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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운주사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운주사 창건 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내에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는 석불과 석탑. 과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불사를 시작했는지 그리고 과연 도선국사와 운주사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부도가 없는 절 운주사

운주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부도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 완전한 발굴이 되지 않아서 추후 발굴될지는 모르지만 현재로는 보이질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를 보관하는 것으로 일반인들의 묘하고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부도가 모든 절에 다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 높은 스님들이 많이 입적하신 절은 수많은 부도가 있지만 대부분의 절은 소수의 부도만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곳은 부도가 전혀 없다. 한 번 생각해 볼 사안이다.

물론, 운주사가 송광사나 대둔사처럼 큰 사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본인이 부도 얘기를 하는 것은 뒤에 언급할 운주사의 창건 주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므로 본 글을 다 읽은 다음에 다시금 부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 부도 : 고승의 사리나 유물을 안치하는 기능을 한다. 그 기원은 당나라에서 선종(좌선을 통한 해탈을 중시하고 설교나 문자 대신 마음을 전달하는 것을 중시여기는 종파로 달마대사가 중국에 전파했음)이 들어온 9세기이다. 현재 가장 오래된 부도는 844년 제작된 '염거화상부도'이고 그 이외에 연곡사 동부도, 쌍봉사 철감선사부도가 있는데 매우 아름답다. 부도도 탑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지만 각 부분의 표현은 다르다. 모양별로 나누면 크게 팔각원당형, 방형, 오륜형, 복발형(종형)으로 나누어진다.


운주사 창건의 배경 '도선 국사의 풍수와 무관하다?'

운주사에 전하는 전설에는 우리 나라 풍수에서 절대적인 인물이 여지없이 등장한다.

바로 '도선 국사'인데 전설에 의하면, 국사가 풍수지리설에 의거,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있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말은 운주사의 다른 한문표기로 운주(運舟)사의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다른 전설을 소개하면 도선 국사가 하루밤낮동안 도력으로 하늘의 석공을 불러서 1천 개의 석탑과 1천 개의 석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와불이 천불천탑의 마지막 천불인데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천년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와불을 막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첫닭이 우는 바람에 하늘의 석공들이 올라가는 바람에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는 전설이 깃들여 있다.

한편에서는 그 닭울음소리가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흉낸 것이라고도 하던데...

이는 아마도 조선 후기라는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한 행주론(行舟論·한반도를 배형국으로 보고 운세가 일본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풍수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전해진 사료에는 아직까지 이 점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에 (雲住寺在千佛千塔之左右山背石佛塔名一千又有石室二石佛像相異座)-운주사에는 천불, 천탑이 절과 주변 산에 있고 모습이 다른 2분의 부처를 모신 석실이 있다-이란 기록이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성종 때(1481년) 만든 동국여지승람을 이후 계속 수정해서 중종 때(1530년) 완성된 인문지리서. 역대 지리지 중 가장 종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정치사·제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


그렇다면 탑과 불상의 조성 시기를 통해서 알아 볼 수밖에 없는데 현재까지 전하는 석불과 석탑의 양식이나 가람터의 발굴 결과로 미루어 봤을 때 도선이 활동한 9세기 양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조성연대는 고려중기인 12세기 정도로 평가하고 있으며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운주사와 도선 국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보여지고 후대 사람들이 운주사의 지리적 위치에 도선 국사의 풍수 사상을 연결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운주사를 세웠나

이제 창건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을 살펴보자.
먼저 운주사의 탑에서 그 비밀을 유추할 수 있다. 탑은 불교에서 신성시되는 조형물이기에 크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탑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다른 곳으로부터 다른 불교문화가 들어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운주사의 독특한 탑 양식은 중국 남쪽지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운주사의 지리적 위치에서도 살펴 볼 수가 있는데 현재 운주사 앞은 호수가 있지만, 댐으로 막히기 전에는 이곳까지 물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목포 앞바다에서 영산강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가장 먼저 나주를 지나게 된다.

나주는 고대로부터 남중국과의 교통로로 각광받던 곳이다. 이곳에서 상류를 향해 오르다보면 물길은 둘로 갈라지는데 바로 그 사이에 운주사가 있다. 중국을 통한 문화유입이 될 수 있는 중간지점에 운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남중국 쪽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건너온 시기가 운주사 탑과 불상이 세워진 때와 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11, 12세기에 150회에 걸쳐 인원이 왔다고 하는데 이들은 대개 절강, 복건성을 출발해서 주산열도를 지나서 우리나라 서남해 안을 향해서 북상했을 것이다. 그럼, 이시기 주로 우리 나라에 건너온 사람들은 누구일까?

절강, 복건성은 중국에서 주로 해상활동에 종사했던 백제유민들의 거주지역이다. 아마도 고려의 건국을 계기로, 그 동안 신라에 의해 봉쇄돼 왔던 해상로가 개방되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백제유민들이 대거 고향으로 되돌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능주읍지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실제 외부로부터 들어온 사람들이 다수 정착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운주사는 나주 지역의 호족, 이 지역 민중 세력 그리고 백제 유이민들의 문화가 어우러져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다음으로 고려 승려 혜명이 창건했다는 주장도 있다.

전남대 김동수 교수는 '동국여지지'에서 이 절이 고려 승려 혜명(惠明)에 의해 조성된 것이란 기록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慧'자와 '惠'자는 서로 통하게 쓰이는 용례가 많기 때문에 일찍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慧明)과 운주사에서 발굴된 혜명(惠明)이라는 글자의 주인은 동일인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 근거로 '일봉암기'의 기사 중 은진 관촉사 미륵불상(대인석상)과 운주지곡에 천 개의 불상과 탑을 세운 것을 가리켜 비보처에 불적을 세운 사례로 든다.

김교수는 두 지역을 병립시켜 서술한 이 기록은 운주사 창건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로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운주사의 불적 편년에 가장 근접한 시기이고, 또 고려 초기 괴력을 갖춘 신이적(神異的)인 불상 조성이나 불사가 많았음도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오직 운주사 석불만이 알고 있을 뿐...

이 외에도 창건 주체와 목적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있다.
당시 불교계와는 교리 자체가 다른 새로운 종파가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성의 불교계로부터 소외 받는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개척 포교당이라는 주장도 있고 나주 남평이나 화순 능주의 넓은 평야에 경제적인 기반을 가진 세력들과 승려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찰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는 신도들을 위해 대량으로 조성하기 위해 수많은 석공들이 토속적인 심성을 반영한 유적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답은 오직 운주사의 부처님만이 알고 계실 것이다.

"누가 세운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해. 지금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자기 마음자리 보는 것이야.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다. "

다음 기사 : 마지막회 '공사바위에서 바라본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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