일암 별채에는 젊은 스님이 한 여성과 앉아 있었다. 스님은 많은 수련생이 들이닥치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스님이 얼마나 불편할까 여기니 참 미안했다. 저 여성은 깊은 산중에 혼자 있는 스님을 방문하여 저렇게도 괴롭혀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여성이 스님의 여동생일 수도 있고 친척일 수도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주지는 않았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불일암 옆의 자정국사 사리탑 쪽으로 갔다. 거기서는 지도법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 무리의 수련생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가 자연스레 일상생활 중의 수행에 대한 것으로 몰렸다. 운전하면서도 좌선을 할 수 있나, 일상생활 중에 얻은 것도 화두로 삼을 수 있나, 불교의 포교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나, 해인사는 크게만 나아가고 송광사는 작게만 나아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갖가지 화제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서서 발언하는 수련생마다 자기가 '초심자'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 말의 수준이 녹록치 않았다.

갑자기 지도법사가 고함을 질렀다.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가 지적받았던 그 여자 도반이 지도법사가 말씀할 때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도법사는 당장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녀도 잽싸게 사라졌다. 사찰들이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 선교원을 왜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지도법사의 언성은 높아졌다. 사찰에는 돈이 없다, 송광사의 일년 수입이 도시의 작은 교회만도 못하다, 이번 수련회가 시작되기 직전에도 송광사 스님들은 수련생들이 먹을 쌀을 꾸려 다녔다, 가난한 사찰이 선교원을 세우라고 요구하지 말고 스스로 돈을 희사하여 선교원을 만들어놓고 스님들을 부를 것을 생각하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옮겨가면서 분위기가 굳어졌다. 그냥 가볍게 질문한 도반은 뜻밖의 꾸중에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마침내 수련생 사이에서도 언쟁이 일어났다. 초심자를 자처한 어떤 도반이 화두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화두를 잡는다는 것이 화두의 뜻을 연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화두의 말 자체를 외우라는 것입니까?

좌중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나는 왜 그 말이 끝나자 웃음소리가 났는 지 이해되지 않았다. 더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그 웃음이 그 말에 대한 것이 아닌 듯했는데, 말한 도반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낸 것이었다. 말이 이렇게 정확한 소통을 어렵게 하기도 했다. 초심자를 자처한 그 도반은 자기가 초심자 대접을 받았다고 더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그 동안 묵언으로 이루었던 마음의 평정과 평화가 서서히 깨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니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하산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저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서서히 입술과 혀에 힘을 실어 말 싸움 연습을 해야 했던 것이다.

불일암으로부터 내려오는 발걸음에 힘이 빠졌다. 불일암 벽에 걸려 있던 눈덮힌 히말라야 그림이 떠올랐다. 산에서 산을 그리워하는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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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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