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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의 새로운 당정개편안에 대해 정가의 모든 이목이 집중됐던 지난 7일 오전,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선 '한국정당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화해와 전진> 5차 포럼이 열렸다.

정기 국회 기간 동안 소속 여야 의원들의 빡빡한 일정을 맞춘다는 게 힘들기 때문에 당분간은 조찬 형식이나 강연 등의 형식을 빌릴 예정이라는 관계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번 토론회는 실질적으로 올해의 마지막 포럼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정치권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면서도,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는 '정당개혁'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번 토론회가 갖는 의미는 컸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DJP 공조 파기'로 비롯된 정치권 내의 숨가쁜 구도변화의 영향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이번 포럼은 다른 때에 비해 한산한 모습이었다.

한나라당에선 사회를 맡은 이부영 부총재, 김원웅, 서상섭 의원이 자리를 함께 했고, 민주당에선 정대철 김원기 최고위원과 강성구 의원이 참석했다. 이밖에도 김상현 박정훈 유인태 전의원을 비롯, 김태진 동아투위 위원장, 도천수 푸른정치연대(준) 공동대표, 언론인 임재경씨 등이 모여 '정당개혁'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카르텔형 정당

주제 발표를 맡은 경남대 심지연 교수는 먼저 정당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당은 역사적으로 19세기 말에 출현한 간부정당,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대중정당, 20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망라형 정당순으로 발전 진화돼 왔으며, 최근 들어 카르텔정당이라고 하는 새로운 유형이 출현해 유권자와 정당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

이어 그는 "우리의 경우도 망라형 정당을 거쳐 카르텔 정당의 출현으로 외형적으로는 서구와 같이 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당원문제·당비 납부문제, 당의 운영문제 등에서 간부정당의 수준에 머물러 전근대적인 요소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이념정당의 결성을 원칙적으로 봉쇄해 정체성 형성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것. 심교수는 이어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정당의 출현도 이뤄졌지만 8·15 방북단 사건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듯 아직까지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 정도로 여건이 성숙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오랜 기간 견고하게 굳어진 지역주의도 정당의 정체성 형성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악순환의 고리까 깨지지 않고선 한국정치의 미래는 밝아보이지 않는다는 게 심교수의 전망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역감정에 기초한 정체성이 아닌 새로운 무엇이 형성될 필요가 있다"며 그 몇 가지 대안으로 통일정책을 통한 정체성 형성과, 개혁정책을 통한 방법을 제시했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추진하고, 이에 동조하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하여 그 취지를 확산해 나가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 심교수는 이처럼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그 외연을 확대해 나가야만이 정당으로서의 발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기존정당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정당으로서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포럼>의 사명

지정토론자로 나선 염재호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한국정당의 위기와 국민들의 정치불신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심교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관적인 전망을 폈다.

"새 천년을 맞아서도 정치이념의 실종과 장기 전략의 결여, 카리스마의 일상화 문제 등 다른 사회적 변화에 비해 정치는 여전히 '짜집기 정당'이라는 교착상태에 놓여 있다. 현실적으로 3김 정치와 지역주의를 극복해야 하는데 올해와 내년이 새로운 틀을 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관성은 크지만 그만큼 가능성도 크다. 이런 점에서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화해와 전진> 포럼은 희망을 준다"

염교수는 이어 우리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정치적 언행의 훈련에 좀더 노력하고 예비선거 등의 민주적 절차를 제도화한다면 정치에서 멀어져간 30·40대가 다시 참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손호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고민의 시작을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특히 87년 양김의 분열은 ▲문민정부가 5년 늦어짐 ▲군사독재 세력이 3당합당·DJP연합의 형식으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됨 ▲지역주의의 전면화 ▲민주화운동진영의 분열 등 4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고 지적하며 포럼의 활동은 지난 잘못을 봉합하는 움직임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미 보통 명사화된 3김정치와 '이부영-정형근', '김근태-엄상탁'으로 대표되는 분열을 바꿔나가는 것이 <포럼>의 사명이라는 것.

이어 손교수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인 지역주의를 타파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은 전근대적인 지역이 아니라 근대적인 계급/계층적 이해관계에 의해 보수-진보의 균열구조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왜 안되나?'

이외에도 김상현 전의원은 "정치개혁 없이는 어떤 개혁도 없다"고 전제한 뒤 "실천할 때가 됐다. 개혁신당이 대선이나 총선을 통해 나설 수 있는 객관적 환경이 조성된 만큼 어떤 체계와 이념으로 국민에게 호소할 수 있나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할 때다"고 주장했다.

김원기 최고위원도 "3김 정치는 단기계획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대단한 갈등 속에서 정체성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임전장관의 해임안건은 집권당으로서 큰 타격이지만 장기적으론 정체성을 얻은 셈이다"고 지적했다.

유인태 전의원은 여권의 최근 상황을 겨냥했다. 그는 민주당 대표 내정에 대해 "김대통령의 퇴임 후를 고려, 지분과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게 아니냐"고 우려한 뒤 "당을 떠나 국정에 전념하지 않는 한 정권재창출은 힘들 것이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서상섭 의원은 "국회에 들어와보니 '정체성 별로 없는 정당'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 경험을 통해 볼 때 '국민적 지지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수백 명의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몸을 내던질 3,4사람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포럼> 소속 의원들에게 뼈아픈 말은 정치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발언에서 나왔다.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임재경 씨는 이부총재를 비롯한 한나라당 개혁성향 의원들을 겨냥해 "통일과 분단 해소라는 점에서 지난 임전장관 해임안 때의 행동에 대해 옐로우 카드 하나 먹었다고 생각하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최근 김대통령의 당정개편안에 대해 기대를 걸었지만, 결과를 보니 실망이 크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도 옐로우카드 받았다"며 여권에도 일침을 놓았다.

임씨의 발언으로 일순간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자 이부총재는 "이런 지적을 안 받는다면 <포럼>을 진행해나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큰 자산으로 알고 향후 활동을 해 나가겠다"는 말로 자리를 정리했다.

이어 이 부총재는 정릿말을 통해 "금방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더라도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모두 알고 있다. 87년 분열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일·개혁세력을 형성해야 한다"며 "그러면서도 안되는 이유가 용기가 부족해서인지, 개인에 집중돼서인지, 아니면 정치보복을 두려워해서인지 고민해보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많은 기대를 않고 출범했던 <화해와 전진> 포럼이 정기국회를 맞아 일단은 휴지기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년 지방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새로운 모색이 시행되고 있는 만큼 포럼에 속한 의원들이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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