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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ancholy 우울. 우울증. 우울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서울에 가장 어울리는 재즈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쎌레니어스 몽크의 'My melancholy baby(나의 우울한 연인)'가 될 것이다.

'My melancholy baby'의 특징이라면 기우뚱거리는 리듬이다. 고의적인 느릿느릿, 손가락을 피아노 위에 떨어뜨리면서 내는 굵은 손가락 터치의 음, 딸꾹질을 하는 스윙재즈. 거북이 걸음같은 음악. 부드러운 맛은 느껴지지 않지만, 들을수록 편해지는 그의 피아노 선율은 언제나 뒤로 처진다. 마치, 과거를 이야기하는 현재의 어느 모습처럼..

재즈 피아니스트 쎌레니어스 몽크의 'My melancholy baby'는 누구였을까? 혹시 그가 음악을 담당했던 영화 <위험한 관계>의 여배우 잔느 모로는 아니었을까?

쎌레니어스 몽크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서울의 삶 역시 형식적이지는 않다. 'My melancholy baby'를 들으면서 서울을 달리면, 서울의 삶이 동공(瞳孔)에 들어온다. 번잡하고 복잡해 질식할 것만 같은 도시 서울의 어딘가는 잊혀진 모습과 소외된 삶으로 가득하다. 청담동, 압구정동의 과거는 구파발, 왕십리의 현재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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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 가고 오는 사람들이 많은 곳.
ⓒ 서지영
서울은 셀 수 없을 만큼 다른 소리를 낸다. 변해왔고, 변하고 있고, 또 다시 변할 서울의 모습. 아마도 나의 'My melancholy baby'는 서울이 될 것이다. 우울한 서울. 신경질적이고 화난 모습은 아니지만, 도시는 회색빛 신음을 한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멜랑콜리>에서 멜랑콜리를 순수하게 임상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방어적인 혹은 나르시스적인 신경증으로 분류되는 멜랑콜리한 상태는 정상적인 슬픔에 의해 조장된 상태를 극복하는 데 있어 주제의 무능력에서 온 결과라는 것이다.

전통과 현대가 충돌했던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으젠 앗제(Eugene Atget, 1857 ~ 1927)라는 프랑스 사진작가가 있었다. 그는 한 세기 전, 파리에서 전개된 근대화의 여정을 자신의 사진기로 추적했다. 그는 사진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파리를 통해서 근대의 모습을 투사했다. 앗제가 남긴 1만 여점의 사진은 '파리의 오딧세이', 혹은 '근대의 얼굴'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는 30년 동안 파리를 찍으면서 파리의 근대화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상실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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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시민공원
ⓒ 성낙흥
사진평론가 진동선 씨에 의하면, 앗제에게 있어 사진기는 유효한 기록적 도구였으며, 그에게 있어 파리는 적절한 근대의 무대인 셈이었다. 찍는 순간에 과거가 되고, 찍혀진 순간에 부재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진을 통해 앗제는 한 시대의 찬란한 문명과 문화라도 시간이 흐르면 소멸하거나 쇠락해 버리는 고고학적 부재성과 만나게 된다. 앗제의 사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시간의 낙인, 부재의 인증서는 바로 '모더니티의 잔영'들이다.

앗제의 '파리의 오딧세이'는 총 7권의 앨범으로, 파리의 뒷골목에서부터 볼로뉴 숲까지, 노동자의 주방에서 부르주아의 거실까지, 골동품상점에서 호텔의 로비까지, 그의 시각은 근대화의 충돌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앗제와 그의 사진이 멜랑콜리하다'고 한다. 그의 사진이 '출현'보다는 '부재',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마부도 승객도 없는 텅빈 합승마차, 버려진 무개화차, 손님도 점원도 없는 가게, 아무도 없는 길... 앗제의 사진에는 주인공이 없다. 언제나 무엇 하나가 빠져 있는 듯한 그의 사진 속에서 사람들은 '세기의 우울'을 읽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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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수동 : 오마이뉴스 회사 근처. 정부청사 앞으로 철거되는 집들.
ⓒ 손승현
3월 13일까지 인사동 <하우아트 갤러리>와 <갤러리 룩스>에서 전시되는 <앗제가 본 서울>은 앗제가 세기의 전환기에서 파리를 투영했던 것처럼, 20세기와 21세기의 전환기를 살아가는 한국의 사진가들이 서울의 모더니티를 앗제의 시선 속에서 투영한 사진 전시회이다.

