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화<나홀로 집에>를 보면, 맥컬리 컬킨이 공원에서 거렁뱅이 할아버지를 사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둘이 너무 쉽게 친해진다는 점이다. 한사람이 "hi!"하고 인사하니까 다른 한 사람이 "hi" 맞장구를 치고, 그 이후엔 세칭 우리말로 맞짱을 뜬다.

세상에 아무리 높은 사람도 내 앞에 있으면 단지 "you"가 되는 언어. 열 살이 안된 소년과 노인과의 자연스런 만남. 이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그들의 언어에 가식이 없기 때문이리라. 영어에서 존칭이나 존댓말이 없는 건 이래서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파고다 공원에 앉아있는 할아버지 한분께 "안녕?" 하고 인사를 건내보자. 아마도 "이 후레자식아! 넌 에미애비도 없냐?"하는 욕설과 함께 봉변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게다. 그런 마당에, 할아버지들께 "너", "나"거렸다가는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상상해 보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 연장자를 대우하는 풍습과 언어를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마는, 우리나라에서 연장자의 권위의식과 연공서열의식은 유별난 측면이 있다.

싸우다 할말 없으면 "너 몇 살이야?" "넌 에미애비도 없냐?"가 튀어나오는 사회문화. 능력보다, 연공과 나이를 중시하는 문화. 자기 후배가 자기보다 먼저 자기 위로 올라가는 꼴을 못참는 사람들. 군이나 검찰, 언론사 같은 몇몇 조직에서는 한 후배가 선배들보다, 먼저 윗 선으로 승진할 경우, 선배들은 줄줄이 옷을 벗는 기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곧 죽어도, 후배 밑에서는 안 있어!"하는 비틀린 심사가 관행으로 굳어진 것이다.

혹시 이런 문화가,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주고받기 점점 더 어려운 여건을 만드는 건 아닐까?

우리말의 존칭어법체계도 지켜야할 소중한 문화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존칭어법을 포기함으로써 상하관계가 좀더 자유로운 생각의 교류로 발전할 수 있다면, 공자의 장유유서를 고집하며 까다로운 존칭어법을 고집하여야 하는지 할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영어가 원래부터 존칭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아니다. 영어판 사극을 보면, 대사 중 시도 때도 없이 shall을 붙이며,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복잡한 존대어법체계를 저버린지 오래다.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소산이다. 아직 공자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꿈도 못꾸는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어권 사회에서 존대말과 함께 예의범절이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와 다른 것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예의를 갖추는 멋있는 문화. 어린이와 여자들, 즉 신체적 약자들을 우대하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문화라는 점은 우리식 예의범절에 대해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필자가 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주변 어른께 존대말을 쓰기 싫어서는 아니다. 한 드라마에 대한 언론의 평가가 이 시대에 살아있는 공자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현실사회에서는 물론이고, 드라마에서 조차, 어린 사람이 연장자에게 반말을 쓰면 입에 거품을 무는 현대판 살아있는 공자.

인기리에 방송중인 SBS 수목드라마 <줄리엣의 남자>에 대해 방송인 전여옥씨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처음 본 할머니에게 반말해대는 장기풍이나 두 번째 만난 장기풍의 코를 찌르면서 “할머니, 나 이거 줘. 마음에 들어” 하는 김민희 대사를 여과없이 내보내는 SBS는 시청자를 어떻게 보고있나 하는 불쾌감이 든다. 삼류 정치인은 삼류 유권자 몫이듯 ‘줄리엣의 남자’는 삼류 시청자의 삼류 작품이다. SBS는 ‘도둑의 딸’‘경찰특공대’등 인간적이고 공들인 드라마를 내놓았다. 그러나 황당한 드라마만 밝히는 시청자 때문에 재미를 못봤다. 시청자가 모처럼 마음잡았던 SBS를 선도(?)하지 못하고 ‘날라리’로 되돌린 셈이다. SBS의 의지가 박약했던 것은 당연한 얘기고 말이다."<조선일보>

이 평가의 옳고 그름을 떠나, 드라마 속의 인물들이 존대말을 쓰지 않는다고 격분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은 이미 죽어버린 공자의 혼을 잡고 연연하는 구차한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읽고 거품을 물을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떠오른다. 이글은 존대어법 폐지론을 주장하는 글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좀 더 자유롭고 발전적인 인간관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담고 있고, 특히 드라마에 대해서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글을 읽고,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고 주창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존대어법 폐지쯤이야 어떠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생각을 너무 앞서서 지나치게 해석한 것이라고 미리 지적해 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