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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하루 가까이를 달려 창사(長沙)에 닿고 있을 때, 내 머리에는 한편의 시가 떠나지 않았다. 다름 아니라 초한지의 영웅 항우(項羽:BC 232∼202)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애도해서 쓴 두목(杜牧:803∼852)의 시 제우강정(題烏江亭)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으니(勝敗兵家不可期)/수치를 싸고 부끄럼을 참음이 남아로다(包羞忍恥是男兒)/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江東子弟俊才多)/권토중래는 아직 알 수 없네(捲土重來未可知)"

내가 탄 기차가 지나는 징광시앤(京廣線) 철로와 항우가 목숨을 끊은 안후이성(安徽省) 위지앙(烏江)까지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모두가 호남의 강들이 창지앙에 기대고 있고, 후난성과 안후이성이 맞닿은 곳이라 생각하면 그 거리는 결코 멀지 않다.

두목의 조사는 후에 왕안석(王安石)에 의해 "강동의 자제는 항우를 위해 권토중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후난, 안후이 등 강남은 중국 최고 인재의 산실이라는 표현은 현대에도 그르지 않다.

초(楚)나라의 애국시인 취위앤(屈原굴원), 송(宋)나라의 주시(朱熹) 등 과거의 인물은 물론이고 현대 정치지도자의 대부분이 후난(湖南) 출신이다. 현대 역사의 주역인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해 류샤오치(劉少奇), 후야오방(胡耀邦), 왕전(王震), 펑더화이(彭德懷) 등은 물론이고 중국 경제번영의 주역인 주룽지(朱鎔基)가 이곳 출신이니 호남은 영웅의 산실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란 무엇일까. 왕안석은 항우가 무리하게 힘을 사용한 것에 대해 비난했다면 현대로 전이된 중국 역사는 어떠할까. 더욱이 나를 무겁게 한 것은 날로 부강해가는 중국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표출되기 시작하는 중국의 패권주의는 나를 또 다른 우울 속으로 빠지게 한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중미 양대 강국 구조 속의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작은 염려가 생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제작 '오리엔탈리즘'은 국제관계의 변화 속에서 우리를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한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중국 최대 인재의 산실 후난성의 수도 창사여행에 사이드의 책을 동행했다.

시대와 국가의 벽에 대한 숙고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면 흔히 동양문화의 예찬이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사이드의 책에서 만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들이 자문화 중심에서 동양문화를 지칭하는 말로 원초적으로 교만과 무시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사이드의 직접적인 표현을 빌자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으로 여기에는 근대 서양의 지리적 확장과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반셈주의), 자민족 중심주의가 동반한다.

'오리엔탈리즘'의 탄생은 무엇보다 사이드가 서구중심주의에 가장 핍박받고, 여전히 세계 평화의 방해자처럼 인식되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사이드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영미문학에 대한 철저한 탐독과 더불어 자신의 원형인 팔레스타인 문화에 대한 철저한 분석한 후 골간에서 '오리엔탈리즘'을 뽑아낸다. 그 속에서 만나는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멸시는 주로 중동, 즉 아랍문화권에 집중된다.

"동양인 또는 아랍인은 우둔하고, 활력과 자발성을 결여하며, 정도에 지나친 아부와 음모, 교활, 동물학대를 일삼는다"(알프레드 라이얼의 말) 등 동양에 대한 포괄적인 멸시를 분석한다. 이런 동양에 대한 멸시는 근대 서구인 대부분의 모습이었다. 르난, 레인, 플로베르, 코상 드페르스발, 마르크스, 라마르텐느 등 서구문학, 문화연구자들의 상당수가 동양을 미개한 민족으로 봤고, 사이드는 이런 모습을 텍스트 분석을 통해 드러낸다.

또한 이런 현상은 결코 단기적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소재로 한 유럽의 공상만화가 아니라 하나의 이론 및 실천체계로 창조된 것. 그 창조를 위해 수세대 동안 엄청난 물질적 투자가 행해졌다"고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는 하나의 문화유적으로 쉽게 반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기괴한 모습의 탑은 무너져야 한다. 동양은 과연 근대 서양인의 사고처럼 부족하고, 미개한 민족이었을까.

