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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수련회는 우리 불가의 고유한 전통인 화두 참선을 배울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송광사 및 그 말사에 계시는 고승대덕들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돋보이는 것 같았다. 각 분야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계신 스님들이 베푸시는 법 보시의 은혜를 입을 수 있으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분들의 말씀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귀를 세웠다. 그렇지만 내 자리는 비교적 뒤쪽이고 창문 옆이어서 스님들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을 때가 있었다.

흐르는 시냇물의 소리는 대단했다. 사자루 옆에는 조그만 폭포가 형성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간간히 내린 비는 시냇물 소리를 더 우렁차게 만들었다. 그 소리는 엄청난 소음으로 들리다가도 위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법음으로도 들렸다. 고승들의 말씀과 경쟁하는 듯 들리다가는 그 말씀에 동화되어 말씀의 속뜻을 더 오묘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기도 하였다. 고승들의 말씀이 시냇물 소리에 실리는 듯하다가는 시냇물 소리가 고승들의 말씀에 실리는 듯하니 나는 그 소리의 신비로운 향연에 넋을 맡겼다.

방장(方丈)이신 범일보성(梵日菩成) 스님이 법문을 내려주시고, 회주(會主) 법흥(法興) 스님이 법구경을, 유나(維那) 현묵(玄默) 스님이 참선법을, 주지(住持) 현봉(玄鋒) 스님이 반야심경을, 성철 스님 상좌이셨던 원순 스님이 진심직설(眞心直說)을, 강주(講主) 지운(智雲) 스님이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을 강의해주셨다.

고승들의 말씀은 오묘한 진리를 아주 쉽고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어서 그 말씀만 똑똑히 알아들으면 불법이 완전하게 꿰뚫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앞 자리에 있는 도반들이 참 부러웠다. 나는 말씀의 뜻을 깊히 이해하려는 데보다는 물소리와 함께 내 귓전을 감도는 그 말씀을 해독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의 세계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무엇보다 그분들이 방편술로써 이끌어오시는 불교설화나 일화들이 재미있었다. 나는 설화와 일화의 전공자로서 그분들의 해박한 설화 지식과 적확한 설화 해석 그리고 응용에 대해 감탄했다.

보성 스님은 송광사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위엄을 먼저 보이셨다. 연세에 비해서는 카랑카랑하다고 할 목소리로 논리 정연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중간중간 조는 수련생이 눈에 뜨이면 지도법사가 그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겨누고 계셨다.

보성 스님은 불교의 수행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난다' 하여 믿음을 강조했다. 믿음이란, 첫째 우리들의 마음에 불성이 갖추어 져 있다는 믿음이고, 둘째 진실한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며, 셋째 수행 정진하여 부처가 되면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공덕이 갖추어진다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신에 대한 일방적 믿음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의 믿음 개념과는 달랐다.

반야심경을 인용하며 우리 자신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의 노예 되기를 그만두고 그 주인 노릇을 하라고 강조하였다. 물론 수행 정진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수행 정진이 소중하다는 것을 부처님과 농부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인용하여 입증하였다. 어느날 농부가 수행하고 있던 부처님께 여쭈었다. "당신은 왜 그냥 놀고 먹습니까?" 부처님이 대답했다. "우리도 씨 뿌리고 농사 짓지요." 농부가 밭과 씨앗과 보습과 소가 어디 있느냐고 다시 물으니 부처님이 대답했다. "우리의 마음은 밭이고 믿음이 씨앗이며 지혜가 보습입니다. 우리가 없애려고 하는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악업은 내가 뽑아내는 잡초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소입니다."

보성 스님은 문화재 보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그날 일본으로 떠날 계획이어서 시간에 쫓기는 듯 말씀을 축약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야기도 청중을 솔깃하게 만들 정도로 충분히 전개되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가른다는 진리를 주시기 위해서 해주신 일본 무사 이야기가 퍽 인상적이었다.

어떤 사나운 무사가 칼을 차고 고승을 찾아가 지옥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다. 고승이 갑자가 무사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무사는 치욕을 당했다고 분개하여 칼을 빼어 고승을 죽일 기회를 노렸다. 그때 고승이 무사에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지옥에 있소"라고. 그러나 이 인상적인 이야기의 끝은 때마침 거세어진 물소리 때문에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의 일생이란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한 부처님과 사람들과의 문답 일화는 참선 수행 내내 화두와 같이 떠올랐다. 부처님이 사람들에게 '사람의 일생'이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물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라고 대답했고, 또 어떤 사람은 숨을 들이켜서 내쉬기까지라고 대답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뜻을 가졌다가 그 뜻이 없어지기까지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모두 그럴 듯한 대답이지만 그 무게가 다르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통념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만드는 그 일화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소망을 가진 나에게 수련 기간 내내 떠올랐다.

