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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대통령이 4월 혁명을 뒤엎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15일. 대구에선 '이색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대구지역 최대 유통업체인 (주)대구백화점이 주최하고 대백프라자 갤러리(대구 중구 대봉동 소재)에서 이날부터 오는 21일까지 열릴 예정인 <석영기 초대전>이 그것.

애초 이 전시회를 두고 대구지역 38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박정희 기념사업 정부지원 반대를 위한 대구경북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 관계자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만큼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뭐 혁명을 기념한다고?!"

ⓒ이승욱

하지만 문제는 <초대전>을 하루 앞둔 지난 15일 '연합뉴스'에 실린 이번 전시회의 내용을 담은 <5·16 혁명 40주년 기념, 박대통령 작품전> 기사에서부터 시작됐다. 잠시 이 기사의 주요 부분을 발췌해 살펴보자.

"지난 61년 발생한 5·16 군사혁명의 40주년을 맞아 (주)대구백화점이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작품전을 갖기로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중간 생략)... 특히 작가는 50대 이상 기성세대들이 느끼는 5·16에 대한 향수와 박 전대통령이 주는 함축된 시각적 의미를 미학적 화면 구성과 컴퓨터, 복사기 등을 이용해 합성하거나 형태를 변화시켜 재배치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킬 예정이다"

이 기사가 연석회의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에 알려지면서 이 초대전에 대한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우려가 높아졌고, 결국 15일 밤에야 급하게 다음날 전시회가 열리는 대백프라자 앞에서 '전시회 반대 시위'를 계획했다.

작가, "정치적 의도는 없다. '박정희' 이미지를 이용한 예술 작품일 뿐"

이날 대구백화점 주최로 열린 '5·16 기념'(주-당초 제목을 그대로 인용해 쓴다. 이 문구는 수정된 보도자료에서는 삭제됐다) <석영기 초대전>의 '주인공' 석영기(계원조형예술대) 교수는 지난해 가을 '2000 화랑미술제'에 초대되어 이미 박정희 전 대통령을 테마로 제작한 작품들을 일반인들에게 선보인 바가 있다.

석교수가 이번에 전시한 작품은 일명 'Copy Art'(복사미술). 그의 작품은 사진을 컴퓨터나 복사기를 통해 단순하게 변형, 합성하여 유화로 옮기는 방법으로 제작된다고 한다.

석교수는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요구할 때면 손을 내젓고 "오해를 사기 싫다"는 말로 더 이상의 답을 삼갔다. 다소 길지만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들어보자.

ⓒ이승욱

- 이번 <초대전>은 어떻게 열리게 됐나?
"작년 11월 화랑미술전을 통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를 이용한 작품을 출품했었다. 이번엔 대구와 '박정희'라는 인물 사이에 일정 정도 관계도 있고, 5.16이 4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작년부터 주최측과 협의를 시작했다. 물론 정치적인 의미는 없다."

- 특별히 '박정희'라는 소재를 선택한 이유는
"공교롭게도 난 1960년생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대학을 다닐 때까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결국 성장기 내내 고향의 추억처럼 머리 속에 꽉 차 있는 것이 박대통령의 모습이었다."

ⓒ이승욱
- 언제부터 '박정희'를 소재로 정했는가. 계기가 있었나?
"10년 전쯤부터 작품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성장기 때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물었다.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은 태극기, 박정희, 교련복, 새마을운동 등이었다. 그래서 익숙한 이미지를 정하기 위해 '박정희'를 선택했다."

-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는 의혹도 있다. 이런 점에 대해 설명한다면
"작품을 전시한다는 자체만을 가지고 그 인물을 비호하거나 옹호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작품을 보고 판단하면서 결국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작품활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승욱
- 그렇다면, 이 작품을 본 일반인들의 평가는 어떤 것 같나?
"가난을 체험했던 기성세대의 경우에는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박정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할 것이고, 그 이후 세대의 경우에는 정치적인 억압을 박정희의 인상으로 판단할 것이다. 30대 이후 세대의 경우에는 대체로 무관심한 것 같다."

그의 말과 갤러리 관계자의 말을 종합적으로 요약해 보자면 60, 70년대를 상징하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소재로 삼으면서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이분법적인 평가를 극복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을 대상으로 놓고 옛 시절의 '향수'(주 - 이후 '기억'으로 수정)를 더듬어보자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번 <초대전>이 시민단체의 반발을 산 것은 바로 이 부분에 있었다. 석교수의 주장대로라면 혹여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어린 시절의 '추억'에 빠진 채 '박정희'에 대해선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무비판의 '향수병'에 빠진 것은 아닌가.

갤러리의 상업성이 '516혁명 기념'을 낳았다?

ⓒ이승욱
작가의 의도를 뒤로 미루더라도 문제는 이 <초대전>을 기획한 갤러리 쪽이 지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의식을 건드리면서 '상업성'을 충족시키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속엔 잘못된 역사 인식마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 <초대전>의 기획의도를 담은 보도자료에는 이러한 대목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작품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고향인 대구지역에서 5월 16일을 전후해 전시되어진다면 고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적 정치의 의미와 근간 불고 있는 70년대 향수와 함께 새로운 국가적 재건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50년대 한국전쟁의 휴전 후 어려웠던 60년대의 경제적 사정과 정치인들의 선거부정과 파벌싸움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경제적 성장의 계기가 되었던 5.16에 대한 향수는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들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향수일 것이다"

시민사회단체, "오히려 관객들의 객관적인 판단을 박탈하는 것 아닌가"

16일 오후 3시 시민단체 회원 10여 명은 전시회가 열리는 대백프라자 앞으로 모였고, 회원들은 이번 행사 책임자인 갤러리 담당자 김아무개 대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승욱
이 자리에서 '박정희 기념사업 정부지원 반대를 위한 대구경북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연석회의) 이영기 공동집행위원장은 "자유로운 예술 활동과 작품의 전시를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관계자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역사 인식이 부족한 청소년이 관람할 수 있고, 5.16쿠데타에 대해 왜곡된 시각이 존재하는 이상,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한다고 주최측은 주장하지만, 이는 결국 박정희를 기념하는 꼴이 돼 버리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작품을 관람한 희망의 시민포럼 김두현 사무국장도 "최소한 작가가 박정희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해서 관람객들이 박정희를 독재자란 느낌보다는 친근한 인물로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다"면서 "작가가 말하는 긍정적이나 부정적인 것도 관객이 판단해야 할 몫이라 하지만 작가 자신이 그것을 박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또 "최소한 예술 작품이라 하더라도 예민한 주제인 만큼 세심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동안 실랑이가 있은 후 결국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갤러리 쪽은 갤러리 쪽에서 실수를 인정하고, 각 언론사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수정해 다시 배포한 후 정정 보도를 요구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합의내용은 보도자료 내용 중 ▲'5·16 기념 - 석영기 초대전' 부분에서 '5·16 기념'을 삭제 ▲'군사 혁명'을 '군사 쿠데타'로, 그리고 ▲'5·16에 대한 향수는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들이면...'에서 '향수'라는 의미를 미학적 시각에서 친근감으로 접근해 사용한 단어의 의미로 분명히 하는 것 등 세 가지로 결정됐다.

결국 '군사혁명을 찬양'한다는 의혹에서 출발한 이번 소란(?)은 이렇게 주최측의 '실수'로, 그래서 하루 동안 벌어진 씁쓸한 '해프닝'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오늘도 그곳에서 여전히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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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 오마이뉴스(dg.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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