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4월 11일 매향리 소음피해 소송에 대한 선고공판이 있던 날. 재판을 맡은 서울 민사지법 장준현(張準顯) 판사는 "오늘 선고할 판결 가운데 사회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매향리 판결 선고가 있는데 다른 사건의 판결이 끝난 후 마지막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는 말로 재판을 시작했다.

판결을 내리기까지 판사가 느꼈을 심적 부담과 고충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다른 십여개의 사건들에 대한 판결이 지리하게 이어지는가 싶더니 드디어 매향리 판결 차례가 되었다. 이번에도 판사는 예의 사건들과는 달리 판결문을 낭독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판결문에도 고심의 흔적은 역력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매향리 사격장 인근 주민들이 사격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으로 인해 청력손실, 고혈압, 스트레스, 수면부족 등 신체적, 정신적 피해와 생활침해를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며 "사격장 소음으로 인해 발생한 주민들의 피해는 사격장의 공공성을 감안하더라도 사회통념상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밝히고 "하루 평균 소음피해가 70dB 이상인 주민 6명에게는 1천만원, 소음피해가 70dB 미만인 주민 8명에게는 9백만원씩 모두 1억3천2백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주민들은 지난 98년 2월, 주민대표 14명에 대해 1인당 1천만원씩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오폭에 대한 불안감, 개발제한으로 인한 피해 부분은 직접적인 증거를 찾기 어렵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손해배상 청구 시효를 들어 배상기간을 지난 95년 2월부터 소송이 제기된 98년 2월까지 3년으로 한정했다. 이렇듯 다소 미흡한 구석도 있지만 사실상 완전 승소나 마찬가지라는게 주민들의 생각이다. 손해배상액은 차치하더라도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매향리 사격장 문제를 사법부가 공식 인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만규 주민대책위 위원장은 "우리 매향리 주민들도 인간임을 인정함으로써 사법부에 양심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것" 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번 판결이 갖는 가장 큰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적어도 미군들에게 매향리 주민들은 더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보다 실감나게 전투연습을 하기 위한 실전용 타겟에 불과했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폭격소음에 미군들은 귀를 보호하기 위한 장구를 착용하면서도 겨우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있는 주민들에겐 어떠한 보호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무방비로 폭격소음과 오폭피해에 내던져진 채 주민들은 "우리는 무슨 귀머거린줄 아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다!"며 절규했다. 그렇게 십수년간 한미 당국을 향한 외침이 이제야 메아리쳐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판결은 미군기지로 인해 피해받는 지역 주민들에 대한 배상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데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동안 한국정부는 미군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는 주민들의 주장에 대해 국가안보니 한미동맹관계를 내세워 묵살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판결문에서도 보여지듯 아무리 미군기지의 공공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기본적인 인권과 생활권이 침해되어선 안된다는 것을 판시하고 있는 것이다.

재판이 끝나고 주민들은 미대사관 앞에서 비록 버스 안에서나마 승리와 기쁨의 만세를 부른 뒤 예약해 둔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또 한번 축배를 들었다. 아마도 이날 술맛은 어느 때보다 기막히게 좋았으리라. 그리고 주민들의 얼굴에 환하게 피어나던 웃음...

사실 미군폭격장으로 인한 지난 50년간의 피해와 고통을 돈으로 따지자면 1인당 천만원이 아닌 일억을 준대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그 돈 천만원은 그냥 돈이 아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는 종자돈이다.

십여년간의 투쟁에서 주민들은 매번 패배와 좌절의 쓰라림을 느껴야 했다. 그때마다 미국이란 존재는 더이상 저항할 수 없는 존재로 커져가기만 하고, 상대적으로 한국정부의 무능력함에 좌절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주민들이 투쟁과 삶에서의 자신감과 희망을 되찾게 된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성과다.

이날 승리의 경험이 앞으로 매향리 폭격장을 완전 철폐시키고, 매향리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데 큰 힘이 될 것으로 믿는다.

덧붙이는 글 | 매향리 소음피해 승소 판결에 관한 기사는 이미 여러개 올라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갖는 각별한 의미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되새겨 보자는 의미에서 늦게나마 올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