갖가지 상념과 달리 창사를 방문하는 나에게 이미 여행한 이들은 소매치기를 가장 조심하라는 말을 했다. 기차에서 만난 마음 착한 아주머니가 자신의 집에서 머물라고 부탁했지만 그냥 계획한 대로 일정을 진행하기 위해 역 근처의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하루를 묶는다. 창사에서 내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나를 부른 것은 2000살이 훨씬 넘은 한 여인이었다.

다름 아니라 이전에 다양한 곳에서 접했던 마왕뚜이(馬王堆)의 여인.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인간의 문화는 발전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국립박물관에서 시대에 따라 유물들을 거슬러 오를 때, 지금에서 가까운 유물이 문화적으로 뛰어나다는 확신을 갖기는 어려웠다. 조선의 문화유산이 고려의 유산에 비해 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확신을 할 수 없었고, 역시 신라, 백제의 유산도 그러했다. 비록 우리나라의 유산은 아니지만 중국에서나마 2000년전 문화의 총화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를 들뜨게 했다.

문화는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마왕뚜이는 1971년 우연히 발견되어 발굴이 시작된 전한(前漢) 초의 무덤이다. 창사시는 전국시대에 초(楚)나라 남쪽 끝의 도시였으며, 진한(秦漢)시대에는 장사국(長沙國)이 설치된 곳으로, 전국시대로부터 한대(漢代)에 이르는 무덤이 발견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됐었다. 마왕뚜이의 발굴은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50세 가량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 이창(利蒼) 부인의 시신이 2000년이 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죽은 지 4일 밖에 되지 않을 만큼 양호한 상태로 발견된 것을 포함해 목관의 주변에서 발견한 백화(帛畵:비단에 그린 그림) 등 껴묻거리(부장품)에는 목우(木偶:나무로 만든 사람인형)를 포함해, 악기, 칠기 등은 물론이고 견직물, 식량 등이 다량 발굴되었다.

이후 발굴된 3호분에서는 역경(易經 주역), 노자(老子), 전국책(戰國策)의 백서(帛書: 비단에 글을 쓴 책)와 죽간(竹簡: 대나무 조각에 글을 쓴 책)이 발견되었다. 고대 문물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높을 뿐만아니라 2000년 동안 소실, 변화, 왜곡되어온 중국 주요 저작이 시간의 벽을 뚫고 나타났다는 것은 그만큼 경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애써서 그 가치를 폄하하고 있었다. 묘의 여주인의 남편인 이창은 기원전 186년 전에 죽은 인물이니 만큼 예술적인 감각이나 과학의 수준은 낮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왕뚜이의 유적이 보관된 후난성(湖南省)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낯선 이역의 손님이 부담스러운지 하늘에서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많지 않은 겨울날의 방문자들을 따라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들어간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다양한 음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악기는 물론이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색감과 문양의 의복. 생동적이지는 않지만 독특한 인상의 목우, 정교한 칠기는 사람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중의학도인 전시장의 마지막 부분에 전시된 의학유물 앞에서 마음을 멈추었다. 지금에도 유효한 52병방(病方)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벌을 쏘인 고기를 환부에 붙이는 봉독 요법, 연기를 쬐어 치료하는 훈증요법 등은 물론이고 침이나 약재 등이 지금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을 바꿔 보아도 인간의 문화란 그다지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하다.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밝히는 책 중에 역경(易經) 만큼 정확한 책이 있으며, 몸을 밝히는 데 있어서 황제내경(皇帝內徑) 만큼 정확한 책은 없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또 다른 변용

하물며 동양의 역사나 문화가 미천하다는 근대 서구의 사고는 그 자체로도 우스운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의 문화이든 동양의 문화이든 어디가 우월하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사이드의 책 '오리엔탈리즘'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동양인들은) 정신적 및 도덕적으로 피폐하고, 고갈된 종족이다"(TE 로렌스)는 선입견은 물론이고 동양과 섹스를 연결시키는 등 근대 서구인들의 우월주의는 심각한 수준이다.

