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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른 새벽부터 벽을 헐어내느라 부지런히 해머질을 합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허물어진 흙더미를 쳐내고 다시 한쪽 벽을
허무는데 미장이 종기 형님이 찾아 왔습니다.

종기 형님은 흙먼지 먹으며 일하는 후배가 애처로웠던지 한마디 거듭니다. "벽에 물 좀 주면서 해봐라. 환장을 할 꺼다." 경험 없이 허물어져 가는 낡은 한옥을 사서 고쳐 살겠다고 무작정 달라 들었으니
하는 일 마다 왜 서툴지 않겠습니까.

호스를 끌어와 물을 뿌리자 마른 흙이 환장을 하고 물을 빨아 댑니다.
수십년 동안 한방울의 물도 마시지 못했으니 흙인들 오죽 목이 말랐을까요.

물을 뿌려도 뿌려도 흙벽은 젖어 들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몇 동이의 물을 들이키고 나서야 벽을 이루었던 흙은 마침내 생기를 되찾습니다.
죽은 듯이 굳어 있던 흙들이 다시 살아 꿈틀댑니다.

이제 저 마른 흙들도 들판으로 돌아가면 다시 생명을 키우고 살찌우는 옥토가 되겠지요.

지난 몇 년, 고향으로 돌아와 헌 집을 고치고 또 새로 지으면서 나는 집의 가치는 결코 집을 지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집의 진가는 그 집을 허물 때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한옥을 허물어 고치며 나는 한옥이 좋은 집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한옥은 허물어도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었지요. 지붕에 올리고 벽에 발랐던 흙은 말라 비틀어졌지만 물기를 머금자 다시 살아나 새로운 집을 짓는 재료로 사용되거나 떠나왔던 땅으로 되돌아갑니다.

그 흙들을 빻아 채로 쳐서 벽이나 천장 왕토 바르는데 썼더니 시멘트 가루보다 곱게 미장이 됩니다. 채로 거르고 남은 흙덩이들은 들에 뿌려두니 비온 뒤 그대로 살아나 논밭의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대들보, 연자, 기둥으로 쓰였던 나무들은 성한 나무는 성한 대로 다시 집 짓고 고치는데 재목으로 쓰이고, 상한 나무는 상한대로 땔감으로라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섯 칸 짜리 큰 집을 다 허물어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에 시멘트 벽돌로 지은 슬래브 집이나 아파트는 어떻습니까. 딱딱하게 굳은 시멘트 덩어리와 녹슬고 부식된 철근들은 집이 해체되는 순간 하나도 쓸모 없는 쓰레기 더미로 돌변하고 맙니다.

오늘, 나는 또 한 채의 낡은 집을 허물며 모름지기 집이란 사용할 때만이 아니라 허물어낸 뒤에도 쓸모가 있어야 진정으로 가치 있고 좋은 집이란 사실을 새삼 확인합니다.

사람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그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죽은 뒤에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블럭과 모래를 가득 실은 덤프트럭 두 대가 또 어느 마을로 배달을 가는지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이 섬에서도 갈수록 한옥을 보기는 어려워질 것 같군요.

편리함을 좇아 모두가 양옥집만을 짓기 때문이지요. 저녁이 되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덤프트럭 뒤로 모래먼지가 뿌옇게 휘몰아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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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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