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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간에 걸친 국정감사가 끝났다. 그러나, '이용호 게이트'를 둘러싼 무수한 의혹과 공방속에 정작 정책감사를 충실히 준비했던 의원들의 질의는 쉽게 묻힐 수밖에 없었다. 국감 전에 열린 한 토론회 자리에서 "아무리 정책감사를 열심히 준비해도, 언론이 잘 다루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한나라당 관계자의 우려는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정기국회를 맞아 의원들과 보좌진들이 정성을 쏟아 내놓은 정책자료집의 주요 내용들을 소개한다.

추수기를 맞아 쌀값 폭락으로 도탄에 빠져 있는 농민들의 분노와 허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다. 여기에 오는 2004년엔 WTO 농업재협상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도 필요한 시점이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지난 90년대 우루과이 라운드 농업협정에 대한 농민들의 강한 저항에 직면해야만 했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쌀 관세화 예외를 적용받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필리핀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미국과 호주 등 쌀 수출국들의 요구도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쌀산업에 대해 정치권의 준비와 시선은 미비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선거때만 되면 '농촌사랑'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정책 생산과 법안을 마련해 농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정치인들의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

지난 9월 민주당 김영진 의원이 발간한 정책자료집 <쌀산업의 발전방향>의 중요성도 바로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3대 국회에 들어온 이후 줄곧 농림해양수산위에서 활동하며 상임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던 김 의원의 이번 자료집은 크게 ▲쌀산업의 의미와 과거 양정기조 ▲쌀수급 여건의 변화 ▲쌀산업의 당면문제 ▲쌀산업의 발전방향 ▲WTO 농업협상과 쌀 등으로 알차게 구성돼 있다.

자료집 인사말을 통해 김 의원은 "쌀은 우리의 삶이자 역사이며 민족의 생명산업으로 농가소득의 23.8%, 농업소득의 52%를 차지하고 있다"며 "그러나, 생산량의 지속적인 증가로 농가에선 쌀가격이 20%이상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고 대책마련의 중요성을 촉구한다.

농민들의 반발이 표출된 이후인 지난 10월 16일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이 농림부장관에게 "쌀값안정대책을 마련하여 농민들의 걱정을 덜어 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김 의원의 자료집 발간보다 한달여나 늦은 정부의 조치는 아쉽게만 느껴진다.

지난 20일 정광훈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 "도탄에 빠진 450만 농민이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려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야 정치권은 부정부패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다"며 "만일 당면한 쌀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분노한 농민의 거센 저항은 결국 여야정치권을 향할 것이다"고 강도높게 대책마련을 요구한 것도, 현재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농가 안정이 최우선

쌀농사의 역할이 경제적·생태적인 면에서,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춘천댐 저수량의 24배에 달하는 홍수조절 기능과 토양보전 등 공익적 역할은 가히 금전적으로 추산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게 김의원의 설명이다.

자료집은 현재 쌀값 폭락의 가장 큰 원인을 쌀 수급 여건의 변화에서 찾고 있다. 농산물 시장개방과 농업생산력의 확충 등으로 국내 농산물 가격이 전반적으로 하락함에 따라 정부가 가격을 지지하는 벼농사가 가장 안정적인 소득원으로 부각됐고, 그 결과 96년 이후 재배면적이 증가됐다는 것.

이와 함께 품종개량과 생산기반 확충 등으로 단위당 수확량을 늘려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식품소비패턴은 오히려 서구화돼 국민1인당 소비량은 감소됐기 때문이라는 게 김 의원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90년대 초반만 해도 88∼98% 수준이었던 쌀자급율이 96년산 이후엔(98년산 제외) 자급률 100%를 상회하게 됐고, 양곡연도말 적정재고율도 적정선인 16%를 넘어 올 10월말이면 소비량의 30%수준인 989만석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자료집은 예상하고 있다.

그럼, 이런 쌀 수급의 비균형으로 촉발될 수 있는 쌀값하락과 농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어떤 대책이 필요한 것일까? 김 의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첫째로, 쌀산업 정책의 기본은 무엇보다도 농가소득의 안정에 최우선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업이 과거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기는 커녕 더 큰 희생을 강요받고 있으며, 위기의식도 고조되고 있어 농가경제 전반에 걸친 충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
여기에 식량안보와 남북관계 변화 등을 감안한 정책검토와 벼농사의 경쟁력 제고, 국제무역환경변화에 대한 적응 준비도 김 의원이 제안한 사항들이다.

둘째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미질중심의 생산정책 전환이다. 지금까지의 정책이 증산위주의 그것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한 만큼 고품질, 환경 농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와 함께 그간의 정부 수매규격이 다수확 품종 수매 규격에 맞춰어져 있는 만큼 기준을 양질미 규격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국내 쌀농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설로 미곡종합처리장(이하 RPC)의 역할을 강조하는 김 의원의 제안도 주목할만하다.

그는 세 번째 발전방향에서 "RPC는 이미 쌀농사에 없어서는 안될 영농 편익시설 및 유통시설로 자리매김했다"고 설명하며 "RPC는 쌀 산업발전을 위한 사회 간접자본으로 시설설치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등 보조를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네 번째로 김 의원이 제안하고 있는 사항은 강력한 쌀소비촉진 정책의 전개이다. 쌀의 중요성을 홍보하고 대대적인 운동을 벌여나가야 하며 필요하면 농림부·기획예산처·교육인적자원부·국방부 등의 적극적인 협조까지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최근 일부 언론사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우리쌀 살리기 캠페인'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그는 "남한의 쌀과 북한의 지하자원, 곡물류의 교역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며 "이같은 먹거리를 통한 북한과의 교역은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민족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자료집엔 국내 학자들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근거로 오는 2004년 WTO 농업협상에선 '쌀을 관세화하여 수입자유화하는 것'보다, '개도국 지위와 현행 수입제한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높은 수준의 쌀 자급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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