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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서 어제 또 한 사람이 생을 마쳤습니다.
뽀리기 앞 바다로 물 때 작업 나갔던 배가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출항할 때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잔잔하던 바다.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그 평화롭던 바다가 난데없는 광풍을 일으켜 배와 사람을 모두 삼켜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상여를 매고 구슬피 곡하며 장지로 향하는데 바다는 무슨 일이라도 났냐는 듯이 천연덕스럽기만 합니다.
오랜 가난을 벗어난 섬이 과거 어느 시대에도 누려보지 못했던 풍요를 구가하고 있으나 섬사람들의 운명은 여전히 원시의 시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장례 행렬이 바닷가 산길을 지나며 흙먼지 바람을 일으키고 갑니다.
바다는 미동도 없습니다.

돌아간 이의 죽음은 나를 잠시 망연하게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삶으로 돌아와 홍화와 들깨 밭의 김을 맵니다.
상추를 솎아내고, 담장가에 지천으로 핀 인동 잎과 꽃을 따다 차를 만듭니다.

죽음이 잠시 내 곁을 스쳐 영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또 영생할 것처럼 죽음 같은 것은 잊고 지냅니다.
집착하고, 소유하고, 욕심 부리고, 사납게 성내며 삽니다.
나는 늘 그렇습니다.
죽음은 죽은 자들의 것 일뿐, 산 자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섬 마을 상갓집에 저녁이 옵니다.
이 상갓집에도 죽음은 더 이상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이곳에서도 죽음은 여전히 망자의 것이고, 산사람들은 서로 인사하고, 떠들고, 윷놀이하고, 먹고, 마시기 바쁩니다.
늦게 도착한 나도 한 상 가득 주안상을 받고 취기가 오릅니다.
누가 죽기는 죽었는가, 아마 그는 산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본래부터 죽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삶으로부터 추방당한 죽음이 이제는 상갓집으로부터도 내쫓겨버렸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문풍지는 사납게 울고 풍경 소리 요란합니다.
대숲의 일렁임은 스산합니다.
마파람이 뿌리고 간 습기에 나는 물먹은 종이 장판처럼 눅눅해집니다.
적자산으로부터 장대비가 몰려옵니다.
이제 오랜 가뭄이 끝나고 긴 장마가 시작되려는가.
어제 이 섬에서 한 생이 먼 길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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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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