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머니의 죽음은 내 유년의 화두였다. 온갖 힘든 일들에 육신을 혹사하고 생활고를 혼자 감당해야 했던 어머니는 나에게서 곧 멀어질 것 같은 나의 귀의처였다. 어머니가 없는 이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유년의 나에게 견디기 어려운 절망감을 일으켰다.

내가 중학을 다닐 때 어머니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음독 자살을 기도했다. 어머니는 살아났지만 나는 그 뒤로 삶의 고통과 죽음의 허망함에 대한 서글픈 망상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했다.

여름이면 고향의 강에는 홍수가 났다. 홍수는 강가의 벼와 배추, 수박과 갈대 등을 휩쓸어갔다. 그리고는 상류 지역의 온갖 생활 쓰레기들을 내려 놓았다. 나는 몇 번이나 쓰레기 속에서 물에 퉁퉁 불은 사
람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통곡하는 유가족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아야 했다.

그 슬픈 장면은 홍수로부터 시작되던 배고픔의 경험과 함께 내 유년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동묘지로 가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같은 염세적 내용의 책들을 읽거나 화장터 주위를 맴돌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를 바라보고 한숨 지었다.

군사정권 말기의 정치 상황은 대학 캠퍼스에까지 죽음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게 하였다. 나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그 죽음 앞에서도 내 유년에서부터 시작된 운명적 죽음의 흔적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 복무 중 겪은 한 전우의 죽음은 나의 망상을 더욱 부추겼다. 그 전우는 경계 근무를 하다 옆 사람의 소총 오발에 의해 사망했다. 그런데 죽은 그 전우의 자리는 원래 나의 자리였다. 급한 일이 생겨 나는
그와 근무 시간을 바꾸었던 것이다. 나는 전우를 죽게 하여 내 죽음을 미루었던 셈이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의 소중한 목숨을 희생시켰다는 상념에 망연자실하였다.

이 상념은 날이 갈수록 확장되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의 희생을 전제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항상 떠올리게 되었다.

마침내 타인의 죽음에 대한 망상은 나 자신에게 덧씌워졌고 타인의 죽음에 대한 서러움이나 안타까움이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 변해갔다. 내 몸에 생기는 병적 증상에 대해서 최악의 자체 진단을 내리는 습관도 그 무렵 시작되었다. 나는 일년에 몇 번씩은 말기 암 환자
가 되었다. 그리고 고통의 극에 이르렀을 때 병원의 정밀 진찰을 받고
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싯다르타 태자로 하여금 출가를 결행하게 한 네 가지 고통 중 가장 궁극적인 고통을 겪으며 가끔 출가를 생각하였다. 물론 그 출가는 심정적인 것이었지 실천적인 차원의 것은 아니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뒤 아이를 얻었다. 나는 그때 41살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떠난 아이 엄마를 대신하여 아이를 키웠다. 소생하는 새 생명의 모습은 꽃보다 더 위대한 경이였다. 육아의 길은 고단한 여정이었지만 내 영혼은 가없는 열락으로 벅찼다.

그런데 그럴수록 가슴의 다른 한 켠에서는 죽음의 상념이 더욱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생육을 활기차게 시작하는 새 생명 옆에서 노회한 죽음의 신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에게는 단 하나뿐인 중학교 친구가 있다. 마산에서 소아과 의사 노릇을 하는 친구는 목사의 아들이다. 그 친구는 나에게 예수님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다. 그렇게 순수하고 헌신적인 기독교인을 쉽게 보지 못한다. 그와 나는 어떤 인연인지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 하고 헤어진 듯 하다가도 다시 만난다.

그가 의과대학 교수 자리를 그만두고 남몰래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을 때 나는 그를 이생에서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라의 정반대 쪽인 미국의 뉴욕 맨하탄 43번가 한국 식당에서 기적과 같이 다시 만났다.

나는 그때 교환교수로 미국으로 가 있었고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다 관광단의 일원으로 뉴욕을 방문하였던 것이었다. 인연이란 질기고 질기다는 것을 기독교인과의 만남에서 확인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얼마전 대구에서 다시 만났다. 팔공산 동화사 대불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친구는 물었다.
"너는 학생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라고 가르치노?"

확신에 차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을 나에게 줄기차게 이야기하던 친구가 불쑥 던진 질문이었다. 나는 속으로 교수는 인생의 목표나 삶의 자세를 가르치기보다는 지식을 전수하고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되뇌이다가 이렇게 얼버무렸다.

"교수란 자기가 갖고 있는 어떤 진리나 신념을 학생에게 강요해서는 안되지. 다만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니고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해 줄 수는 있겠지."

나는 부끄러워졌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확신이나 진실도 학생들에게 당당하게 제시할 수 없는 교수인 나는 정말 당당한가? 나는 젊은이들을 왜 가르치며 그들에게 진정 무엇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고 있었다.

아니 나 스스로가 인생의 본질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 유년부터 계속되어온 죽음의 공포에서 떨면서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40 고개를 넘어서면서도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을 대수로 삼았을 뿐 어떤 진리나 신념도 나 자신의 것으로 갖지 못하고 있는 초라함과 황량함이여.

나는 나 자신의 황량함에 익숙해져 현실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전반에 걸쳤던 대학시절과 그뒤 신출내기 지식인으로서 뛰어다닌 시절의 격동과 좌절의 체험에 닿아 있었다.

