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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넘치다가 소나기가 한 줌 뿌려졌다.
온몸이 젖도록 그 비를 맞았다. 다시 햇살이 쏟아지듯 내리면 한 여름 얇은 교복은 금새 말랐다. 비가 무섭지 않았다. 정다운 손길 같았다. 소년은 비 온 뒤 무지개가 뜬다는 것을 알기에 무지개를 사랑하듯 소나기도 사랑했다.

무지개 뜨던 시절.
편지 한 장 보냈더니 한 번 보자하여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때 그분의 나이가 스물 서넛이었던가. 나는 학교가 있는 을지로6가에서 서대문 영천을 지나 달동네로 만화가 방영진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대개 토요일이었다. 중2짜리 걸음으로 한 시간 반을 걸어서 갔다.
방선생님은 " 왔냐? " 하고 키타를 둥둥 쳤다. 양정고에서 색소폰을 다루었던 방선생님은 어딘가 가볍지 않은 곡을 치곤 했다. 나는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방선생님을 찾아 갔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 겨울은 어김없이 왔다.

서대문 형무소(교도소)담을 끼고 돌면서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면 좁다란 골목에 문간방에서 키타 소리가 둥둥 나곤 했었다. 방 한 쪽에 차분히 쌓인 책 가운데 플레이 보이지가 몇 권 있었다.
빨간 융단에 누운 마릴린 몬로의 알몸이 소년에게 아플 정도의 고통으로 다가 오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방선생님이 "이 친구처럼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 하며 나의 관심에 몬로에 가 있는 것과는 달리 털보 셀 실버스타인의 사진과 그림을 보여주곤 했다. 다른 외국 만화도 방선생님은 보여주었지만 나는 실버스타인의 그림을 잊지 못했다.

재미 삼아 실버스타인의 그림을 지금도 나는 베낀다. 10년 넘어 지금까지 나는 거의 매일 그의 그림을 베끼고 또 베끼고 있다. 아내는 내게 "자기는 복사기 같다" 하고,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그림을 그릴 때가 아닙니까" 할 정도이다.

그의 선은 간결하고 알기 쉽다.
그의 만화는 한 편의 시이며 한 번 보면 가슴에 새겨진다. 나는 인터넷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그림을 받아서 노트북의 바탕그림으로 깔았다. 그는 만화를 그리고 키타를 치면서 시를 쓰다가 지금은 가버렸다. 그의 자유를 부러워하던 나의 스승이신 방영진 선생님도 키타를 치면서 세상을 떠났다.

몇 년전, 무심한 제자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한 번 들을래. 자작곡이야" 할 때가 겨울, 찾아오는 이 없는 노년의 방선생님에게 외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나 내게는 한참 바쁜 시간이었다. 전화기를 통해 선생님의 키타 소리가 들려오고, 적막감과 고독이 설움처럼 다가왔다.

그 해, 선생님은 연말의 카드로 <근하신년>이라는 글씨와 청년 방영진 시절에 그렸던 그의 만화 주인공들을 내게 그려왔으니 그분의 글씨와 그림이 내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것이며 마지막 것이다. 그 분에게 키타는 친구였으며 일어서지 못한 장애의 세월에서 자유로워졌다.

나의 어린 시절 만화 스승은 강한 라이벌이었던 산호의 라이파이와 만화 판매 부수에 신경을 쓰며 "내 만화를 라이파이에 비교하다니…"하던 자신만만하던 청춘이었다. 지금 무지개 잃은 시절에 서 있어도 그 분의 모습이 쌍무지개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눈오던 날, 그는 방에 갇혀 있었고 펄펄 나는 걸음으로 찾아간 내 걸음에 때로는 눈이 밟혔던 그 세월의 계절이 지금 와 있다. 책장을 펼치다가 낙엽처럼 떨어진 근하신년 카드에 내 마음은 어린 시절로 달려간다. 계절은 어김 없으나 스승은 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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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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