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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은 성당에서 교육이 있는 관계로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였습니다. 조그만 가방에 준비물을 챙기다가 교육용 수첩 뒷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낯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몇 달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글씨였습니다.

아는 분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주 서투른 어머니의 글씨, 그러나 정성이 많이 들어간 어머니의 글씨가 아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15세에 어머니는 18세인 아버지와 결혼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거짓말 같고 웃음이 나오지만 옛날에는 많이 그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네 자녀와 함께 생활하며 때때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학교에 잘 다니는 것이 이 에미한테는 가장 큰 기쁨이다. 이 에미는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 가방 메고 공부하러 다니는 것이 가장 부러웠단다. 12세 때에 딱 한 달, 그것도 조선인 청년한테 야학 공부한 게 전부란다. 얼마나 공부가 재미있었던지.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단다. 한 달만 더 했더라면 하고 무척 아쉬워했지."

어머니의 연세 53세 때에 저는 군대에 나갔습니다. 직장을 다니다가 입대하였기 때문에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머니는 꿋꿋하게 솜틀을 하시며 집안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33개월 군 생활 동안에 어머니는 세 통의 편지를 큰아들에게 보냈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20년이 지난 그 편지를 이번에 다시 보았습니다. 앨범 맨 첫 장에 세 통을 차례로 붙여놨는데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아들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뜨거운 모성애를 새삼 느꼈습니다.

단 한 달밖에, 그것도 야학으로 공부한 것이 전부인 어머니. 한 달만 더 공부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는 어머니의 정성이 글자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정열아바다아라
엄아가답장을했쓰니말이안되도마을만드러서바라네편지는잘바다보아다5월이십4일날토여일날너올대을고대기다려는대그날못온다고해서뭇척서운해찌만할수인니................엄마가해가는사업도그전배가수입이뒤가니간너무집걱장을하지마라.............너도잘알게찌만성열이가학교에몬나가고잇다언제나가게딀련지모루게다그름이거스로큿친다아무쪼록몸겅강익게을바란다
5울25일날찌다" (첫 번째 편지에서)

"정열아이편지바다보아리
네편지는잘바다보아다바로답장을 못태주서미안하다그간몸겅강이군대생활잘하고잇는지궁굼하고나이곳전아무별거옵시큰누나네도자근누나네도다들무거하다.............집에대해서아무겅정하지말고네몸이나생각해서모든힘을다하여주님에곳통을생각해가며차마가며열심이군대생활을해가길바란다..............아무쪼럭몸겅강이잇키을바라나이만끗친다멈마가궁굼치안케편지나자주해다우
829일" (두 번째 편지에서)

"정열아받아보아라
궁금하던차에네편지을기뿌게잘받아보앗다이곳엔는앗무별고업시잘잇다..............큰매부가낙구을한차을갇아주서뜹뜻타하게잘때고잘지나고잇쓰니너나아무쪼록몸겅강이잘익기을바라나아무쪼록네부화을데리고잘지네며몸겅강하길바란다시간이짜이더라도뜸뜸이주님께항쌍기도을밧치도록해라...............엄마가주님에은해을마이바더서그몹시아프던병도낙고몸겅강이잇짜안니미듬과주님에곳통을생각하며모든곳통을차마나가며야중에는기이도라오리라성열이가이편지을일거보더니한밧탕우서넝교다밧침이안듸니말을만드러서보아라그름이거스로끗친다
아무쪼록몸겅강이잇길바란다" (세 번째 편지에서)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한 달 야학으로 배운 실력(?)을 총동원하여 방에 엎드려서 군에 간 아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셨을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루종일 솜 트시느냐고 고생이 말이 아니었을텐데 이 아들을 위하여 밤에 시간을 내어 편지를 쓰신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글자가 많이 틀렸어도 아들은 기쁘게 눈물을 글썽이며,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에 잠겨서 어머니의 편지를 아주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깃든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들어간 때가 1980년입니다. 저는 1979년 가을에 입대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교육열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문에 동생이 학교에 오랫동안 다니지 못한 것을 어머니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두 누나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것도, 어머니의 병환이 믿음을 통하여 많이 좋아졌다는 것도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난 4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방에 걸려 있는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봅니다. 5년 전 어머니 칠순 잔치 때에 가족이 모여서 찍은 사진입니다. 환한 미소를 짓고 계십니다.

이제 어머니는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남아 있는 어머니의 편지가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며 가족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하늘 나라에 가신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어머니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건강을 위하여 늘 기도하고 염려해 주신 어머니. 그 어머니의 사랑 덕분에 이렇게 저는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사랑을 저도 실천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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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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