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 집 앞에는 살구나무가 있습니다. 여름이면 노랗게 익은 살구를 거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추나무도 있고 살구나무도 있지만 사람들의 관심거리는 단연 살구나무입니다.

작년에는 어떤 나이가 지긋이 드신 아저씨가 나이값을 하지 못하고 살구가 노랗게 되기도 전에 살구주를 담근다면서 모조리 따가 버려 한 여름동안 살구가 노랗게 익어가는 탐스러운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썰렁한 여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올 여름에는 한 여름 내내 노랗게 익은 탐스러운 살구 열매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가며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참으로 풍성했고, 과수원이나 시골이 아닌 육중한 시멘트 건물이 둘러싼 공간에서 탐스럽게 영글어가는 열매를 볼 수 있다는 신선한 감동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노랗게 매달려 있는 살구나무는 보기에도 참 좋았고 아주 탐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한 여름을 지나면서 살구들이 노랗게 되어도 그대로 매달려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노란 살구가 그렇게 무성하게 달려 있는 꼴을 못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한 여름이 지날 때까지도 살구들은 노랗게 익어 거의 모두 그대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나무에 붙여 놓은 경고 표시 때문이었습니다. 그 경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살구는 주민 공동의 재산입니다. 소독약을 살포하였으니 따먹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 경고문 때문에 잘 버티던 살구들이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나무를 흔드는 소리에 놀라 밖을 내다보니 할머니 한 분이 살구나무 가지를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생각하지 않고 너무 무자비하게 흔들어대는 바람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흔들어대면 나무가 성치 않겠어요. 벌써 나무가지가 몇 개 부러져 있잖아요. 내년에도 열매가 열려야지요. 말씀 하세요. 제가 잠자리채로 원하는 열매를 따 드릴께요."

그 말에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 아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결국, 그 일을 전후하여 아이들이 가지에 매달리기도 하고 어른도 나무에 매달려 나무가지를 부러뜨리며 살구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따버렸습니다.

나무에 붙여진 경고 때문에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살구 열매가 하나 둘 없어지고 남들이 따가는 것을 보더니, 남들도 하는데 자기만 손해볼 수 없다는 심리에 쫓겨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따가려고 난리를 친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나무 꼭대기에 있는 살구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없어져 버렸습니다.

살구나무에 대한 제 소망은 밑에 손이 가는 정도만 따고 나머지 위에 있는 살구들은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더 두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을 먹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그걸 길게 더 두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고 마음이 풍성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거 몇 개 따먹어 봐야 영양적으로 보충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작년에 난리를 치면서 이미 부러진 나무가지와 올해도 흔들리고 꺾인 살구나무의 가지를 보면서 인간들의 무지하고 무자비한 욕심에 혀가 절로 내둘러집니다. 좋은 이웃들이 먹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공통의 문화적인 분위기를 창출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무자비한 약탈에 의해 상처 입은 살구나무는 그래도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가며 추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이 오면 또 무성하게 초록잎으로 단장을 하고 노란 살구를 약탈 당하지 않으려고 그 초록 잎새들 사이에 숨겨가며 노란 살구를 매달 겁니다. 내년에는 사람들이 살구나무를 무자비하게 흔들거나 꺾지 않고 우리의 소중한 친구로 삼기를 바랍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에서 현대자동차 연구소 엔지니어로, 캐나다에서 GM 그랜드 마스터 테크니션으로 지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