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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 자카르타로 가며 받아온 인도네시아의 정국에 대한 신문기사는 아주 급박한 것이었다.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국회의 조사가 임박한 대통령 와히드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비상상태를 선포할 태세였고, 군부는 여기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었으며, 부통령 메가와티 역시 공개적으로 와히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려 하고 있었다.

수십년간의 수하르토 철권 통치를 가까스로 물리친 후, 인도네시아가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여정의 길은 그렇게 혼란과 정쟁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정세속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고 '영웅'이라는 이름을 받은 인도네이시아의 학생운동은 이 고통의 한 가운데 있었다.

지난 23일부터 27일까지 서보르네오의 주도 폰티아낙에서는 전인도네시아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PMKRI의 주체로 전국대회가 열렸다. 이 전국대회는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이행기를 구원하라. save the transmision of the democracy in Indonesia'라는 주제로 강연과 토론, 그리고 실천 방안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PMKRI는 인도네시아내에서 꽤 유명한 민주주의학생운동단체로 이들의 세미나는 Kompas라는 인도네시아 전국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세미나에서 전체적으로 이야기된 인도네시아의 문제점은 이미 지난 3월에 중앙보르네오에서 불붙은 종족간 분규, 아체지역과 인도네시아령 파푸아 지역의 독립운동, 다양한 종교간 갈등, 군부에 의해 장악된 경제, 여전히 막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수하르토 일가의 문제 등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참석자들은 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수마트라에서 이리얀자야까지의 거리가 런던에서 테헤란까지의 거리와 맞먹는 거대한 나라인 인도네시아를 '중앙집권적 개발 정책'으로 통치한 수하르토의 정책에서 찾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요컨대 '인도네시아'라는 정체성 자체가 전 네덜란드 식민지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도저히 '중앙집권화'할 수 없는 다양성과 복잡성의 나라를 단순화하여 통치한 수하르토 독재정치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중앙보르네오섬의 인종분규만 하더라도 토착종족인 다이약과 수하르토의 이주정책으로 자바근처 지역에서 보르네오 섬으로 이주한 종족 사이의 경제적 격차에서 비롯되어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로 비화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세미나의 참석자들이 한결같이 제시한 해결방안은 '다원주의', '탈중앙집권화', '연방주의' 등의 가치아래 교육에서부터 군사주의에서 탈피하여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모두가 동등하게 대접받을 권리'와 '다르게 살 권리'라는 인권의 가치에 기반하지 않는 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 이들의 진단이었다.

그러나 막상 학생운동의 고민은 보다 현실적인 것에 있었다. 그것은 당장 인도네시아를 뒤흔들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불안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와히드의 구상을 지지한다. 그는 탈중앙화와 다원주의를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지식인 정치가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그것을 실행에 옮길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구상을 전혀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요컨데 옳은 이념과 좌표에도 불구하고 와히드 자체가 정치사회 불안의 핵심적 요소인 것이다. '메가와티는 와히드에 비한다면 군부와 보다 가깝다. 그리고 그녀는 중앙집권을 선호하며, 지금 당장 가장 큰 문제인 분리주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강경한 입장이다. 그녀의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현재의 불안을 관리하고 해결할만한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녀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다.'

회의에 참가한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정치적 변화-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권력의 변화'라는 것이었다. 3박 4일동안의 대격론 끝에 그들은 '와히드와 메가와티'라는 정치적 선택을 떠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다원주의와 연방주의를 기초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학생운동이 요구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그들은 '와히드와 메가와티'라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처한 가장 큰 딜레마였다.

이밖에도 이들 역시 학생들의 전반적인 탈정치화 경향에 어떻게 대처하여야할 것인가라는 점을 둘러싸고 격론을 벌렸다. '수하르토 통치시기에는 호르라기만 불러도 몇천명이 모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백명 모으기도 힘들다. ' 따라서 보다 구체적이고 생동감있는 교육커리큘럼과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주장에 대한 공통된 인식에도 불구하고 '누가' 그것을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는 아주 뜨거운 감자였다.

수많은 다양성과 차이속에서 전반적으로 지역단위들은 '공통된 커리큘럼'이라는 것 자체에 심한 반발을 하였고, 이 문제는 어떻게 '인도네시아'라는 전체적인 단결을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로 비화되어 늘 격론의 대상이 되었다.

이 세미나 후 자카르타에서 일종의 자유정보화운동-일종의 카피레프트 운동과 한국의 대학가 사회과학서점 운동이 겸해져 있는 - 단체 등 다른 NGO 활동가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이들중 몇몇은 인도네시아 학생운동이 이런 딜레마에 빠진 가장 큰 이유를 풀뿌리운동과 결합하지 못한 정치 운동의 한계로 설명하였다.

특히 이들은 학생운동이 중앙정치중심적 활동에 집중하는 것에 아주 비판적이었다. 대다수의 학생운동은 이념적 수준에서는 고전적 맑스에서부터 포스트구조주의까지를 넘나들며 토론을 벌리지만, 정작 구체적인 수준에서는 '오로지 자카르타의 중앙 정치 이야기'에만 몰두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학생운동이 기층민중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인도네시아의 학생운동 역시 소수부족들의 공동체 형성 운동 등과 긴밀히 연결되어야만 정치적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실현된 인도네시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때로는 인도네시아인이라는 정체성보다 다약족이나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고, 때로는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한 나라에서 인도네시아의 학생운동이 나아갈 길은 그들이 중앙정치를 향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를 애국주의에서 벗어나 localization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한 책 타이틀 처럼 이들에게 애국주의적 중앙정치 중심 활동은 무척이나 '오래된 습관'으로 보인다. 이들이 과연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흔히 아시아의 마지막 정치적 학생운동이라 불리우는 인도네시아 학생운동의 미래는 여기에 달려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들과 대화하면서 이들이 한국의 사례를 이야기할 때마다 정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들은 한국의 학생운동을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모임을 마치고 다시 UN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콕으로 돌아오는 날 인도네시아는 다시 사회적 갈등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있었다. 이들이 하루속히 사회적/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차이가 동등하고 존중받는 다원주의/민주주의 인도네시아를 건설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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