진실과 도리가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며 그 부당성을 극복하고자 나는 나름대로 몸부림쳤다. 그때 나의 내면은 좀더 과감하게 나아가라 명령했다. 그런 나를 둘러싼 타자들도 빨리 판단하여 결단하라 확실하게 파괴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결국 그 대부분의 몸부림은 좌절로 귀결되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함께 진보적 대열이 흩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군의 지식인과 정치인이 고개를 들고 나섰다. 날이 갈수록 우리의 현실은 암담한 진흙탕으로 변해갔다.

사실 판단에서조차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상반되기까지 한 이 지경은 진리나 정의를 그래도 소중한 덕목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적인 것이었다. 진실로부터 동떨어진 말, 자기 양심과 괴리된 말이 세상을 뒤덮은 것 같으니 이렇게도 말이 타락해도 좋은가.

지금도 우리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자기 속에 들끓고 있는 욕심과 분노와 거짓의 소용돌이를 잠재우지 않는 한 그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진실과 양심을 저버리고 사기 행각을 일삼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자신을 되돌아 보고 참된 나를 되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갖게 되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전국 주요 사찰들이 여름 수련회에 참가할 사람을 모집한다. 나는 이맘 때면 가슴이 설렌다. '한정 출가'란 말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출가하는 것을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이는 출가하려는 나의 발목을 꼭 붙잡아두고 있었다. 올해도 속절
없이 그냥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내의 박사 논문이 거의 마
무리 되어간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아내는 11년의 유학 끝에 박
사가 되어 곧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국제 전화로 조심스럽게 아내가 돌아오자마자 한정 출가를 할 수 있을까 물어 보았다. 조심스럽게 물어야 했던 까닭은 '출가'야말로 자기 남편으로서의 나에 대해 아내가 우려하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기꺼이 나에게 '11년만'의 휴가를 주겠다 약속했다. 나는 가깝기도 하고 평소 자주 찾아간 해인사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나 청동대불 건립 시비와 해인사 승려들의 실상사 폭력 사태가 세속인의 시비거리가 되고 있어 해인사를 배제했다.

사건이 일어난 뒤 두 절의 스님들은 연이어 참회의 단식에 들어갔다. 실상사 폭력 사태의 계기가 된 실상사 수경 스님은 단식 중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중 노릇 제대로 못했다. 지금까지 대접만 받으며 살아왔다. 남들이
'스님' , '스님' 하고 부르니, 그 이름에 함몰돼 내가 진짜 스님인 줄 착각하고 살아왔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자기 반성인가.
"스스로에게 정직하다는 게 이처럼 어려울까. 늘 스스로에게 속는다. 세상을 시비하기에 앞서 '내 안의 문제'를 풀기 위해 간절하지 못했다."

가해자를 시비하지 않고 피해자인 자신의 내면을 시비하는 그 반성과 참회의 말씀이 아름답다. 최근의 신문 기사 중 이렇게 빛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없다. 나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섣불리 분석하고 시비심을 발동시켜 사찰의 정신을 규정한 오만함과 천박함을 반성했다.

그러나 송광사와 나의 인연은 해인사에 대한 배제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 아내는 미혼이었지만 30 살을 앞두고 있었다. 집안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까닭에 공부를 포기하고 중등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끝내 뜻을 굽힐 수 없어 뒤늦게 학문의 길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착찹했던 마음이 짐작된다. 떠나기 직전 아내가 번뇌를 떨쳐내기 위해 송광사로 가서 하룻밤을 지냈다는 사실을 나는 나의 송광사 수련회 참가 결정이 난 뒤에야 알았다.

송광사는 유학을 떠나는 아내를 위해 마음의 안식을 주셨다. 나는 아내가 긴 유학을 끝내고 박사가 되어 돌아올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그 남편으로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도 송광사를 찾아가야 했던 것이다.

수련회 합격자 발표를 본 순간 나는 환호했다. 4 : 1의 높은 경쟁률은 내가 겪어온 시험들 중에서 그리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송광
사로부터 합격 서신을 받은 그 순간의 환희심보다 더 큰 것을 경험하
지 못했다.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갔다. 참선을 위한 준비가 가장 중요할 것 같았다. 나는 이미 기공과 명상 수련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그러니 정신적으로 따라가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지만, 문제는 항문에서 생길 것 같았다. 참선이란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니 고질병이었던 치질이 걱정되었다.

술을 조심하고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며 항문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좋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준비는 완벽한 것 같았다. 그런데 출가 이틀 전 교육대학원 연찬회가 있었다. 수십명의 제자들과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끊이지 않는 술잔을 마다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변기에 앉았는데 소리가 이상한 것 같아 일어나 보니 피가 변기 속의 물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혈이 시작된 것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결국 우려한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안 사람들이 아내의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축하연을 열어준다기에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날 고향 집 대문을 나섰다. 아내는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흔들며, "아이가 있으니 안 돌아올 걱정은 안 하지만"하며 배웅했다. 싯다르타 태자가 아들 하나를 두고 출가하셨고 성철 스님도 출가하실 때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내는 애써 모른 척 해주는 것이었을까?

덧붙이는 글 | 송광사 여름수련회 수행기는 8-9회 정도 나누어 연재하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