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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 집은 강가 하천부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나는 그 땅의 향기와 감촉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밭이랑에 앉아 꼼지락거리고만 있는 듯했지만 저녁무렵이면 놀랄 만큼 많은 일을 해놓았다.

나는 어머니의 꽁무니에서 흙장난을 치다가는 풀숲에 누워 풀향기에 취했다. 그리고 강을 굽어보았다. 강에는 배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고깃배들은 투망을 하고, 모랫배들은 상류의 모래를 싣고 아래로 달음박질쳤다. 그 사이로 가끔 돛도 없는 길다란 배가 느리게 강을 거슬러 올라가곤 했다. 똥을 실은 똥배였다. 똥배는 부산 시민의 똥을 싣고는 강가의 밭과 논에 뿌려주었다.

구렛나룻 검은 사나이들은 강밭을 향해 '어이, 어이' 소리치며 그냥 지나치다가는 꼭 한번은 우리 수박밭 어귀에도 배를 대고 똥을 뿌려주었다. 뿌려진 똥은 아주 독한 냄새를 풍겼지만 이윽고 그 냄새는 흙과 풀의 향기와 섞여 그윽한 냄새로 승화되었다. 그것은 수박꽃 향기였다.

수박은 뙤약볕 아래에서 스스로의 힘을 이겨내지 못해 쩍쩍 갈라질 정도로 잘 익었다. 똥이 수박으로 영근 것이다. 나는 부산 시민의 똥으로 기른 그때의 우리 밭 수박만큼 달고 맛있는 수박을 아직까지 먹어본 적이 없다. 그 맛이 그립다.

똥에 대한 기억은 그 뒤 까마득히 잊혀졌다. 부산 앞 먼 바다가 분뇨선이 버린 똥으로 오염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유년의 똥에 대한 기억이 수련회 기간 중 되살아났다. 나는 화장실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면서 그리고 화장실 청소당번으로서 화장실 곳곳을 닦고 쓸면서 송광사 화장실을 찬찬히 살피게 되었다.

송광사 화장실은 근심을 풀어준다는 뜻의 '해우소(解憂所)'란 팻말을 붙이고 있었다. '화장을 하는 집'보다는 '근심을 풀어주는 장소'란 말이 우리의 경험에 더 가까이 닿아 있는 것 같았다.

화장실 앞에는 화장실 넓이만큼의 연못이 있었다. 연못 위로는 수많은 잠자리들이 이리저리 날다가는 가만히 공중에 멈춰 서기도 하였다. 잠자리가 물 근처에서 서식하는 곤충들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높은 층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잠자리들의 생활터전이요 번식처인 작은 하천들이 심하게 오염되고 초여름 가뭄과 제방 공사 때문에 그 물도 말라 잠자리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으며, 그 때문에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니까 그 연못 위의 잠자리들은 속세에서 살 곳을 잃고 피신해온 중생들이었다. 송광사 해우소는 떠돌이 잠자리들을 거두어주었다.
살 곳을 마련한 잠자리들은 한없이 기쁜 듯 어지럽게 날아다니다가도 배를 둥글게 구부려 다른 잠자리의 꼬리에 붙이고는 교미를 하였다. 그들은 새로 찾은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을 준비해주고 있었다.

연못 수면에는 몇 주의 수련들이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었다. 더러운 진흙탕, 화장실 옆의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수련의 꽃봉오리는 불법의 오묘함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차수를 하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연못 뒤 돌다리에 올랐다. 다리는 해우소 회랑과 연결되었다. 회랑 입구는 종루에 걸린 범종의 윤곽을 하고 있었는데, 녹색바탕에 희고 검은 긴 줄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 오래된 중국음식집 연회장에 입장하는 것 같았다.

화장실 바닥은 전부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 바닥에 적당한 간격으로 직사각형의 구멍을 내고 사이 사이를 막아 변을 보게 하였다. 가만히 앉아 아래를 보니 똥이 쌓인 바닥이 훤히 나타났다. 그곳에서 풀냄새가 올라왔다. 이곳저곳으로 낙엽이 뒹굴기도 하였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떨어진 똥이 일정한 두께가 되면 다시 풀과 흙이 뿌려질 것이다. 그래서 거름으로 숙성된 똥은 절의 김치며 국이 될 배추와 무에 뿌려질 것이다. 똥이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똥의 생산성에 대해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가졌던 분이 연암 박지원 선생이다. 연암선생은 "예덕선생전"에서 똥을 나르는 엄행수의 삶을 그렸다. 엄행수는 뒷간의 똥, 마굿간의 말똥과 쇠똥, 닭이나 개·거위의 똥 등을 모아 왕십리, 살곶이다리, 서대문, 청파, 이태원 등으로 날라주었다. 사람들은 그 똥으로 무며 가지, 그리고 오이, 수박, 고추, 미나리 등 한양 사람들이 먹을 온갖 채소들을 재배하였다.

연암 선생은 엄행수가 똥을 져다주고 밥을 먹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하겠으나 그가 밥벌이하는 일의 내용을 따져 보면 지극히 향기롭다고 찬양했다. 그래서 엄행수의 이름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또 연암 선생은 필생의 소원이었던 청나라 여행을 했을 때도 이런 글을 썼다.

똥오줌이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밭에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라기같이 아낀다. 길에는 버려진 재가 없다. 말똥을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메고 말꼬리를 따라다니고 있다. 이렇게 모은 똥을 거름칸에다 쌓아두는데 혹은 네모 반듯하게 혹은 여덟모가 나게 혹은 여섯모가 나게 혹은 누각 모양으로 만든다. 똥거름을 쌓아올린 맵시를 보면 천하의 문물제도는 벌써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똥거름이 장관이라고. 도대체 왜 하필이면 성곽과 연못, 궁실과 누각, 점포와 사찰, 목축과 광막한 벌판, 수림의 기묘하고 환상적인 풍광만을 장관이라고 말하랴.(열하일기)

연암 선생이 선진국 청나라에서 발견한 가장 위대한 장관은 똥이었다. 똥을 재활용하는 청나라 사회의 경제적 생산성을 감탄한 것이다. 똥을 글쓰기의 중심에 놓은 연암 선생의 혜안이 우러러 보인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올까 살펴보았다. 해우소의 아래 벽은 나무 막대기를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 놓은 것이었다. 바람이 그 틈으로 불어왔다. 똥이 바깥 바람을 쐴 수 있게 한 것이다. 시시각각 햇살도 비쳤다.

그리고 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해우소 아래 쪽이 흙담으로 정성스레 둘러져 있는 것이었다. 담은 바깥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쌓여 있는 똥을 보호해주고 있는 것으로도 보였다. 담이 있으니 대문도 있었다. 그 대문은 똥에게 밖으로 나가는 길을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똥은 우리 몸의 한 부분이었지만 우리 몸의 가장 더러운 것들이 모인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내팽개쳤다. 그런 똥에게 송광사 해우소는 극진한 대접을 해주고 있었다. 담과 대문이 있는 집 안에서 똥은 풀과 흙을 덮고서 재생의 꿈을 꾸고 있었다. 해우소 바닥에서도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수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송광사 해우소는 가장 더러운 것이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고귀한 것이라는 불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더러운 진흙탕 연못과 똥은 새 생명의 탄생을 예비하는 감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물질의 순환과 재활용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미덕이면서 우리 생활문화사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정신이라는 진실을 되새기게 하였다.

나는 거름으로 되살아난 똥이 우리 시대 예덕선생들의 수레에 실려 해우소의 대문을 나서는 찬란한 모습을 꼭 보고 싶다. 고향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똥배의 모습이 다시 보고 싶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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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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