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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닭띠 해 벽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중국 공산당 반세기를 특집으로 다룬 특별호를 발행한다. 황금빛 닭의 형상으로 채색된 중국 대륙의 모습으로 표지를 장식한 <타임>의 이 기사는 말이 기사지 사실상 중국 정부에 대한 반성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매카시 상원의원이 빨갱이 사냥에 열심이던 냉전 시대에 중국은 미국에게 공산권의 수괴이자 소련 다음 가는 악의 제국일 뿐이었다. 이러니 중국 대륙을 장악한 공산 정권에 밀려 대만으로 피신한 장개석 정권은 미국의 대 중국 이념공세에 입맛이 딱 맞는 파트너일 수밖에..

미국으로 건너 간 장개석의 처 송미령은 이런 미국 조야의 분위기를 등에 업고 자유대만의 화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중국과 대만의 많은 중국인들이 장개석 족벌의 부정부패에 치를 떨고 있을 무렵, 태평양 건너편에서는 송미령이 어느 새 미국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중국인의 대변인으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

이 때 장개석 정권과 송미령의 나팔수 노릇을 자임하고 나선 후견인이 바로 <타임>이었다. 냉전 정서에 푹 빠진 미국인의 귀에 쏙 들어올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다니는 이 영어 잘하는 송미령에게 <타임>은 홀딱 반해 버렸고 틈만 나면 중국 정부를 비난하는 송미령의 일거수 일투족이 <타임>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되었다.

닭띠 해 <타임>의 특집기사는 냉전시대에 장개석 정권의 주구 노릇을 맡아 중국 정부에 대한 온갖 음해성 왜곡 기사를 쏟아내던 자신의 과거 행태에 대한 일종의 고해성사였던 셈이다.

1993년은 개혁개방 정책이 본격적으로 과실을 거두면서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던 때였다. 역동하는 중국대륙에서의 취재가 절실했던 <타임>은 바로 이 통과의례를 거친 뒤 중국정부와 화해를 하게 된 것.

그로부터 8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이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했고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금세기 중반에는 미국을 제치고 지구촌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자리를 잡으리라 예측하고 있다.

정찰기 충돌사건으로 긴장이 높아가던 지난 주 미국의 매파들은 사태가 지연되면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강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자 미국의 기업인과 경제전문가들이 먼저 질색을 하고 나섰다. 중국같은 대륙을 봉쇄하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만약 정말로 경제제재를 강행한다면 오히려 미국의 기업과 소비자들이 입는 피해가 더욱 클 것이라는 우려였다.

관광기념품부터 다리미까지 온통 중국제 일색인 미국의 할인점을 가보면 이런 우려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저임금 노동력 덕에 미국의 소비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공산품을 살 수 있는데 만약 중국으로부터 수입이 중단되면 당장 물가부터 치솟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러니 중국과 엄청난 투자와 교역을 하고 있는 미국 대기업의 사정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다.

자막 깔린 영화는 절대로 흥행에 성공 못한다는 할리우드의 통념을 깨고 외국어 영화 사상 최대의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는 '와호장룡'을 보는 미국인들은 두 번 놀란다.

'매트릭스'의 격투 장면을 애들 장난처럼 보이게 만드는 신기에 가까운 경공술에 한번 놀라고,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중국 대륙의 광활한 자연과 수천년에 이르는 역사의 깊이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냉전시대 <타임>의 전통을 따라 지금도 미국의 언론은 중국을 인권을 탄압하는 제3세계 후진국 중 하나로 치부하며 깔보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내비치곤 한다.

한물 간 냉전의 노래나 불러대는 부시 덕에 세계의 지탄거리로 전락한 자국의 모습에 실망하고, '와호장룡'에 묘사된 중국 문명의 심오함에 감탄하는 미국인들에게 이런 언론의 인권타령이 더 이상 먹혀들 것 같지는 않다.

두 번의 사과 끝에 간신히 승무원을 송환받는 미국인들은 어느 새 훌쩍 커버려 자신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중국'이라는 동양의 거인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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