우리는 흔히 서구의 이런 사고는 근대의 종말, 특히 2차대전의 종결로 바꿔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이드는 미국의 최대 정책 결정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헨리 키신저 등의 사고 속에는 미국의 우월성과 지도성을 주장하고 무력에 의한 세계제패를 주장하는 것에서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걸프전을 비롯해서 여전히 계속되는 서방의 아랍에 대한 폭격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마왕뚜이 전시관을 나와 앞에 위치한 마오쩌둥 유물전을 잠시 살펴본다. 마오의 고향은 창사시에서 1시간쯤 가면 닿을 수 있는 샤오산(韶山)이다. 마오의 구거는 물론이고 동산광장, 류사오치의 유적으로 구성된 샤오산 역시 한 관광지로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오산 대신에 마오쩌둥이 젊은 날에 공부하기도 했고, 호남 지식인들의 산실인 위에루쉬위앤(嶽麓書院 악록서원)을 찾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랜다.

위에루쉬위앤은 강남의 명문대학 중의 하나인 후난(湖南)대학의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촐촐히 강남의 비가 내리는 서원은 양 옆에 푸르른 대나무 밭을 두어 그 깊이가 더한다. 정원의 곳곳에는 꽃들이 피어있어 강남에 포근한 날씨를 증명한다.

하지만 편견과 자만심으로 뭉친 '오리엔탈리즘'은 서구가 동양을 보는 눈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동양의 국가를 보는 눈에서도 나타난다. 다른 민족의 문화나 전통에 대한 시각의 폭력은 중국의 눈에서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가 얼마 전에 봤던 한 중국지성의 모습이다. 그는 한국의 전통을 폄하한 채 중국의 고고한 문화를 배우라고 충고했었다. 이런 모습은 한 학자에 지나지 않고, 만나는 중국인들의 상당수의 모습 속에서도 나타난다.

다시 젊은 지성의 숲 속에서

사이드의 지적처럼 "오리엔탈리즘은... 다른 문화, 민족 또는 지리적 구분 속의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그 정수를 뽑아버리고, 박탈하는 결과로서 생기는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은 이 한계를 넘어서 더욱 더 나아갔다. 그것은 동양을 단지 서양을 위한 구경거리로서 볼 뿐만 아니라 서양에 대한 시간적, 공간적으로 고정된 존재로 보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동양의 불온한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면모였다. 그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 속에서 갖추어진 정당한 지성일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잣대로 만든 편협한 폭력일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것이 폭력이었음을 말한다. 또한 19세기 영불 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위앤밍위앤(圓明園 원명원)의 역사를 말하며 분노하던 한 중국인 교수의 모습도 그것이 폭력이라고 항변했었다.

위에루쉬위앤의 교정을 걸어나온다. 여느 대학의 모습처럼 캠퍼스에는 젊은 모습이 출렁댄다. 교정에서 출발하는 시내쪽 차를 탄다. 대학생들의 틈 속에 그들 가운데 다시 마오쩌둥이나 류사오치나 주룽지 같은 지도자가 나올지는 확신할 수 없다. 너무나도 먼 곳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문화의 존귀함을 앎과 동시에 다른 문화의 소중함도 깨닫는 현명한 지성이 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할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책소개

-호랑이 굴에서 건져낸 호랑이 이야기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는 영국이 위임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1935년에 출생한 아랍인이다. 그의 가족은 급속한 변화 속에서 이집트로 이주했고, 그는 카이로에서 빅토리아대학을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과 하버드에서 공부한 후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리엔탈리즘'은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평론가 중에 하나로 꼽히는 그가 서구 근대 텍스트를 분석해 서양인들이 갖고 있는 동양에 대한 관점을 분석한 명저다. 죠셉 콘래드를 연구하던 그는 키플링, 예이츠 등을 연구했고, 나중에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발표해 학계 뿐만아니라 사회학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는 법학연구자인 박홍규 교수가 91년 번역하여 출간됐고, 2000년에는 개정증보판이 나왔다.(교보문고 간)
이 책의 영향으로 다양한 관련서적이 나왔는데, 재일동포 학자 강상중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 간)는 일본에 잔재하는 자문화중심주의를 파헤친 책으로 오리엔탈리즘과 더불어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환부에 총체적인 메스를 들이댄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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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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