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올 겨울 들어 한번도 눈이 내리지 않더니 크리스 마스 이브날 저녁 하얀 눈이 소담스레 내렸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땐 평소와 다를게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하지만 30대 중반의 나이엔 별로 색다를게 없는 모양입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들뜬 기분도 들지 않고 선물을 기다리는 설레임 같은 것도 없습니다.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날과 마찬가지로 출근을 서두르고 있으니 특별할게 없죠. 아내는 '몇시에나 퇴근하냐'며 뾰로퉁 해진 얼굴로 묻습니다. 크리스마스날 출근하는 남편이 그렇게 예뻐 보이지만은 않는 모양입니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말로 위로를 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섭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겁니다. 분명 어저께까지만 하더라도 늘상 보아오던 풍경이었는데 오늘 아침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겨울의 까칠함만을 간직하고 있던 뒷산이 어느새 하얀 눈 세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밤 사이, 온몸으로 눈을 맞아 하얀 눈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어릴적 초가집 방문을 열고 맞이했던 눈 내린 시골 아침의 설레임이 서울의 뒷산에 그대로 옮겨져 있습니다. 작은 풀잎들은 눈에 푹 쌓여 얼굴만 빼족히 내밀고 있고 커다란 나무들은 눈으로 된 하얀 털모자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기분이 상쾌해지고 가슴이 콩닥콩닥해 집니다. 한동안 사라졌던 크리스마스의 설레임이 마음속에서 솟아 오릅니다. 하얀 눈이 전해주는 깨끗함과 설레임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밀려 옵니다. 어릴적 간직했던 순수의 희망과 부푼 설레임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과 가슴 벅찬 기대감이 생생히 살아 움직입니다.

어느새 빙판이 되어버린 골목길에서 신발 썰매를 타며 즐거워 합니다.


2

큰 길가에는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뜸합니다. 출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막혀 있는 도로도 한가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눈은 다 녹아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건물의 튀어 나온 부분이나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 세워져 있는 철제 담장의 난간위에 고작 눈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눈 내린 서울 아침의 풍경입니다. 서울의 거리엔 눈이 앉아 있을 조그만 자리조차 없습니다. 시골처럼 눈이 내려 앉을 지붕도, 장독도 없습니다.

서울의 눈은 이미 설레임과 희망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심과는 거리가 멉니다. 단지 차가 막히고 길을 미끄럽게 해주는 불편한 존재일 뿐입니다. 눈이 녹고 나면 지저분한 거리를 만들어 주는 존재일 뿐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이, 여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이, 환경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마음이,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는 도시의 환경이, 괜히 나만 피해볼지도 모른다는 도시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마음이 서울의 눈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찍 문은 연 가게에선 어느새 크리스 마스 캐롤이 울려 퍼집니다. 캐롤속에는 희망이 담겨져 있지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바쁘기만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이 있는 시청역에서 내렸습니다. 군데군데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노숙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지난 토요일까지만 해도 '해직자 복귀'를 외치며 전단지를 돌리던 지하철 노조원들은 아예 천막을 짓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까칠까칠한 모습이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밤샘 농성을 벌인 모양입니다.

한쪽에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들떠 있는데 한쪽에선 이렇게 생계를 걱정하며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크리스 마스는 즐거운 성탄이 아닌 악몽의 크리스마스로 기억될 것입니다.

신문에는 성탄을 맞이하는 교회와 성당의 차분함과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들뜬 모습, 휘황찬란한 거리의 풍경이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면에는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노조의 파업 소식, 오빠가 다니는 학교의 친구들이 모아준 어머님의 수술비를 도둑맞았다는 여자 어린이의 허탈한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경제가 점점 어려워 진다는 소식도 빠지지 않고 실려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상반된 얼굴들이 교차합니다. 만인에게 은총과 행복이 가득해야 할 크리스 마스는 이렇게 사람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어떤이에게는 희망과 기쁨을 그리고 어떤이에게는 분노와 좌절로 다가 옵니다. 한쪽에서는사치와 낭비가 한쪽에서는 배고품과 추위가 교차합니다.

2000년 크리스 마스를 맞이하는 우리 사회의 풍경입니다. 그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