이번 전시가 앗제의 이름을 빌려왔다고는 하지만, 그의 시선을 모방하거나 그의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앗제의 사진이 지시성이 강하며, 현재를 기준점으로 과거를 투사하는 과거 지향적인 것에 비해, 우리 사진가들의 사진은 시대성이 강하고, 현재와 과거를 동축선상에 놓는 현재 지향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의 사진가들은 단지 '앗제의 시각'으로써, 서울이 흘려보내고 있는 모더니티의 잔영들을 사진기에 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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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동 : 동남아에 온 것 같은 느낌? 그러나 부와 빈이 동시에 존재하는 동네일 뿐.
ⓒ 유현민
모더니티, 근대화... 근대란 결국 도시적인 삶이다. 서울은 새로운 산업과 상업, 기술과 아이디어가 성장하는 근대화의 페르소나이다. 때문에 오늘의 근대는 어느새 과거의 근대가 되어 있고, 그것은 곧 모습을 잃어버리거나 사라질 빛보다 더 빠른 스펙트럼 안에 갇혀 있다.

사진가들은 서울의 갇혀 있는 순간의 모습(그것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알 수 없는..)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앗제가 근대의 잔영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하고 있다.

서울에 존재하는 것들. 무수히 많은 삶과 호흡들. 대도시 서울에는 부(富)가 넘치고 빈(貧)이 가득하다. 벤츠가 중심가를 달리고, 세발 오토바이 트럭이 변두리를 달린다. 사랑으로 따뜻한 가정이 있고, 홍등(紅燈)으로 뜨거운 거리도 있다. 이런 서울의 모습이 쎌리니어스 몽크의 기우뚱대는 재즈 선율처럼 뒤로 처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이었던 서울이 금세 과거가 돼 버리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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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등포 : 황량한 영등포. 쓰레기들이 이 곳을 지킨다.
ⓒ 홍일
서울의 삶을 바라보는 것은 매일 빠르게 반복된다. 반복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람의 동공이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하여 남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두뇌의 어느 곳에 희미한 잔영이라도 남아있다면 다행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현실을 기록할 수 있다는 장점을 이용해 과거로 건너가게 하는 감정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추억'이라고 하던가? 사진을 통해 낭만을 불러보는 것은 멜랑콜리하다.

<앗제가 본 서울>에서 내가 본 서울은 음울했으나, 서울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숨쉬는 서울의 모더니티, 그것을 11명의 작가들이 찍어놓은 페르소나에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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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리 : 이번 전시회 중 유일하게 사람이 들어가 있는 사진
ⓒ 백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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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구정동 : 서울의 부촌.
ⓒ 김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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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동 : 30년이 넘은 가게 앞에서.
ⓒ 윤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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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파발 : 트럭? 아니면 오토바이?
ⓒ 지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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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 경제와 정치가 움직이는 곳, 이 곳에도 서울의 밤은 온다
ⓒ 이주형

덧붙이는 글 | # 전시회 안내

3월 13일 까지 <하우 아트 갤러리>와 <갤러리 룩스>에서

# 세미나 안내

주제 : 앗제의 시각과 오늘의 서울
장소 : 하우 아트 갤러리
일시 : 3월 10일 (토) 오후 3시
사회자 : 진동선 (사진평론가)
발제자 : 이경률(미술사가, 사진예술) / 최봉림(사진사가, 사진미학)
토론자 : 정주하 (백제 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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