유나 현묵 스님은 선방의 윗 어른이시다. 시종 그윽한 목소리로 편안한 참선의 길을 인도했다. 세상의 복을 청복(淸福)과 탁복(濁福)으로 나누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한 현묵 스님은 당신이 청복이 많다고 하였다. 재산이나 명예와 관련된 탁복과는 달리 청복이란 좋은 스승, 좋은 도반, 좋은 도량을 만나는 복인데, 남을 위해 정신적인 보시를 많이 한 사람이 누리는 복이라고 설명했다. 현묵 스님의 얼굴은 청복을 많이 누린 사람의 얼굴은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였다. 오랜 참선으로 도인으로서의 기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온화하며 맑았다.

그 온화함과 맑음은 세속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부부로든 형제로든 이생에서 서로 만나기 위해서는 전생에서 100%의 완벽한 인연이 이루어져야 하기에 1%라도 인연이 모자라면 이생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생에서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만남에 의한 관계가 설사 원만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참선은 우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알기 위한 것이라 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존재하다가 보이는 세계로 모습을 나타냈지만 그 인연이 다하면 또 다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무명 업력에 의해 우리는 거듭 태어나지만, 그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영적 진화를 돕는 일 혹은 수행 정진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잘 사는 삶이며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 요약해주었다.

그리고 참선의 방법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먼저 마음을 편하게 하고 허리를 곧게 편 뒤, 숨을 길게 마시고 잠깐 멈추었다가 내쉬며 '이 뭐꼬?'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뭐꼬?'가 속으로 단순하게 그런 소리만을 내는 것인지 아니면 '이 뭐꼬?'하면서 세상과 자기의 근본에 대한 성찰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전자는 마음을 집중시키는 힘이 약한 것 같았고 후자는 사변적인 데로 빠질 위험이 커 보였다.

사실 참선 수행내내 내가 갖고 있던 인생의 본질과 천지만물의 운행원리에 대한 온갖 상식과 스님들로부터 들은 법문 내용이 계속 떠올라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그것이 화두 참선의 참 방법이 아닌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수를 차례로 헤아리는 수식관이나 뜻을 알 수 없는 음운의 연속인 염송법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어떤 칭찬이나 험담에도 개의치 말고 연꽃같은 참 나를 찾는다는 한 가지 마음으로 용맹정진하라고 수련생들을 따뜻하게 격려하고서 그윽한 목소리로 게송을 읊어 주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미 널리 알려진 이 구절이 스님의 목소리에 실리며 신비스런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참선의 방법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화두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이 이 게송에 다시 실렸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참선의 방법을 통해 득도한 옛 고승들의 일화와 깨달음의 시인 오도송을 소개하였다. '이 뭐꼬?'를 8년 동안 참구하다 홀연 깨달은 회양 스님, 20년 동안 수양의 진전이 전혀 없었는데 어느날 밭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깨달은 남전 스님, 56세 때 실수로 찻잔을 떨어뜨려 깨고는 크게 깨달은 허운 스님, 길 가다가 낮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서산대사, 새벽 예불종을 치다가 깨달은 만공 스님, 움막토굴에서 1년 6개월 용맹정진 끝에 깨닫고 벽을 부수고 나오신 효봉 스님, 그리고 화장실에서 변을 보다가 홀연 의심이 사라지는 경지를 얻은 송담 스님 등이었다.

출가 직전 심한 하혈을 시작하여 화장실을 들릴 때마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나는 화장실에서 득도를 하였다는 송담 스님의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만들어지는 것 중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라 버려지는 똥을 받아주는 화장실에서 득도를 하였다는 송담 스님의 이야기는 더러운 진흙탕에서 맑디 맑은 연꽃이 피어난다는 불가적 상징보다 더 충격적인 감동을 일으켜주었다. 그래서 송담 스님의 오도송을 잊을 수가 없었다.

누런 매화 핀 산정에 봄눈이 날리니
찬 기러기 북쪽 하늘로 날아가누나
어찌하여 10년 세월을 허비했던가
달빛 아래 섬진강만이 유유히 흐르도다

그날 저녁 화장실에서 변을 본 나도 놀라운 일을 겪었다. 뒤를 닦은 화장지에는 누런 잔변만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참선을 시작하면서부터 오랜 시간 동안 앉은 자세로만 있어서 항문에 대해 계속 큰 부담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혈이 완전히 멈춘 것이다. 아, 나도 화장실에서 환희심을 경험했다. 화장실에서 누런 매화를 노래하신 송담 스님과 그 송담 스님을 소개해 주신 현묵 스님의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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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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